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 낸다 (1)
황충을 얻은 이의민은 또 다시 누군가에게 다가갔다. 온몸이 결박된 채 무릎 꿇려져 있는 유표였다.
유표는 두렵다는 표정을 지은 채 눈치를 살피고 있다가 이의민이 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대답했다.
“대사농. 형주의 모든 세력을 이끌고 항복하겠소.”
“말은 그리 하고 내 뒤통수를 칠지 어찌 알겠나?”
이의민은 유표에게 물어보면서도 그가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한 세력을 이끄는 군주치고는 너무도 무력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의민에 대한 복수심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마음속으로도 완전히 굴복한 유표다. 이의민은 이런 눈빛을 워낙 많이 봤기 때문에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요. 다시는 대사농을 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알겠다. 믿어주지.”
이의민 입장에서도 굳이 유표를 죽일 필요가 없었다. 지금 유표를 죽이게 되면 형주는 사실상 빈 땅이 된다. 그럼 이의민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그 땅이 고스란히 들어갈 수 있었다. 이의민은 현재 낙양에서 발을 빼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유표를 살려주고 그를 굴복시킨다면 자연스럽게 그의 땅인 형주도 얻게 된다.
그래서 유표의 항복을 받아내고 그와의 주종 관계를 맺는 걸로 마무리를 짓는 이의민이다.
이의민은 이미 유표가 완전히 굴복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유표는 제 발이 저리는지 알아서 모든 것을 갖다 바칠 기세였다.
“이제부터 매년 2만 섬의 곡식과 1만 냥의 금을 상납하겠습니다. 그리고 형주에서 올라오는 추가 병력 2만 역시 주군께 바치겠습니다.”
알아서 척척 바치는 유표를 보며 이의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한 가지 잊은 것이 생각나 유표에게 물었다.
“좋군. 아!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게 있었다. 우리가 숭산에 있다는 서신은 대체 누가 보낸 건가?”
유표는 망설임 없이 사실을 말했다.
“맹덕의 군사인 순욱이 보냈습니다. 그 서신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의민이 서신까지 확인하니 과연 순욱이 보낸 것이 맞는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서신을 보낸 자는 이의민의 수하들이 아니라는 뜻이다.
내부의 간자가 순욱과 내통을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배제하기로 했다. 유표에게 서신을 보내려면 내부의 간자가 직접 보내는 것이 낙양에 있는 순욱을 거쳐서 보내는 것보다 훨씬 빠르기도 하고 안전하기도 할 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순유가 순욱에 대해 항상 염려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이의민이었다.
‘순욱이란 놈의 예측력과 통찰력이 비상하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내부의 간자를 통한 게 아니라 순수하게 우리 군의 움직임을 예상한 것일 가능성이 높겠군. 확실히 방심할 수 없게 만드는 적이야.’
조조를 상대로는 이미 한 차례 승리를 맛본 이의민이지만, 방심할 수 없게 만드는 인재들이 아직 많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심각한 걱정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고려 시절이었으면 자신의 힘만 믿고 이런 모략가들의 계략에 당했을 이의민이지만, 환생으로 인해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방법을 찾았다. 이의민의 곁에 있는 순유나 곽가도 순욱에 비해 결코 처지는 인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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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여전히 낙양의 옥 안에 갇혀 있었다. 그래도 사형수로 갇혀있는 것 치고는 몰골이 꽤나 괜찮았다. 조조의 수하들이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쓴 덕분이었다.
“문을 열어라.”
오늘도 어김없이 조조를 찾는 수하들이 있었다. 이번에는 순욱이 차례였다.
“문약.... 왔는가? 자네의 소식은 들었네. 하진의 곁에서 아부를 떨며 총애를 받고 있다지?”
그런데 누구보다 조조를 따르는 순욱은 그간 뜸했던 모양이었다. 조조도 그것 때문에 목소리에 서운한 감이 묻어 있다.
“송구합니다. 주군. 다 주군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흥. 그의 마음을 얻고 나를 살려 달라 애원할 셈인가?”
“그것만으로 하진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면 백번 그리 했을 것입니다. 허나 주군에 대한 처형 결정을 바꾸려면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하진이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을 정도로 결정적인 것이 필요했습니다.”
“처형 결정을 바꿀 정도라.... 그런 게 과연 있겠는가?”
“지금 당장 이의민을 잡는다면 충분히 바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순욱의 말에 조조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조조는 감옥에 갇혀있지만 듣는 것이 있었다. 지금 황군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의민군을 이길 수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 순욱의 말은 헛된 희망을 품고 뜬구름을 잡는 소리로 들렸다.
“이의민을 대체 무슨 수로 잡을 수가 있을까....? 하진이...? 하묘가...? 대체 누가 잡는단 말인가?”
“하진의 총애를 얻은 덕에 유표가 곧 낙양에 도착할 거라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 유표가....? 그도 형주에서 가장 강한 제후라는 건 알고 있네. 허나 유표 정도의 인물은 결코 이의민을 이길 수가 없네.”
“아닙니다. 제 예상이 맞는다면 유표가 충분히 이의민을 잡아낼 수 있습니다.”
지금 순욱의 말투는 그저 희망을 바라는 게 아니라 확신에 차 있었다. 그에 조조도 일말의 기대감을 품었다.
“무슨 수가 있는가?”
“정욱도 유표군에 대한 소식을 알 겁니다. 그리고 당연히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이의민에게 알리겠지요. 그걸 역이용하는 겁니다.”
“역이용 한다라....”
“소인이 아는 이의민이라면 유표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당연히 그를 마중하러 나갈 겁니다. 그렇다면 이의민이 그들을 맞이하기 좋은 곳은 바로 숭산입니다.”
“그럼 그곳을 포위하면 될 거라고? 그렇다고 유표가 이의민을 이길 수 있겠나? 듣기로는 유표군의 숫자도 이의민군에 비하면 더 적다고 하던데?”
“물론 외성에 진을 치고 있는 저 군사들이 다 몰려간다면 유표가 절대 이길 수 없겠지요. 허나 이의민은 그리 할 수 없습니다. 기껏 외성을 차지했는데 이걸 버리고 갈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황군에 들키지 않으면서 유표군을 기습하기 위해 소수의 별동대만 갈 겁니다. 그리고 이의민이라면 이 별동대에 반드시 자신을 포함시킬 겁니다.”
순욱은 놀랍게도 순유와 곽가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나가기라도 한 듯 생각을 읽고 있었다.
“이의민을 처단한 공을 내세워 내 사면을 받아내겠다는 거로군....”
조조는 그제야 납득이 가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께름칙했다.
“정말 자네의 생각대로 되겠나?”
“거의 확실합니다. 물론 예상일뿐이지만 여태껏 소인이 이의민을 관찰한 바에 따르면 틀림없이 유표를 요격하러 고작해야 1만 가량의 별동대를 끌고 나갈 겁니다.”
“으음....”
그런데 조조가 께름칙한 기분을 느끼는 건 순욱이 말한 부분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조조도 순욱의 말대로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순욱은 인물이나 세력의 행보를 예측할 때 틀린 적이 거의 없었다. 조조가 우려하는 부분은 소수의 별동대로 나온 이의민이 유표에게 당연히 질 거라고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순욱이 예측한 병력이라면 당연히 이의민이 질 거라고 생각하는 게 타당했다. 그게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의민이 어디 보편적인 생각이 통하는 인물인가? 항상 상상을 뛰어넘는 행보를 보이며 여태껏 상대했던 모두를 쓰러뜨렸지 않은가.
‘내가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가? 아무리 그래도 고작 일만여 정도밖에 아니 되는 군사로 5만의 군사를 이길 리가....’
“일단 알겠네. 그럼 자네가 생각한 대로 해보게.”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복권시켜드리겠습니다.”
순욱은 조조와의 만남을 끝내고 그 길로 하진을 찾아갔다.
“오! 문약. 왔는가?”
순욱은 최근 조조에게 말한 대로 하진의 총애를 제법 얻고 있었다. 반면 하진과 정욱과의 관계는 제법 소원해졌다. 정욱은 이미 얻을 건 다 얻었다고 생각해서인지 하진과의 만남을 자제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하진은 이 시간에 정욱과 함께 있었겠지만, 지금은 정욱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대장군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지금 이의민은 외성이 아닌 숭산에 있을 것입니다. 아마 소수의 별동대를 이끌고 유표를 맞이하기 위해 나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오! 그게 사실인가? 그럼 지금이 기회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의민과 그의 별동대는 유표가 책임지고 처리할 것입니다.”
하진의 얼굴에 모처럼 미소가 피어났다.
“정녕 자네의 말대로 된다면 내 자네에게 관직과 금은보화를 내릴 것이야.”
“그것보다는 다른 청이 있습니다. 조조를 사면해주십시오.”
순욱의 청에 하진은 살짝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기껏 처형 명령을 내렸는데 이제 와서 되돌리는 것도 면이 서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이내 순욱의 청을 수락했다.
“알겠네. 그리 하지.”
이의민만 없앨 수 있다면 그깟 체면은 갖다버려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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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젊은 놈 하나를 못 뚫는단 말인가!”
주준은 화가 나서 어금니를 깨물었다.
하진의 긴급명령에 따라 주준과 순우경은 군사를 이끌고 외성으로 진격했다. 정말 하진의 말대로 이의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의민만 없다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호기롭게 돌격하던 황군. 하지만 곧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현재 이의민군 본대에는 이의민이 없지만 그가 없어도 황군 정도는 문제없다는 듯 잘 싸웠다.
황군이 오자마자 선두에 있던 이의민군은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 그리고 그 뒤로 궁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제히 황군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 상당수의 화살이 정확히 황군 군사들에게 박혔다. 선두의 황군은 거의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궁병의 공격이 끝나자 앉아있던 보병들이 창을 들고 돌격해 왔다.
보다 못한 순우경은 직접 선두로 나가 이의민군을 돌파하려 했다. 이의민군에서 지휘를 하던 장수도 순우경을 향해 나왔다. 격돌하는 두 장수. 단칼에 순우경의 창이 부러졌다. 순우경은 혼비백산하여 바로 군사들 뒤로 도망쳤다.
군사들을 마치 자신의 손과 발처럼 통솔하고 순우경을 단 일합에 무력화시킨 이의민군 장수. 그는 장료였다.
주준은 순우경이 도망치는 꼴을 보고는 이를 갈며 나섰다.
“네 놈! 이름이 무엇이냐?!”
“문원이란 자를 쓰는 장료라 하오. 우장군.”
주준은 장료만 잡으면 끝이라 생각하고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모두 저 장료를 잡아라! 저 놈만 없으면 역도들은 끝이다!”
하지만 이의민군에 장료만 있는 게 아니다. 이의민군의 좌우에서 두 장수가 튀어나오며 크게 웃었다.
“허허! 말씀이 좀 심하시오! 우장군!”
“그렇소! 문원이 뛰어난 건 맞지만, 그가 없다고 우리가 끝은 아니라오!”
서황과 악진이었다.
서황과 악진 역시 장료 못지않은 무위와 통솔력을 과시하며 황군을 격파했다. 특히 서황은 이의민과 같이 대부를 들고 있어서 그를 상대하는 황군을 절로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그제야 주준은 깨달았다. 지금의 이의민군은 이의민이 없다고 해서 결코 쉽게 이길 수 있는 군대가 아니라는 것을.
“이익! 다시 내성 안으로 후퇴....!”
주준이 내리려던 후퇴 명령을 멈췄다. 낙양 외성 뒤쪽으로 낙양 전체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거대한 먼지구름이 보였다.
썩어가던 주준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그의 생각에 지금 오는 군사들이라면 유표군 밖에 없었다.
‘됐다! 유표가 왔다면 이미 이의민은 잡았다는 말이군. 게다가 이 정도 소리와 먼지라면 족히 3만은 넘는 군사들일 것이다.’
주준은 서서히 전의를 상실하고 있는 황군을 향해 외쳤다.
“유표군이다! 연합군이 도착했다! 조금만 힘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