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 낸다 (2)
주준의 표정은 환희로 가득 찼다. 방금 전까지는 모든 상황이 절망적이었다. 이의민이 없는 이의민군도 이기지 못하고 있다. 만약 이의민이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내성까지 뚫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지금 외성 뒤쪽에 군사들이 나타났다. 저들이 유표의 원군이 아니라 이의민군일 수도 있었다. 유표군을 물리치고 돌아온 이의민군이라면 더욱 절망적일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주준은 저들이 이의민군이 아니라 유표군이라고 확신하며 미소를 지었다.
‘저 거대한 먼지구름과 이 정도 말발굽 소리라면 족히 3만은 넘는 군사들이다. 이의민이 유표군을 상대하려고 1만이 조금 넘는 별동대를 끌고 나갔으니 절대 이의민군일 가능성은 없다.’
그런 주준의 생각이 정확하다고 확인이라도 해주듯 황군을 상대하고 있던 이의민군은 빠르게 외성 쪽으로 물러섰다. 아마 외성을 끼고 유표군을 상대하려고 하는 듯했다.
하지만 외성 성벽 쪽은 이미 시끄러웠다. 유표군은 어느새 외성 성문 쪽을 장악해서 이의민과 전투를 벌이는 것 같았다. 주준이 이 모든 것들을 눈으로 확인한 건 아니었지만, 왠지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크흐흐! 적들이 볼썽사납게 도망치고 있구나! 이 기회를 놓치면 아니 된다! 전군! 적들을 쫓아라!”
상황 상 이의민군은 외성 성벽 쪽 유표군과 황군인 자신들에게 앞뒤로 포위당했다고 볼 수 있었다. 계속 몰아붙이면 완전히 섬멸할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그런 주준을 말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성급히 행동하지 마시오! 주 장군. 적들이 물러갔지만 쫓을 필요는 없소. 여기서 자리만 지키고 결과가 어찌될지 기다립시다.”
주준을 말린 인물은 사도 왕윤이었다. 주준이 현재 전장에서 황군을 이끄는 지휘관이었지만, 사도인 왕윤의 말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왕윤의 말대로 따르기에는 너무 기회가 아깝게 느껴지는 주준이었다.
“왕 사도. 지금 낙양 외성 밖에서 온 군사들은 연합에 합류하기로 한 유표의 군사들입니다. 적들을 앞뒤로 포위하고 섬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뜻입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어찌 그냥 버리라고 하십니까?”
“우장군은 외성으로 온 정체불명의 군사들이 정녕 유표군이라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소이까? 정말 확실히 봤냐는 얘기요.”
“왕 사도. 지금 외성 쪽에 나타난 군세라면 유표군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도께서 잘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 같은데 설명을 드리자면....”
“묻는 말에나 대답하시오! 직접 눈으로 확인했냐고 질문을 했잖소!”
직위로 찍어 누르는 왕윤의 질문에 주준은 결국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마지못해 답을 했다.
“...본 적은 없습니다.”
주준이 대답하니 왕윤은 그제야 달래는 듯한 어투로 그를 설득했다.
“직접 보지도 못하고 그리 판단을 하실 게 아니란 말이오. 이 곳은 황궁이 있는 낙양이란 것을 명심하시오.”
“알겠습니다. 사도.”
주준도 자신이 너무 섣부르게 확신했다고 인정했다. 왕윤의 말대로 직접 눈으로 확인조차 하지 않고 유표군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여기는 황제가 있는 곳이다. 그 어떤 일도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외성 쪽의 동향을 살피고 있는데 서서히 군사들의 고함소리와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외성을 거의 다 뒤덮을 정도로 거대했던 먼지구름 역시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그리고 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윤과 주준, 그리고 황군들은 침을 꿀꺽 살피면서 드러나는 군사들을 자세히 살폈다.
긴장됐던 그들의 표정은 서서히 풀렸다. 그리고 다시 기쁨의 미소가 그들의 얼굴에 자리 잡았다.
“사도. 보이십니까?”
주준의 질문에 왕윤 역시 기쁜 음성으로 답했다.
“음... 저 하늘색의 복장은 틀림없이 형주군의 복장이오. 게다가 저 ‘형주’, ‘유표’라고 적혀 있는 깃발을 보니 틀림이 없는 것 같소.”
역시 기대했던 대로 상대는 유표군이었다.
유표군은 황군 근처에 도달하자 일제히 말에서 내리고 예를 갖췄다. 이미 복장으로 확인을 했지만, 저들의 태도를 보아하니 더욱 안심이 되는 황군이었다.
유표군의 가장 선두에 있는 장수는 투구를 벗고 왕윤과 주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해왔다.
“사도와 우장군을 뵙습니다. 소장은 형주에서 선발대를 이끌고 온 유반이라 하옵니다.”
왕윤은 참으로 반갑다는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아! 일전에 봤었지? 유 자사의 친족이 직접 와주었군. 그런데 유 자사는 어디 있는가?”
“유 자사께서는 본대를 이끌고 곧 도착하실 것입니다. 소장에게 발 빠른 군사들을 먼저 이끌고 내성 쪽으로 가서 황군과 합류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소장은 황군이 모두 내성에 있을 줄 알았는데 사도와 우장군께서 이리 내성 밖까지 나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 역시 원군과 호응을 하러 이리 나왔지. 물론 유 자사의 군사들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진즉 합류했을 테지만, 아무래도 황궁을 지키는 우리 임무를 생각하면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네.”
“하하. 그건 어쩔 수 없지요. 소장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유 자사께서도 아마 같은 마음이실 겁니다.”
주준은 여전히 큰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 때문에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것 아닌가. 어쨌든 역도들을 낙양에서 몰아냈다는 것만 생각하며 유반을 이끌었다.
“사도. 대장군께도 보고를 드려야 하기에 유반 장군을 여기에 계속 두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아차차! 내 정신 좀 보게. 대장군에게 가야겠지요. 어서 유반을 데리고 들어가시오.”
“예. 사도.”
주준은 유반을 데리고 하진에게 갔다.
대장군으로서 가장 많은 책임을 지닌 하진은 오늘도 여전히 황궁 깊숙한 곳에 앉아 전황에 대한 보고나 받고 있었다.
그래도 낙양에서 이의민군이 물러갔다는 보고는 이미 받았는지 지금은 내성까지 나와서 주준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오오! 우장군! 어서 오게. 이의민군이 퇴각했다고?”
“예. 대장군. 그리고 여기 유표군의 유반이 왔습니다.”
하진은 아직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유반에게 이의민에 대한 질문을 재차 했다.
“그럼 이의민, 그 역적 놈은 확실히 죽었는가?”
“예. 대장군. 유 자사께서 그의 수급을 직접 가지고 계십니다. 유 자사께서 들어오시면 곧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유반이 수급까지 있다고 확답을 해주었는데도 하진은 아직 뭔가 미심쩍은 게 남은 모양이다.
“그런데 외성의 역도들이 8만이라 했는데 그들을 그리 쉽게 몰아냈다고?”
“역도의 수괴 이의민이 사망했지 않습니까. 그들로선 허겁지겁 본거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제야 하진의 표정이 풀렸다. 떨리는 음성으로 눈에 눈물까지 살짝 글썽이다가 갑자기 광소를 터뜨렸다. 살짝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은 그간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오오! 참으로 이 나라의 흥복이로다! 정말 이의민, 그놈이 죽었다니... 크흐.... 크하하하! 이의민이 죽었어! 죽었다고!!”
지나치게 기뻐하는 하진을 보며 왕윤이 한마디 던졌다. 그가 보기에는 아직 완전히 안심할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장군. 그리 기뻐하기에는 아직 이르오. 역도들의 잔당이 아직 잡히지 아니 했소. 그들 역시 적지 않은 수에 이의민이 죽은 복수를 하겠다며 칼을 갈고 있을 것 아니오.”
하지만 하진은 이의민이 죽었다는 것 외에 다른 것들은 전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크하하! 사도. 뭘 그런 걸 걱정하시오? 역도들의 수괴인 이의민이 죽었소이다. 남은 놈들이 누가 얼마나 있다고 해도 오합지졸에 불과하단 말이오. 남은 잔당들은 굳이 황군이 나설 필요도 없을 것이오. 연합의 다른 제후들이 알아서 잔당들을 토벌해 줄 테니 말이오.”
하진은 더 이상 이의민의 잔당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왕윤은 하진이 너무 쉽게 생각을 하는 것 같다고 여겨 불안했지만, 그래도 큰 고비를 넘겼으니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아무튼 유 자사가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군. 흐흐. 어서 이의민 그놈의 잘린 머리를 봐야겠어. 여봐라! 뭣들 하느냐? 역도들이 소탕했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겠느냐?! 어서 잔치를 열어라! 유반. 자네도 당연히 참석하겠지?”
“어느 분의 분부라고 거절하겠습니까? 오히려 소장에게 이런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잔치를 열라는 하진. 그런 그의 모습에 왕윤과 주준 등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결국 내버려두었다. 괜히 좋은 기분에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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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 내성의 한 모퉁이에 위치한 임시 막사가 있다. 그곳에서는 많은 군사들이 황궁 쪽을 보며 투덜대고 있었다.
이들은 바로 유표군이었다. 3만이 넘는 군사들이 갑자기 들어왔으니 낙양에서도 급하게 거처를 마련했으나 편하게 쉬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막사였다. 황군 지휘관들은 전부 하진의 지시로 잔치를 준비하기 바쁘니, 상대적으로 유표군 거처 준비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다. 몇몇 군사들은 아예 막사도 없이 밖에서 노숙을 해야 되는 처지였다.
유표군에 대한 푸대접은 그뿐만이 아니다. 하진은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잔치를 연다고 했는데 막상 말단 군사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유반과 같은 소수의 고위 지휘관들만 참석할 수 있는 잔치였기에 이곳의 군사들은 황궁에서 흘러나오는 고기 굽는 냄새만 맡고 있어야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에 이의민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는 고순과 관해, 유엽도 있다. 그런데 복장이 이상하다. 원래 착용하는 장군복은 없고, 말단 보사의 복장인 이들이었다. 그것도 유표군 복장이다.
“미치겠군. 고문이 따로 없어.”
이의민이 투덜대자 고순이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 주군. 자리가 많이 불편하십니까? 굳이 주군께서 이곳에 함께 하실 필요는 없으셨는데....”
“뭔가 오해하는군. 나 보사출신이야. 이런 차가운 땅바닥에 앉아 있는 건 익숙한 일이지. 단지 저 놈들이 퍼먹는 술과 고기 냄새가 불편하단 말이야. 치사한 놈들. 우리는 그래도 말단 보사들에게까지 잔치 음식을 전부 나눠주는데, 대장군이란 작자가 쪼잔하게 이게 뭔가.”
“하하! 그건 소장도 아쉽습니다.”
고순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던 이의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누군가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다행이 이들의 정체를 파악한 적은 아니다. 우금이었다. 그 역시 유표군 보사 복장을 하고 있다.
“왔는가? 우금. 알아본 건 어찌 되었나?”
“예. 주군. 이것입니다. 정욱 선생이 모든 함정을 파악을 해놔서 쉬웠습니다. 오늘 같은 날은 군사들의 경계도 느슨해졌으니 더 쉬울 것입니다.”
우금은 서신 하나를 이의민에게 건넸다. 그 서신에는 낙양 내성에 있는 모든 함정과 매복들이 자세하게 표시가 되어 있었다.
낙양에 있는 군사 구조물에 대한 정보는 극비 중에 극비였다. 하지만 정욱이 그간 하진에게 붙어서 각종 정보를 캐낸 덕분에 아주 쉽게 획득할 수 있었다.
“좋군. 지금 저 놈들은 술 퍼먹느라 정신없으니까, 몰래 파훼할 수 있는 것들은 전부 파훼하지. 뭐 당장 어쩌지 못하는 것들은 잘 표시를 해 놓은 후 공달에게 전달을 하고 말이야.”
“예. 주군.”
명을 내린 이의민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필요한 모든 정보를 얻었으니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였다.
“고순. 관해. 너희들은 군사들과 외성과 내성의 경비들을 은밀히 처리해라. 자양. 자네는 혹시 모를 중덕의 전갈을 기다리다가 만약 온다면 바로 보고하라. 나는 우금와 함께 함정들을 파괴하겠다.”
역시 이들이 여기 있는 이유는 내성 잠입 작전을 시행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손에 넣은 유표군과 함께 그대로 황군을 공격해도 됐다. 하지만 순유는 아군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더 줄이고, 더 쉽게 황궁을 차지하기 위해 한 가지 꾀를 냈다.
황군은 유표가 이의민에게 항복한 것을 모르니 그걸 이용해서 잠입 작전을 펼치기로 말이다. 이의민은 순유의 계책을 바로 받아들였다. 왠지 처음 이곳에 왔을 때가 생각나기도 했다.
“흐흐. 황궁까지 잠입이라.... 옛날 생각이 나는군. 그때는 결과적으로 대장군을 구했던 셈이지만....”
지금은 정반대의 목적을 가진 이의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