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형주군 (2)
우금은 잡아온 적장을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이미 어느 정도 부상을 당해 있던 적장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나뒹굴었다.
우금은 눈썹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네놈의 이름은 무엇이냐?”
“.....”
그래도 유표군 장수는 마지막 자존심은 남아있는지 우금의 질문에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관해가 시기적절하게 나섰다.
“이런 많이 다쳤나보군. 아픈 자를 이리 대하면 되겠소? 우금 장군?
“그럼 어찌해야 하오?”
“편안하게 안식할 수 있도록 보내줘야지. 자! 이제 너는 편안해질 것이다. 극락에 갈지 지옥에 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뒤진 이후의 일이니 난 모르겠고.”
관해는 아무렇지 않게 커다란 도 하나를 가져와 유표군 장수의 목에 겨눴다. 정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고, 관해 역시 일반적인 장수라기보다는 마치 망나니 같은 모습이었기에 그대로 목을 벨 것 같았다.
유표군 장수는 그래도 자신이 장수인데 쉽게 죽일 거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배짱을 부려본 것인데 상대가 아무 망설임 없이 자신을 죽이려 하니, 결국 아무것도 불지 않고 입을 다물려고 했던 그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자, 장윤이다! 내 이름은 장윤이라고!”
“으흠! 아직도 상황파악 못 하고 반말? 정신이 아직도 오락가락 하는 것 같으니 그냥 목을....”
“소, 소장은 장윤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말하겠습니다.”
결국 관해 앞에서 고분고분해지는 장윤이다.
이제 우금의 차례였다.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걸 너희들은 대체 어찌 알았더냐?”
“난 아는 것이 없소. 채모 도독이 그저 가자고 해서 온 것이오.”
장윤이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니 관해가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음... 안타깝군. 기억이 돌아오지 아니 하는 걸 보아 여전히 머리가 아픈 모양이군. 내가 곧 편안하게....”
“저, 정말이오! 채모 도독이 낙양에서 온 서신 하나를 받더니 이곳을 포위하면 된다고 주군께 말했소. 난 정말 그것밖에는 모르오!”
“아! 진짜 말귀 못 알아듣네. 그래서 그 낙양에서 대체 누가 서신을 보낸 거냐고!”
“그건 채 도독과 주군, 그리고 군사인 괴씨 형제들만 알고 있소. 난 그 서신을 읽어보지도 못했소. 믿어주시오!”
장윤은 제발 살려달라며 애처롭게 부르짖었다. 이쯤 되면 거의 사실만을 말한 것 같았다.
그때 이의민이 돌아왔다.
“무슨 일인가? 이놈은 누구고?”
“이놈은 적장이었던 장윤이라는 놈입니다. 아무래도 유표군이 먼저 우리의 위치를 눈치 채고 포위를 한 것이 의심스러워서 심문을 했습니다. 우리가 숭산에 왔다는 것은 극비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들이 어찌 알고 먼저 포위를 한 것인지.... 소장의 생각으론 아마....”
우금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스스로 입 밖에 내기 힘든 말이리라. 결국 이의민이 대신 해주었다.
“내 사람 중에 간자가 있다는 말인가?”
“예....”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우금. 그는 이의민에게 보고를 하면서도 절대 이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정황상 매우 의심스러웠다.
군사들 사이에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여태껏 이런 적은 한번도 없지 않은가.
이의민의 눈썹도 꿈틀했다. 수하들 사이에 간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이의민의 가슴도 무겁게 했다. 전투에서 사방의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보다 훨씬 더한 심리적 압박이 다가왔다.
‘정말 내 수하들 중 그런 놈이 있단 말인가?’
잠시 눈을 감고 고민을 거듭하던 이의민. 곧 눈을 떴다.
고려시절에도 이의민은 권력의 정점까지 올라갔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이런 일이 수없이 많았다. 그리고 그 수많은 경험을 통해 배운 것도 많았다.
‘의심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확신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 드러내지 아니 하고 티를 내서도 아니 된다.’
생각을 마친 이의민은 손뼉을 치며 주위의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 다들 쓸데없는 생각하지마라. 모두들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최소한 여기 있는 이들 중 간자는 없다! 아니. 낙양에도 없다!”
이의민이 명쾌한 결론을 내리자 군사들의 표정도 풀렸다. 다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우금은 여전히 걸리는 것이 있었다. 조심스러운 투로 조언했다.
“주군.... 심정은 백번 이해하고 저 역시 그리 생각하는 것이 편합니다. 하지만 이건 감정만으로 해결 할 문제가 아닙니다.”
“나도 잘 알지. 당연히 이 일을 얼렁뚱땅 처리할 생각은 없다. 이 문제는 돌아가서 공달과 상의할 것이다. 내가 하고자하는 말은 확실한 증좌가 나오기 전까지는 서로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의민은 확고한 대답에 우금은 스스로가 살짝 부끄러워졌다. 이의민이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면서 대충 넘어가려는 줄 알았다. 오랫동안 이의민을 봐왔다고 생각했는데 성급한 판단이었다.
“죄송합니다. 주군. 소장이 너무 주제넘었습니다.”
“아니야. 자네가 지금 이러는 것도 전부 나와 우리 군을 위해서가 아닌가. 자네 같은 인물도 하나쯤 있어야지.”
우금까지 다독이는 이의민. 결국 대부분의 군사들은 안심하고 안정을 되찾았고, 의견을 거부당한 우금도 감동을 받은 모습이다.
유엽은 그런 이의민군을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봤다.
‘당연히 피바람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간의 불신이 감돌아 큰 혼란이 있을 줄 알았는데....’
유엽이 여태껏 경험한 대부분의 제후들은 다 비슷했다. 강력한 힘이 있는 제후 밑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끼리 수많은 파벌 다툼이 있었다. 거기서 서로 간의 불신이 싹트고 분열이 일어나, 결국에는 제후 세력을 크게 약화시키거나 심하게는 파멸까지 이르게 했다.
그런데 지금 이의민과 그 수하들은 그런 게 없었다. 비단 우금의 경우만이 아니었다.
고순이 탈진한 상태로 합류하자 내부의 첩자를 의심하던 우금은 누구보다 먼저 그의 안위를 살폈다. 관해 역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약초를 구해 와서 고순에게 먹였다. 고순은 그런 우금과 관해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면서 둘의 공을 치켜세웠다.
‘군주와 수하들뿐만 아니라 장수들끼리도 이 정도의 끈끈함이라....’
친한 장수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알게 모르게 서로가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의 공이 높다고 치켜세우고 시시껄렁한 농담도 주고받는 것이 모두가 친한 죽마고우 같았다. 이정도 규모의 군대에서 나오기 힘든 모습이었다.
절대 이길 수 없던 싸움을 이긴 것도 그렇고 어느새 유엽은 이의민에 푹 빠져버렸다.
‘사람들을 이리 포용하고 융합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군주의 재량이다. 이것이 내가 진정으로 찾던 군주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의민은 계속해서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유엽을 보며 물었다.
“흐흐! 어이! 나그네. 아니. 자양. 뭘 그리 웃는가?”
“부러워서 말입니다. 대사농 정도의 세력이라면 시기와 암투가 없을 수가 없는데, 그런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아니 하니 참으로 신기할 따름입니다.”
“시기와 암투? 그런 것은 못난 놈들이나 하는 것이다. 그런 놈은 내 밑에 있을 자격도 없지.”
“하하하하! 실로 통쾌한 대답이십니다. 대사농.”
“왜? 자네도 합류하고 싶은가?”
속마음을 대놓고 드러낸 대화가 시원시원하게 이어졌다. 역시 이의민에게는 간을 본다던지 하는 행위가 필요 없었다.
“훗! 제게 그런 영광을 주실 겁니까?”
“아까 한 눈에 지형을 파악하고 적절한 조언을 해준 것은 멋졌다. 자네 같은 인재가 내 밑에 들어온다면 언제든지 환영이지.”
“알겠습니다. 저 유엽, 이제부터는 대사농의 손과 발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유엽까지 이의민의 수하가 됐다. 삼국지에서 조조의 수하였던 이들을 정말 알차게 뜯어가는 이의민이다.
유엽은 이의민의 수하가 되자마자 그의 군을 위해 일할 준비를 했다.
“대사농, 아니. 주군. 이제 유표가 있는 환원관으로 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애초에 여기까지 온 이유가 그 놈들 막기 위해서다. 공달은 그냥 대충 피해만 입히면 알아서 물러갈 거라 했는데 난 그 정도로는 만족을 못하지.”
“알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군사로서 주군을 보좌하겠습니다.”
**
환원관에 있던 유표는 형편없이 패하고 돌아온 채모를 보며 노발대발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채 도독. 자신 있다고 호언장담 했잖은가? 자네를 믿고 3만 군사를 줬는데, 절반만 살려서 돌아오다니!”
불같이 화를 내는 유표 앞에 채모는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면목 없습니다....”
그래도 유표는 채모를 아예 내치지는 못했다. 살짝 누그러진 투로 다시 묻는 유표.
“대체 어찌 하여 이리 형편없이 패했는가? 자초지종을 말해보게. 설마 그 서신이 함정이었던가?”
“아닙니다. 그 서신의 내용대로 이의민군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럼 대체 왜 졌다는 말인가?”
“그것이....”
망설이던 채모는 결국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의민이 혼자서 우리군의 포위망을 뚫고 있으니, 그를 막을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정말 괴랄 한 신력이었습니다. 혼자 거의 우리 군사 일만 정도를 상대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그걸 믿으란 말이냐?”
“소장도 처음에는 못 믿었는데, 눈으로 직접 보니 믿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괴월 군사도 봤잖소.”
“예. 저도 봤습니다. 이의민은 정말 소문대로, 아니. 그 이상의 신력을 보유한 자였습니다.”
여태껏 이의민을 상대했던 대부분이 그리 생각했던 것처럼 유표 역시 이의민의 힘을 과소평가했다. 전부 과장된 소문이라 폄하했었다. 하지만 그 소문들이 오히려 축소됐다는 말에 기가 막힐 수밖에 없다.
“그럼 이제 그놈을 어찌 상대해야 된다는 말인가? 이대로 낙양으로 다시 돌아가면 좋을 텐데....”
괴월은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승기를 제대로 잡았는데,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아니 할 것입니다. 아마 끝장을 보려고 하겠지요.”
“그럼 우리는 이대로 다시 형주로 퇴각을 해야 되겠는가?”
이번에도 고개를 젓는 괴월.
“그럼 주군께서 잃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군사를 잃은 것도 크지만 무엇보다 황실의 신뢰 역시 완전히 끊어집니다. 다행히 이 곳 환원관은 산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방어에 유리합니다. 성이 아닌 관문이라 작긴 하지만 적군의 숫자가 적으니 포위도 걱정 없습니다. 일단 환원관을 끼고 방어를 하면 아무리 이의민이라도 충분히 발목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것만 해도 황실은 주군의 공을 잊지 아니할 겁니다.”
“괴월의 말대로 하지.”
환원관에서 버티는 걸 택한 유표. 이 결정이 차후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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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괴월의 예상대로 이의민은 환원관까지 치고 들어왔다. 하지만 환원관 앞에서는 멈출 수밖에 없다. 환원관은 성벽 자체가 높지는 않지만 높은 산 지형에 위치해 있다 보니, 접근하려면 많은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어쨌거나 현재 별동대의 병력은 유표군보다 명백히 적었다. 병력이 오히려 적은 쪽이 공성을 해야 되는 입장이니 부담스러웠다.
“흠... 이대로 공성을 한다면 우리 군사들의 피해가 크겠지?”
이의민의 질문에 유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곳 지형으로 보나 병력으로 보나 공성은 힘들 것입니다. 일반적인 야전과는 달리 주군의 무력도 여기서는 극대화 될 수 없지요. 그렇다고 여기서 시간이 끌리는 것도 좋지는 않습니다.”
유엽의 말대로 이곳에서 시간이 끌리면 차후 연합의 다른 제후들이 합류할 시간을 주는 셈이었다. 보급과 관련된 부분 역시 이의민군에게는 불리한 요소다.
이의민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계속 환원관을 바라봤다. 서로 땅 위에서 동등한 조건으로 전투를 펼치고 싶은데, 유표군은 자신들의 병력이 더 많으면서도 수성을 고집하고 있다. 물론 그게 이의민 상대로는 현명한 판단이다.
“자양. 방법이 없겠는가?”
이의민은 유엽에게 물으면서도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상황 자체가 뭔가 해볼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다. 순유나 곽가 역시 별다른 뾰족한 수를 생각해내지 못할 터였다.
“주군. 잠시만 기다려보시겠습니까?”
유엽은 환원관은 보지도 않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어느 정도 관찰을 하던 유엽이 입을 열었다.
“풍부한 나무와 바위들.... 이거라면.... 주군.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