78.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 낸다 (3)
낙양의 황궁은 밤늦도록 연회가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하진은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크하하하! 마셔! 마시라고! 오늘 같이 즐거운 날 마시지 아니 하면 언제 마실 것인가?”
그리고 그 옆으로 수많은 간신배들이 와서 아첨을 떨고 있다.
“헤헤. 역시 대장군이십니다. 대장군께서 황실과 이 나라를 지켜내신 겁니다.”
“암요. 대장군이 아니라면 그 누가 이의민에게서 이 황실을 지키겠습니까?”
“하하. 그렇지. 나밖에 없지. 나니까 이리 낙양을 지켜낸 것이지.”
그런 간신배들 틈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바로 정욱이었다.
한동안 하진과 소원한 관계를 이어가던 그는 다시 하진의 앞에 섰다.
“정말 감축 드립니다. 대장군.”
정욱의 인사에 하진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중덕? 갑자기 자네 웬일인가? 그동안 찾아도 아니 보이더니?”
‘제대로 삐졌군.’
정욱은 혀에 기름을 바른 듯 하진의 마음을 녹였다.
“죄송합니다. 대장군. 그간 소인이 대장군을 뵙지 못해 많이 서운하셨습니까? 소인이 괜히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하해와도 같은 대장군의 은혜를 어찌 소인이 잊겠습니까? 소인은 그저 대장군의 안위가 걱정되어 최근 많이 바빴던 것입니다. 부디 이해해주십시오.”
“나는 이 나라의 대장군이다. 내 안위를 걱정할 것이 있는가?”
“물론 대장군께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이는 없습니다. 역적 이의민도 결국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허나 대장군께서 대단하시고 뛰어나신 만큼, 그런 대장군께 빌붙어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간신배들은 많습니다. 소인은 그런 자들을 사전에 발각하고 처단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흠! 흠! 아. 그런 것 때문이었나? 난 자네가 요새 뭐하고 다니나 했더니.... 아무튼 오늘만큼은 즐거운 날이니 적당히 쉬고 같이 즐기세.”
“감사합니다. 대장군.”
하진은 정욱에 대한 의심과 서운한 마음이 어느 정도 가셨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한창 술을 마시는데 또 하진을 찾는 인물이 있었다.
“대장군. 순욱이 급히 대장군을 뵙고자 합니다.”
“음? 문약이....?”
하진은 별 생각 없이 순욱을 만나려 하는데 갑자기 정욱이 나섰다.
“대장군. 문약은 멀리 하시지요.”
“아니? 왜?”
“소인이 아까 말씀드린 것 있잖습니까? 대장군을 이용만 하려는 간신배들 말입니다. 아무래도 문약은 그런 자인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문약이 간신배라니?”
“생각을 해보십시오. 문약이 대장군께 가까이 접근했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바로 조조를 옥에 가둔 이후부터입니다. 문약은 원래 조조의 사람이었는데, 그가 옥에 갇히자마자 대장군께 접근을 했고, 그 이후 사면 얘기도 나오게 됐습니다. 이래도 문약이 과연 순수한 마음으로 대장군의 곁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원체 생각이 모자란 하진으로서는 그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적이 없으나 정욱의 말을 듣고 보니 옳은 것 같았다.
“허어! 그렇군. 최근에도 내 업적을 치켜세우는 척하면서 조조의 사면 얘기를 은근슬쩍 끼워 넣더군. 별 생각 없이 문약의 청을 들어준다고 하긴 했는데....”
“결국 문약이 대장군 주위에 있는 목적은 단 하나인 것 같습니다. 조조의 사면 말입니다. 즉, 그는 진정으로 대장군께 충성하는 자가 아닙니다. 조조만 사면되면 문약은 바로 대장군의 곁을 떠날 겁니다. 그를 멀리 하시지요.”
“흥! 중덕. 자네 말이 맞아. 괜히 술맛만 버릴 뻔 했군. 문약에게 전해라! 나는 바빠서 당분간 만나기 힘들 것 같다고 말이야.”
그렇게 순욱을 멀리하는 하진. 다시 신나게 술을 마시며 연회를 즐겼다.
그러던 하진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아무리 기다려도 유표가 오지 않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유반. 그런데 대체 유표는 왜 아직도 오지 아니 한가? 숭산에 있다고 들었는데 이쯤 되면 슬슬 도착할 때가 아닌가?”
그런데 유반은 아무래도 대답할 만한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아! 돼장군님.... 자알 오셨숨돠. 아까 줜투에서 말임돠. 줴가 도망가눈 그놈의 다리를 콱! 이렇게....”
술을 심하게 마셨는지 혀가 꼬부라진 발음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하진이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크흐흐. 유반. 이 친구... 많이 취했군.”
평소라면 감히 대장군인 자신에게 보일 수 없는 태도라며 화를 냈을 하진이지만, 오늘은 너그러웠다. 이 정도는 충분히 재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게다가 유반은 낙양에서 이의민군을 몰아낸 장수이자 이의민을 죽인 유표의 조카 아닌가.
옆에서 정욱도 유반을 두둔하며 거들었다.
“오늘은 좋은 날이 아니겠습니까? 대장군께서 너그러이 봐주시지요.”
“그래. 뭐 답을 들을 상태는 아닌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지. 다들 너무 많이 마신 것 같군. 벌써 자시 아닌가?”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날이라고는 하나 아직 역도들의 세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유표는 내일 쯤 낙양으로 들어올 듯하니 이만 연회를 파하시지요.”
“그래야겠군. 자! 이만 연회를 마친다.”
하진이 연회의 끝을 알렸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둘씩 연회장을 떠나갔다. 혼자서는 도저히 몸을 가누지 못하던 유반도 황충에게 질질 끌리다시피 들린 채 나갔다.
그렇게 낙양에 배정된 숙소로 향하는 유반과 황충.
“아! 어뒬 가누냐....? 이촤 가좌고.... 이촤!”
“장군. 이제 다 왔습니다. 좀 정신을....”
숙소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술김에 헛소리를 해대는 유반이다. 그런데 숙소의 문이 닫히자마자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유반의 다리가 꼿꼿하게 섰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혀 꼬부라지던 발음 대신 술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똑 부러지는 발음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후훗! 황 장군. 어떤가? 볼만 했는가?”
“장군께서 이런 재주가 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다. 주군께 알려라.”
**
어두운 밤, 낙양 외성 앞에 나타난 대규모의 군사들이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하늘색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유표군 본대가 드디어 낙양에 입성하는 중이었다. 낙양 외성을 지키던 황군들도 그들을 알아보고는 즉시 예를 갖췄다.
“유 자사님이십니까?”
“그렇다. 형주의 유 자사가 왔다고 대장군께 전갈을 드려라.”
하지만 지금 하진은 이미 연회를 마치고 잘 시간이었다.
“대장군께서는 이미 침소에 드셨습니다.”
“그런가? 그럼 나보고 여기서 계속 기다리라는 말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장군께서 유 자사가 오시면 안으로 모시라는 지시를 하셨습니다.”
황군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유표와 그 군사들을 낙양 내부로 안내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응? 지금쯤 끝이 나야 되는 게 아닌가....?”
유표군의 병력은 기껏해야 3만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행렬의 길이를 보니 절대 3만은 아니었다. 처음 유표군을 맞닥뜨렸을 때는 어둠 때문에 병력이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행렬이 들어가는 걸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경비병들이 자세히 보니 어느새 유표군의 복장이 달라져 있었다. 아니. 그들은 유표군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깨달았을 때는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유표군, 아니. 이의민군 12만 병력이 전부 낙양 외성 안으로 진입한 후에 본색을 드러냈다.
선두에서 곽봉이 외쳤다.
“다들 잘 들어라! 이번 작전은 사실상 주군께서 다 떠먹여 주신 것이다! 너희들은 그저 받아먹기만 하면 된다는 거다! 그런데도 실수를 하는 놈들은 나! 곽봉이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 다들 함정의 위치는 다 숙지했겠지?!”
“옛! 장군!!”
곽봉의 질문에 12만 군사들이 우렁차게 답했다. 그 큰 소리에 그제야 낙양 내성의 경비병들이 부랴부랴 움직였다.
“혹시라도 함정에 걸리는 놈이 있다면 바로 이마에 병신이란 글자를 새겨줄 테니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곽봉은 벌써 내성을 넘기라도 한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그런데 곽봉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내성 성문 쪽으로 다가가니 절로 성문이 열렸다.
이의민군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내성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내성 안에서 유표군으로 위장하고 있던 이의민과 그 수하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고순과 관해는 군사들 몇몇을 데리고 내성 성문을 급습했다. 외성 쪽만 경계하고 내성 안쪽은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던 황군은 손도 쓰지 못하고 순식간에 당했다.
순식간에 내성으로 진입하는 이의민군.
대부분 함정은 이의민이 파괴를 했지만, 몇 가지 처리하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로는 이의민군의 내성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
곽봉이 얘기했던 것처럼 이의민군 군사들은 이미 사전에 그 함정들을 숙지하고 있었다. 길을 돌아가는 등 피할 수 있는 것들은 전부 피했고, 반드시 그곳을 지나쳐야 해서 피할 수 없는 함정도 있었지만, 순유와 곽가가 파훼법을 진작 마련해 놓았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윽고 이의민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내성에 들어온 이의민군 본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주군! 별고 없으셨습니까?”
“지금 날 보면 모르겠나? 그런데 봉효. 몸은 좀 괜찮은가?”
“이제 멀쩡합니다. 아니 그래도 공달형이 몸에 좋다고 하는 것들은 죄다 먹이는 바람에 오히려 예전보다 더 건강해진 것 같습니다.”
“주군. 봉효에 대한 걱정은 이제 놓으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건강을 되돌리겠습니다. 이번 백제와의 교역에서 얻은 것들 중 몸에 좋은 게 아주 많더군요. 솔직히 교역 전에는 백제를 우습게 봤는데 생각보다 제법 대단한 나라 같습니다.”
“뭐 잘 됐군. 아! 인사하게. 유엽이라고 아주 쓸 만 한 사람이야.”
“하하! 자양선생께서 주군을 도우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실로 잘 오셨습니다.”
“저야 말로 공달 선생과 봉효 선생에 대한 위명을 익히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서로가 서로를 영웅으로 알아본 이들이다. 마음 같아서는 술이라도 한잔하며 밤새도록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시간은 없었다.
“주군. 이제 서두르셔야 합니다. 저들도 곧 변고를 알아차리고 대응을 할 것입니다.”
“그래. 이럴 시간이 없군. 이제 난 뭐하면 되나? 이대로 황궁으로 쳐들어가면 되겠나?”
“그것보다는 적이 모이기 전에 내성과 외성의 병력을 정리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물론 이미 외성은 거의 정리를 했지만 내성은 이제 시작입니다.”
“그렇군. 그럼 나와 여기 있는 수하들은 내성을 정리한다. 모두 명심해라. 해가 뜨기 전에 우리는 낙양을 점령해야한다.”
성문 쪽은 거의 점령했지만 아직 내성 성벽과 병영 쪽에 남아있는 황군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 황군들은 별 저항도 못하고 이의민군 앞에 쓰러졌다.
“으앗! 뭐야?!”
“적이다! 적이....! 크악!”
12만이 넘는 대군이 들어와 공격을 하는데 소란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애초에 아무리 밤늦은 시간이라고 해도 항상 삼엄한 경계를 펼치는 이곳에서 그만한 대군의 진입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황군의 대응은 늦어도 너무 늦었다.
이의민과 그 수하들이 경비들을 기습하여 미리 처리해버린 탓도 있지만, 황군을 이끄는 장수들이나 대신들이 모두 긴장을 풀고 술에 취한 탓이 더 컸다.
그로 인해 이미 낙양 내성 안이 거의 다 장악당한 뒤에야 황궁에도 보고가 들어갔다. 아직 술이 다 깨기도 전이었다. 많은 대신들과 황군 장수들이 불안한 심정으로 모여 있는 가운데 대장군 하진이 들어왔다.
“음... 그러니까.... 누가 왔다고....?”
하진은 아직 술이 덜 깬 건지 아니면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어눌한 음성으로 바보 같이 되묻고 있었다. 왕윤은 이마를 짚으며 하진을 다그쳤다.
“대장군! 정신 차리시오! 지금 이의민이 왔다고 하지 않았소!”
“이의민이 어찌....? 그는 죽었는데....? 중덕... 중덕을 불러라!”
하진은 애타게 정욱을 찾았지만 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한심한....!”
왕윤은 그 모습을 보다 못해 하진 대신 명을 내렸다.
“지금 즉시 내성 안의 모든 황군에 명을 내린다. 전군은 속히 황궁 안으로 모이라 전하라!”
하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모두 비관적이었다.
“대장군! 동문 쪽의 황군들은 모두 몰살되었다 합니다.”
“사도! 북문에 있던 황군들은 모두 이의민에게 투항을 했다고 합니다!”
낙양 내성에 있는 모든 황군을 다 불러봤지만, 이의민군에게 당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때 황궁 밖에서 거침없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두두두두두!!
그 소리를 들은 대신들과 장군들은 얼굴은 모두 시커멓게 변했다.
“사, 사도... 어쩌면 좋겠소?”
하진은 제발 해결책을 달라는 표정으로 왕윤을 불렀지만, 왕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제는 이의민을 막을 방법이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