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형주군 (3)
이의민은 황당함 가득한 음성으로 유엽에게 되물었다.
“뭐? 방금 뭐라고 했나?”
이의민은 그간 웬만하면 수하들이 자신 있게 나서는 일에는 지지를 해주었었다. 하지만 유엽이 방금 전에 한 얘기에는 황당함과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투석기를 만들어 환원관을 공격하겠습니다.”
처음에 나무와 바위를 언급할 때만 해도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물론 이의민이 유엽이란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알았다면 눈치 챘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의민도 투석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어쨌든 이의민은 지금 시대로부터 무려 천년이나 지난 후대 사람이다. 그 천년이라는 시기 동안 투석기는 더 정교해지고 발전했다.
물론 이의민이 투석기의 작동 원리 같은 걸 알리 만무했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개념을 알고 있는 만큼 갑자기 투석기를 만들겠다는 유엽의 의견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여기서 투석기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예. 자신 있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으음.... 알겠다. 한번 해보도록.”
이의민은 떨떠름한 표정을 수락했다. 나무나 바위 등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 자리에서 과연 투석기가 뚝딱 하고 만들어질 수 있다니. 삼국지 시대로 넘어온 후 참으로 별의별 경험을 다 하는 이의민이다.
유엽은 이윽고 군사들에게 나무를 베고 어떻게 다듬으라고 지시를 내렸다.
“굻고 긴 나무들을 택해서 베어라! 그리고 베어난 나무의 크기 별로 따로 모아라!”
유엽의 지시 하에 어느새 제법 많은 나무들이 모였고, 유엽은 다시 그것들을 어떻게 자르고 붙일지 지시를 내렸다.
지시를 내릴 때 조금의 망설임이나 고민도 없었다. 이미 예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거나 아니면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구상을 한 것 같았다.
군사들도 유엽의 지시 그대로 나무를 잘 다루었다. 평소에도 진채나 방책을 쌓을 때 하던 것이 바로 이 목공이다. 게다가 그쪽으로는 전문가(?)인 곽봉에게 하루 이틀 배운 것이 아닌 만큼 다른 군사들보다 더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다행스럽게도 이의민군이 그리 투석기를 만들 동안 유표군은 여전히 관문을 열고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이의민군은 시간을 충분히 확보한 상태로 투석기를 만드는데 집중할 수 있었다.
거의 이틀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투석기라는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의민이 원래 알고 있는 것과는 그 모습이 많이 달랐다.
여러모로 조잡해 보이고 커다란 바윗덩이를 과연 날리는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역시 이틀 만에 제대로 된 것이 나올 리가 없지.’
“이봐. 자양. 이걸 정말 쓸 수 있겠나? 돌덩이들을 날릴 수나 있겠냐는 말이야.”
“후훗! 한번 보시겠습니까? 과연 되는지 아니 되는지.”
유표군에게는 들키지 않도록 환원관 반대 방향으로 투석 시험을 해보는 유엽.
“발사!”
콰쾅!
놀랍게도 유엽이 급조하여 만든 투석기는 겉보기와는 달리 제법 투석기로서의 제 역할을 해냈다. 거대한 바윗덩이를 어느 정도의 거리까지 날리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이 정도라면 거대한 성벽을 부수는 건 힘들겠지만, 환원관 정도의 작은 관문을 부수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주군. 투석기의 시험발사도 성공적입니다.”
“하! 이게 정말 될 줄은.... 내가 또 기가 막힌 인재를 얻은 것 같군.”
기본적인 지략도 갖췄지만, 이런 투석기 같은 군사무기를 만들어내는 능력 또한 유엽의 능력이었다. 원 삼국지에서도 관도대전 당시 투석기를 만들어 적의 토산을 무력화 시켰지 않았던가.
투석기까지 준비를 마쳤으니 이제 망설일 것이 없었다.
“그럼 바로 이걸 가지고 저 환원관 관문을 부수지.”
이의민군 군사들은 바로 투석기를 환원관 앞으로 끌고 갔다.
그제야 투석기의 존재를 알아챈 환원관의 유표군은 난리가 났다.
“큰일입니다! 주군! 적들이 투석기를 만들었습니다.”
“뭣이?! 이곳 관문은 그리 크지도 아니하니 금방 박살이 날 것 아닌가?! 어찌해야 되겠는가?!”
유표는 투석기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기도 부담스러웠다.
이의민군 군사들은 이미 발사팔에 연결된 줄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투석기에 대한 대응을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군사들이 일제히 발사팔의 줄을 놓았다. 아까처럼 환원관을 향해 멋지게 날아갈 것이라 생각했던 바위덩이. 그런데 그것이 형편없이 바로 투석기 코앞에 떨어졌다.
쿵!
관문은커녕 오히려 가까이 있는 군사들이 돌덩이에 봉변을 당할 뻔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모두 놀랐다. 당장 어찌해야 될지 모르고 갈팡질팡하던 유표는 갑자기 큰 웃음을 터뜨렸다.
“허어억! 노, 놀랬다. 저게 우리 쪽으로.... 크... 크하하하! 저게 무엇이냐?! 그래. 투석기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구나!”
다른 유표군 역시 이의민군을 비웃으며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반면 관문이 부서지기만 하면 바로 돌격할 작정이었던 이의민군 군사들은 모두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투석기를 보고 있었다. 방금 전 시험발사에서는 잘 되었지 않은가. 그런데 왜 또 여기서는 안 된단 말인가.
그중에서도 유엽이 가장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유엽은 투석기를 유심히 보더니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문제점이 무엇인지 발견한 것 같았다.
“자양. 어찌된 일인가?”
“주군....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곳이 평지가 아니라 산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게 왜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원래 투석기는 움직이지 않고 고정된 상태에서 쏴야 합니다. 그리고 발사할 때 투석기가 서 있는 각도 역시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투석기는 병사들이 줄을 당기면 그쪽으로 밀려서 움직입니다. 게다가 발사를 해야 할 각도가 뒤쪽으로 더 누워 있으니, 발사 시 필요한 힘은 더 큰데 줄은 오히려 더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제대로 발사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까 시험에서는 지금의 상황과 정 반대여서 잘 발사되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문과는 아니지만 무과인 이의민은 유엽의 설명을 자세히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핵심은 파악했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음.... 그러니까 평지에서 저걸 쓰면 잘 된다는 것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유엽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주군. 저를 엄히 군법으로 다스려주십시오. 제 잘못된 판단으로 주군께 누를 끼쳤습니다.”
하지만 이의민은 유엽에 대한 처벌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일단 중요한 건 그럼 저 투석기를 잘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닌가? 처벌 같은 건 제쳐두고 그것만 생각하자고.”
이의민과 수하들은 투석기를 쓸 만한 평지가 있는지 찾았다. 하지만 평지가 있는 곳은 환원관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투석기의 사정거리가 닿지 않는 곳이었다.
우금이 한 가지 꾀를 냈다.
“주군 저 투석기의 뒤쪽에 바위 몇 개를 놓고 수평으로 만들면 아니 되겠습니까?”
역시 흑산적 토벌 때 화계를 낸 만큼 나름 머리도 굴릴 줄 아는 우금이다. 하지만 막상 우금의 생각대로 되지는 못했다.
바위를 최대한 고정시킨다고 했지만, 군사들이 투석기 줄을 잡아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위가 경사에 떠내려갔다. 바위를 다른 걸 구해서 다시 시도해봤지만 마찬가지다.
특히 고정해놓은 바위가 굴러 내려가며 줄을 당기려는 군사들까지 위험하게 만들었으니 더 시도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이걸로도 아니 되는군.”
“면목 없습니다.”
유엽도 우금도 방법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이의민이 의견을 냈다.
“그럼 군사들이 투석기를 떠받치고 있는 건 어떻겠나?”
하지만 유엽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왜? 솔직하게 말해봐. 내 의견이 좋은지 나쁜지.”
“이 정도 투석기를 군사들이 떠받치고 있으려면 제법 많은 군사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줄을 당길 군사들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물론 투석기의 설계를 변경하여 그에 맞게 만들면 좋겠지만, 여기서 당장 그 정도의 정교한 투석기를 만드는 건 불가능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한계라고 밖에....”
아쉽다는 표정으로 설명하는 유엽의 말을 듣고 평소에 잘 하지 않던 고민이란 걸 하는 이의민.
“으음.... 공간이 없다.... 일단 해봐!”
결국 이의민의 의견대로 군사들이 투석기 뒤쪽을 들어 수평으로 맞추었다. 투석기가 전혀 움직이지 않게 무게를 완전히 감당해야 하므로 제법 많은 수의 군사들이 들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니 유엽의 말처럼 확실히 줄을 잡아당길 군사가 설 공간이 없었다. 기껏해야 서너 명 정도만 설 자리가 있을 뿐이었다. 원래는 총 오십 명의 군사가 동시에 줄을 잡아당겨야 투석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됐는데, 고작 서너 명만 줄을 잡는다면 당연히 투석이 불가능하다.
모두 포기하려고 할 때 갑자기 이의민이 나섰다.
“그럼 이걸 당기면 된다는 거지?”
이의민 혼자 투석기의 줄을 자신의 팔에 감은 후 잡아당기고 있었다. 유엽은 대경하여 이의민을 말렸다.
“주, 주군! 이건 오십 명이 동시에 잡아당겨야 합니다. 사람이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일단 되는지 아니 되는지 한번 해보자고.”
“그래도....”
다른 군사들 역시 반신반의 하는 눈빛으로 이의민을 보고 있었다. 소나 말도 사람 오십 명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무리 이의민이라도 어찌 그와 같은 힘을 낸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상대가 이의민이라 혹시나 하며 기대 중이었다.
결국 다른 군사들은 투석기를 떠받치는 가운데 이의민 혼자서만 줄을 잡아 당겼다. 우금이나 다른 장수들도 돕겠다고 나섰지만, 이의민은 손사래를 쳤다.
“괜히 거치적거리지 말고 나와.”
“예....”
발사대에 돌덩이를 매달고 이의민이 줄을 잡아당겼다. 하나만 잡으면 끊어지니 한꺼번에 열 개에 가까운 줄을 온몸에 맸다. 평범한 군사라면 잡아당기지도 못할 힘이 전해졌다. 하지만 이의민은 아무렇지 않게 줄을 맨 채로 당겼다.
하지만 투석하려면 이정도로 잡아당겨서는 턱도 없었다. 이의민은 줄을 맨 채로 한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줄이 점점 팽팽해졌다. 점점 당겨지는 힘이 강해지고 있어도 이의민의 발걸음은 멈춤이 없었다. 마치 소가 우직하게 밭을 가는 것 같다.
“어....? 어?! 된다! 괜찮으십니까? 주군?”
“난 괜찮다. 이 정도 당기면 되나?”
“아, 아직 조금 더 당겨야 합니다.”
이의민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지만 아직까지 여유가 있는듯하다. 다시 우직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줄은 더 팽팽해졌다. 이제는 이의민의 이마에 힘줄이 보였다. 서서히 한계가 오는 것 같았다.
“아직도 멀었나?”
“조금만 더 하시면....”
비 오듯 땀을 흘리면서도 한발자국 더 가는 이의민. 결국 투석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줄을 당겼다.
“지금은?!”
“주군! 됐습니다!”
유엽의 외침과 동시에 이의민은 감고 있던 줄을 놓았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줄들이 일제히 수축했고, 그 반작용의 힘으로 거대한 돌덩이가 환원관을 향해 날아갔다.
콰콰쾅!!
돌덩이는 정확히 환원관 관문을 박살냈다. 오십 명이 해야 할 것을 혼자 해낸 이의민이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관문이 박살나지는 않았다.
“아니 되겠군. 한번 더 해야겠어.”
“괜찮으십니까?”
“뭐하냐? 바위 많잖아. 어서 준비해!”
이의민은 또 다시 줄을 잡아당겼다. 온힘을 다 쓴 것 같더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서너 번 투석을 했을까 결국 관문이 완전히 박살났다.
이의민군의 투석기를 보며 한껏 비웃고 있던 유표군은 그야말로 난리법석이었다.
“저, 저게 어찌 되는 것이냐?!”
“주군! 어찌 할까....”
장수 하나가 성벽 위에서 외치다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곤죽이 됐다.
유표는 그걸 보고 정신이 나갈 지경이다. 괴월이 겨우 다가와서 외쳤다.
“주군! 환원관을 버리고 후퇴하셔야합니다!”
“그, 그래야겠구나....”
환원관에서 일제히 도망치는 유표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