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형주군 (4)
“주군! 유표군이 관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제야 줄을 잡아당기던 이의민의 발걸음이 멈췄다.
“후우! 드디어 이 밭가는 소 같은 짓은 그만해도 되겠군. 좋다! 이제 투석은 이쯤 하고 본격적인 사냥을 준비한다!”
이의민으로서도 기다리던 바였다. 더 이상 투석을 못할 정도로 힘든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부를 들고 썰어 재끼는 게 더 적성에 맞다.
옆에서 유엽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이의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태껏 투석을 한다고 엄청 혹사를 한 것 같은데, 또 싸우러 전장에 나간다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주군 제 실수가 너무 컸습니다. 힘을 많이 소모하셨을 텐데 진정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의민은 그런 유엽의 어깨를 두드렸다.
“실수라니? 네가 만든 투석기 덕분에 저 환원관을 쉽게 돌파할 수 있게 된 거다. 그리고 내가 더 싸울 수 없을 것 같나? 적어도 저놈들을 베어버리기에는 충분한 힘이 남아있다.”
이의민은 정말 힘이 남아돌아서 하는 말이지만 유엽은 이의민이 자신을 감싸기 위해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수하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날 이리 감싸주시다니.... 정말 배포가 크신 분이구나. 이 유엽이 드디어 평생을 바칠 사람을 제대로 만났구나.’
유엽까지 이의민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이의민의 명령에 이의민군은 거침없이 환원관으로 돌격했다. 이미 관문은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고, 관 성벽 역시 군데군데 파괴되어 관 내부로 향하는 길이 드러났다. 이제 이의민군을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그래도 유표군 군사들 몇몇이 방패를 들고 앞을 막았다. 그들은 나머지 유표군이 환원관을 무사히 퇴각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주는 미끼였다.
하지만 그 미끼들은 조금의 시간도 벌지 못했다. 이의민군이 무서운 기세로 코앞에 다가오자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항복을 해왔다. 안 그래도 공포스러운 이의민군인데 투석기로 인해 그 공포가 극대화 됐다. 그리고 아군의 다른 군사들은 전부 도망치고 있다. 전의를 상실하는 게 당연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항복하겠습니다.”
항복하지 않고 결사항전을 택한 소수의 군사들 몇몇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이의민의 대부 앞에 단 일초도 버티지 못했다.
결국 이의민군은 도망치는 유표군의 뒤를 바짝 쫓을 수가 있었다. 퇴각하기에도 이미 늦은 셈이다.
유표군은 울며 겨자 먹기로 돌아서서 항전을 선택했다.
드디어 제대로 맞붙는 유표군 본대와 이의민군. 아직도 병력 자체는 유표군이 더 많았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의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의민은 투석기를 발동시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체력을 소비했다. 그런데도 전장에서 날뛰고 있었다. 사람의 체력이 아닌 것 같다.
그런 와중에 유표군을 이끌어야 할 유표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안 그래도 투석기에 한번 크게 정신적 타격을 입었던 유표는 이의민의 등장으로 발작을 일으킬 지경이다.
“막아라! 저 괴물 같은 놈을 막으란 말이다! 제발 누구라도 좀 저놈을 막아보란 말이다!”
어쩌면 일전의 전투에서 채모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유표가 채모를 닮은 건지 아니면 채모가 유표를 닮은 건지 모르겠다.
그런 유표의 모습은 유표군의 사기를 더 떨어뜨렸다. 자신들도 혼란스러운데 자신들을 이끌어야 할 군주가 저런 모습을 보이니 말이다.
결국 보다 못한 괴월이 또 나섰다. 유표군을 이끄는 건 유표도 채모도 아닌 사실상 괴월인 셈이다.
“채 도독! 오거 장군! 지금 멍하니 보고만 계실 거요?”
괴월이 한 차례 자극을 했지만 채모는 여전히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오거는 자존심이 있는지 창을 들고 나섰다.
“그래! 저놈도 결국은 사람일 것이다. 내가 상대해주겠다.”
오거가 호기롭게 나섰는데 이의민이 아닌 다른 상대에게 막히고 말았다.
“이런 위아래도 없는 놈. 우리 주군께서 네놈 같은 잔챙이와 어울리실 거 같으냐? 주군과 싸우려면 먼저 나를 넘어야 할 것이다.”
오거를 막은 인물은 고순이다. 당연하게도 오거는 고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시종일관 고순의 공격을 막기 급급하다가 결국 군사들 사이로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치고 말았다.
괴월은 한심하다는 듯 그 모습을 보다가 유반에게로 갔다.
“유반 장군. 채 도독도 저렇고, 오거 장군마저 저 모양이오. 이제 믿을 건 유반 장군밖에 없소.”
유반은 자신 밖에 없다는 말에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 역시 이의민에게는 도달하지도 못했다.
유반의 앞을 막은 인물은 우금이었다.
유반은 우금에게 밀리는 형세였지만 그래도 오거보다는 조금 더 버티는 모습이었다. 우금은 힘겹게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는 유반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한방을 준비했다.
“제법 잘 버티는구나! 그런데 이것도 막을 수 있을까?”
창을 쥔 손에 힘을 가하는 우금. 그때 뒤에서 이의민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금! 왼쪽으로 피해라!”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에 우금은 자신도 모르게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원래 자신이 있던 자리에 한 발의 화살과 손도끼 하나가 겹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채챙!
손도끼는 이의민이 던진 것이고 화살은 유표군 사이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즉, 유표군이 우금을 노리고 쏜 화살을 이의민이 손도끼로 막아준 셈이었다.
우금은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평범한 화살이 아니었다. 웬만하면 화살을 느꼈을 터인데, 이건 날아오는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 아마 이의민의 손도끼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우금은 죽었을 터였다.
이의민은 땅에 떨어진 손도끼를 회수하며 유표군 사이를 노려봤다.
“네놈은 누구냐?”
“나, 난 유반이오! 주군의 조카....”
“멍청한 놈. 네놈의 이름 따윈 알고 싶지도 않다. 네놈 말고 네 옆에 있는 아재 말이다.”
그제야 유반의 옆에 있던 화살의 주인이었던 자가 이의민을 향해 읍을 했다.
중년의 장수로 보였는데 범상치 않은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
“대사농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소장은 형주 남양군 사람으로 한승이란 자를 쓰는 황충이라 합니다.”
“황충.... 황충이라....”
상대는 바로 황충이었다. 그 유명한 촉의 오호대장군 중 한 명이었던 그 황충 말이다.
이의민은 황충이란 이름을 되뇌었다. 삼국지를 모르는 이의민도 들어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아! 그 오호인지 오호라인지 하는 장수였지. 그런데 그 황충은 백발이 성성하니, 나이가 아주 많다고 들었는데.... 하긴 지금이 삼국지 초창기라고 보면 얼추 맞겠지.’
황충이라는 이름을 듣고 나니 또 인재를 얻고 싶은 욕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이의민이다. 다른 인물도 아니고 노익장으로 유명한 황충 아닌가. 그런 황충을 노인 시절도 아니고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지금 얻는다면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이리라.
“우금! 물러나서 나머지 적들을 맡아라. 이 자는 내가 상대하겠다.”
우금도 황충의 비범함을 눈치 채고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실제로 이 자리에서 황충보다 높은 수준의 무위를 가진 인물은 이의민밖에 없다고 봐야 했다. 아니. 높은 수준이 아니라 같은 수준의 인물도 없다.
황충은 이의민에게 공손하게 다시 읍을 한 뒤 창을 꺼내 들었다. 이의민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인 것과는 다르게 그의 몸에서 맹렬하고도 무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흐흐! 정말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봐줄 생각은 없다.”
이의민의 대부와 황충의 창이 불꽃을 튀겼다. 둘의 일기토는 순식간에 10합을 넘겼다. 웬만한 이들은 그들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확인하지도 못했다.
이의민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과연 강하다. 역시 오호 그거란 말인가? 이곳으로 떨어진 뒤에 만난 이들 중에서는 여포 다음인 것 같군.’
이의민은 모처럼만에 제 실력을 낼 수 있게 만들어주는 황충의 존재가 기뻤다. 그리고 이런 인물을 자신의 수하로 삼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대략 50여 합이 넘어간 후부터는 확실히 우열이 가려졌다. 황충은 이의민의 공격을 막기 바빴다. 이의민이 조금만 더 몰아붙여도 금방 승부가 날 것 같았다.
그런데 이의민은 돌연 공격을 멈추고 황충에게 제안했다.
“아무래도 너를 보니 흙속에 파묻힌 진주 같구나. 애석하군. 너 정도의 장수가 어찌 아직 이름도 없이 저런 한심한 놈의 밑에 있느냐?”
공손한 태도를 취하던 황충도 제 주인을 욕하는 말에 화를 버럭 냈다.
“대사농! 아무리 그래도 내 주인을 모독하진 마시오!”
첫 번째 회유가 거절당한 셈이다. 하지만 이의민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회유한다고 덥석 받았으면 주인에 대한 충심이 별로 없다는 것 아닌가.
대화를 끝내고 다시 둘은 일기토를 이어갔다. 역시 계속해서 수세에 몰리는 황충. 그러나 그의 눈빛은 살아있었다.
황충은 계속해서 방어만 하면서도 이의민의 몸 한 곳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계속해서 막다보니 이제 이의민의 빈틈을 알 것 같았다. 황충은 단 한번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오른쪽 옆구리의 작은 틈.... 실패하면 난 죽는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그때 이의민이 더 강한 공격을 위해 대부를 크게 들었다. 그때 황충이 보던 그 틈이 커졌다.
황충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다.
‘기회다!’
황충은 놓치지 않고 그 틈을 창으로 찔렀다. 그런데 그 직후 황충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아뿔싸!’
그 틈은 이의민이 일부러 보여준 것이었다. 황충의 무리한 반격을 이끌어 내기 위한 속임수다.
이의민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볍게 창을 피하고 대부를 휘둘렀다. 대부는 그대로 황충의 정수리를 가격했다.
모두 끔찍한 결과를 예상했다. 이의민이 대부는 여태껏 공평하게 상대를 둘로 쪼갰다. 그런데 황충은 옆으로 쓰러지기만 할 뿐이다. 일부러 대부 날이 아닌 자루로 가격했기 때문이다.
“이 자를 묶어라.”
황충을 사로잡자 우금이 와서 물었다.
“주군. 진작 끝내실 수도 있으셨지 않습니까? 왜 그리 번거롭게 처리 하셨습니까?”
“후후! 이런 인물은 어디 가서 쉽게 볼 수 없지. 다른 놈은 몰라도 이 자는 꼭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이의민의 말에 유엽이 다가와 한 가지 조언을 했다.
“이 황충이라는 장수를 얻고 싶다면 유반은 웬만하면 죽이지 마시지요.”
“알겠다. 그럼 유반이나 다른 높은 놈들은 웬만하면 사로잡고 나머지는 정리하라!”
이후 다시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유표는 이미 멀리 도망친 후였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어느새 고순에게 사로잡혀 왔다. 그렇게 기세 좋게 참전한 유표군은 이의민의 별동대에게 무너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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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주시오! 살려만 준다면 뭐든 하겠소! 한승! 도와다오!”
포박되어 무릎 꿇려진 유반이 꼴사납게 소리쳤다. 이의민은 당장이라도 목을 치고 싶었지만 그래도 유엽의 조언이 있으니 일단 그대로 두었다.
“시끄럽다. 장수가 되어 부끄럽지도 않느냐? 조용히 하지 아니 하면 입을 박살내겠다.”
금세 조용해지는 유반.
이의민은 황충에게 다가갔다.
“생각은 좀 해봤나? 한승.”
이의민의 태도는 유반을 대할 때와는 정반대로 황충을 대했다. 이미 그를 묶었던 포박도 다 푼 지 오래였다.
그래도 황충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좋다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싫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로서도 유반이 자신의 주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미 그를 주인으로 정했으니 배신할 수가 없었다.
“한승. 자네가 무엇 때문에 대답을 망설여하는지 잘 안다. 하나 묻겠다. 유반은 네가 그렇게 충성을 바칠 만 한 인물인가? 네가 항복한다면 유반 역시 낙양으로 데려가 적당한 작위를 주겠다. 무엇이 너와 네 주인을 위한 길인지 생각해봐라.”
이의민의 얘기에 황충은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그전까지 별 이름도 없던 자신을 위해 이의민이 그렇게 까지 해준다니 감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원래 주인이었던 유반 역시 제발 그렇게 해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볼 것 없는 소장을 이리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대사농을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오호대장군 중 하나였던 황충을 얻게 된 이의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