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형주군 (1)
이의민이 잠깐 동안 날뛴 덕에 무려 삼천에 달하는 유표군이 쓰러졌다. 그 뒤를 따라서 고순, 우금, 관해가 군사들을 이끌고 왔다.
“주군께서 앞서 가셨다. 우리도 늦지 않게 뒤를 따라야 한다!”
파죽지세로 산을 내려가며 아래쪽에 있는 유표군을 무너뜨렸다.
현재 이곳에 있는 유표군의 최고 지휘관인 채모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그나마 군사(軍師)인 괴월이 군사들을 수습했다.
“정신 차려라! 여전히 우리가 수가 더 많다! 침착하게 진영을 유지하며 최대한 수적 우위를 이용하라!”
괴월의 외침대로 정신만 제대로 차리면 밀릴 만한 병력 차이가 아니었다.
괴월은 이의민군이 내려오는 형태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눈을 빛냈다.
“채화 장군. 군사들을 이끌고 옆길을 돌아 올라가 적들의 뒤를 치시오. 그럼 적들은 아주 어려운 형국에 빠질 거요.”
순식간에 적 진영의 약점을 파악하는 괴월. 그래도 유표군 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참모답게 전략, 전술을 짜는 머리가 비상했다.
채모의 동생인 채화는 자신에게 지시를 내리는 괴월을 못마땅했지만, 어려울 때 그의 말을 들으면 만사가 편해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아! 나도 그리 하려고 생각했소!”
그래서 구시렁거리면서도 괴월의 말대로 군사들을 이끌고 이의민군의 옆쪽 산비탈을 타고 올라갔다.
“젠장! 뭐야?! 왜 이리 못 올라가는 것이냐?!”
그렇지만 그것 역시 쉽지는 않았다. 유엽이 앞서 설명한대로 이의민군이 내려오는 길목 외의 지형은 오르기가 어려운 절벽과 같은 지형이었다. 대부분의 유표군은 오르지 못하고 굴러 떨어졌다. 그래도 전부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유표군 중에서도 산을 제법 잘 타는 군사들이 있었고, 그들은 웬만한 군사들이 오르지 못하는 지형도 올라갔다. 그들은 전체 유표군의 숫자에 비해 극소수였지만, 애초에 워낙 압도적인 병력 차가 났던 터라, 그들만으로도 이의민군의 후방에 위협이 되는 숫자였다.
결국 채화는 꽤나 많은 군사들을 데리고 이의민군의 후방을 칠 수 있었다.
“기회다! 이제는 우리가 위에서 아래로 공격하는 형태다! 받은 만큼 되갚아주자!”
정신없이 선두에서 유표군을 썰고 있던 이의민도 후방의 이런 변고를 재빨리 눈치 챘다. 곽봉에게 시야를 직접 가르쳐줬듯이, 전장에서의 시야는 그 누구보다 넓은 이의민이다. 이 정도 전장의 변화는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음! 이대로 앞만 보고 가면 아니 되겠군. 고순!”
“옛! 주군!”
바로 고순을 부르는 이의민.
“후방에서 적들이 계속해서 우리 군사들을 기습하니 피해가 생기고 있다. 그러니 너는 지금 별동대 군사들 중 오천을 이끌고 후방을 맡아라.”
“명 받들겠습니다!”
고순은 결의에 찬 모습으로 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의민이 내린 명을 완수하겠다는 결의다.
“지금부터 오천 명은 나를 따른다! 너희들은 이제 나를 따라 어떻게든 후방의 적을 막는다! 하나라도 놓치며 목을 내놓을 각오를 하라!”
“예! 장군!!”
고순의 외침에 그를 따르는 군사들도 우렁차게 답했다.
여태껏 위에서 아래로 공격을 하던 이의민군이었다. 하지만 고순과 군사들은 역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적군을 공격을 해야 했다. 지형적으로 유리했던 부분이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고순과 그의 군사들은 전혀 망설임 없이 유표군에 맞섰다.
유표군 병사 서너 명이 고순을 향해 한꺼번에 창을 찔러왔다. 고순은 창 하나로 그들의 창을 막고, 오히려 그들을 뒤로 넘어지게 했다. 이의민 만큼은 아니라도 대단한 신력이다.
또 다른 유표군 병사 하나가 고순의 등 뒤를 노리고 창을 찔러왔다. 그 병사의 눈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이 공격만 성공시키면 말단 병졸에 불과한 자신이 적장을 잡는 셈이었다. 잘하면 장수로 승진을 하거나 못해도 엄청난 포상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그 병사는 곧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고순을 바라보게 됐다. 고순은 마치 뒤에도 눈이 달린 듯 병사의 창을 잡아채버렸다. 창을 빼앗긴 그 병사는 곧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목이 떨어졌다.
이의민군 후방의 유표군을 이끌던 채화는 그런 고순을 보며 악다구니를 썼다.
“저, 저놈을 어서 죽여라! 어서 죽이란 말이다!”
후방 쪽의 유표군은 전방에 있던 유표군처럼 단 한 명의 장수에게만 몰렸다. 대신 여기는 이의민이 아니라 고순에게 몰린다는 차이가 있다.
분명 비슷한 그림이지만 그 속의 세세한 부분은 물론 달랐다. 이의민은 몰려드는 유표군을 아무렇지 않게 물리쳤지만, 고순은 제법 지친 듯 헉헉 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군데군데 상처도 제법 많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 기개만큼은 이의민에 뒤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유표군을 보면서도 고순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뭐, 뭐야? 저놈.... 사, 살아있네?”
그런 고순을 보는 채화의 표정이 질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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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선두에서 전방을 향해 계속 나아가던 이의민은 잠시 수하들에게 군사를 맡기고 휴식을 취했다. 이의민도 사람인 이상 지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엄청나게 많은 적을 쓰러뜨린 후라서 그런지 이의민에게 맞서려는 적군보다 도망치는 적군이 더 많았다.
“관해! 우금! 난 잠시 여기서 숨을 고르겠다. 너희들이 군사들을 이끌도록.”
“옛! 주군!”
이의민은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아 자신이 만든 지옥도를 잠시 감상했다. 정말 시체의 산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많은 시체가 쌓여 있었다. 대략 일만에 가까운 시체들이었는데, 거의 대부분 이의민이 만든 것이었다.
물론 이의민 혼자였다면 이 정도까지는 할 수 없었겠지만, 뒤에서 우금, 관해와 군사들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금과 관해는 전투를 하면서도 이의민이 존경스러웠다. 막상 선두에 나서서 이 많은 유표군을 상대해보니 이의민이 지금까지 얼마나 엄청난 전투를 하고 있었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자신들은 둘이다. 그리고 이의민이 이미 일만에 가까운 적군을 줄여 놨다. 그런데도 힘들었다.
물론 이 전투에서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유표군을 쓰러뜨리는 속도는 현저히 줄었다.
“주군께서는 그리 쉽게 적군을 쓰러뜨리셨는데....”
“하여간 본인 입으로는 신선임을 거부하시는데, 이게 신선이 아니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역시 주군은 신선이 맞아!”
그렇게 감탄하며 유표군을 상대하고 있는데, 잠잠하던 유표군도 다시 반격을 시작했다. 인간 같지 않은 이의민의 모습에 쫄아서 숨어있던 군사들이 다시 반격을 결심한 모양이다. 특히 유표군 장수들은 이의민만 아니라면 자신들이 질 수가 없다고 여기며 앞으로 나섰다.
“흥!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고 네놈들 꼴이 딱 그 꼴이구나! 이의민은 몰라도 네놈들 따위는 우리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유표군의 한 장수가 관해와 우금을 보고 비웃었다. 이에 가만히 있을 관해가 아니다.
“캬악! 퉤. 이 겁 대가리를 상실한 새끼.... 아니. 믿음이 없는 자여.... 네놈의 이름이 무엇이냐?”
“나는 형주의 명장 왕위라고 한다!”
“크하핫! 명장은 무슨! 새끼가 쫄아가지고 군사들 뒤에 숨어 벌벌 떨던 놈이 명장은 개뿔이 명장이냐? 뭐? 숭어? 망둥이? 이리와라! 이 관해님이 망둥이 맛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주마.”
왕위는 머리는 산발을 하고 어디 도적 우두머리 같이 생긴 관해가 우스워보였다. 우금은 몰라도 관해는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왕위는 자신감 있게 나섰다.
“그래! 네놈의 목을 베고 형주에도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
그랬던 왕위는 관해와 단 일합을 나누자마자 실수했다는 것을 느꼈다.
‘젠장! 무, 무슨 힘이....? 생긴 거는 꼭 우럭같이 생긴 놈이....!’
그리 생각할 시간도 길지 않았다. 연이어 관해의 무지막지한 공격이 이어졌다.
관해는 청주를 주름잡던 황건답게 본신의 무력은 결코 낮지 않았다. 이의민과 비교해서야 어린아이 수준이지만, 다른 웬만한 장수들과 비교하면 절대 밀리지 않았다. 거기다가 이의민의 구타, 아니. 특훈을 꾸준히 하면서 청주에 있을 때보다 무력이 더 높아진 상태였다.
자칭 형주의 명장인 왕위가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왕위는 정확히 10합 만에 목이 떨어졌다.
“관해. 혼자만 너무 재미 보는 거 아닌가? 이번에는 내 차례일세.”
“크크. 그러던지. 그럼 난 주군 옆에서 휴식을.... 아니. 천지신명께 기도를 좀 드려야겠군.”
관해와 자연스럽게 교대하는 우금. 왕위의 꼴을 본 유표군은 어느 누구 하나 쉽게 나서지 못했다.
‘이의민이 없으니 좀 상대할 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밑에 있는 놈들도 만만찮구나...’
전부 겁먹어서 나서지 못하는 유표군을 보며 우금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이놈들 참 재미없군. 좋다. 너희들이 오지 아니 하겠다면 내가 먼저 가주마.”
우금은 창을 곧추 세우고 유표군을 향해 들어갔다. 절대 관해보다 기세와 흉포함이 모자라지 않았다.
“이놈아! 계속 보고만 있을 것이냐?! 어떻게든 해보아라!”
채모는 자신이 나서지 않고 동생인 채중을 떠밀었다. 채중도 우물쭈물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우금 앞에 나섰다.
채중은 단 일합도 버티지 못하고 우금의 창에 꿰뚫렸다.
채모는 동생의 죽음을 슬퍼할 새도 없었다. 오히려 우금의 존재에 공포를 느끼며 복수심 따위는 저 멀리 던져버렸다.
“으악! 뭣들 하느냐?! 저놈을 어서 막아라!”
“채모 장군! 뭘 하시오! 그럴 거면 저리 비키시오!”
보다 못한 괴월이 다시 나섰다. 괴월은 이의민을 상대할 때 그랬던 것처럼 침착하게 군사들을 통솔하며 최선책을 찾았다.
“아래쪽에 둥글게 진을 치고 있어라! 내려오는 적들과 항상 다수 대 일로 싸울 수 있도록 한다!”
이의민에게는 별로 통하지 않았지만, 우금에게는 괴월의 책략이 통했다. 어느덧 안정적으로 싸우게 된 유표군이다. 이에 관해 역시 가담해보았지만, 상황이 바뀌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유표군의 병력적 우위가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때 한 사내가 벼락 같이 유표군 사이에 뛰어들었다.
“크아악!!”
“내가 없으니 다시 까부는 구나!”
이의민이었다. 그가 다시 전장에 참여하자마자 흐름은 또 순식간에 넘어갔다. 그만큼 이의민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컸다. 정말 일당백, 아니. 일당천, 일당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채모는 부들거리며 이의민에게 소리쳤다.
“대사농! 이건 말이 다르지 않소!”
“응? 말이 다르다니?”
“분명 아까 휴식을 취할 거라고 하지 아니 했소?”
“아! 그거? 다 쉬었다.”
“뭐요? 버, 벌써....?”
이의민이 쉰다고 한지 일다경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다 쉬었다고 하니 기가 막힌 채모다.
이의민이 허세를 부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의민은 처음과 다름없는 쌩쌩한 모습으로 유표군을 도륙 냈다.
괴월도 더 이상의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후퇴를 생각하고 만다.
“채모 장군. 어쩔 수 없소. 우리 측 장수도 없고 이대로 가다가는 수적 우위도 사라질 것이오. 주군이 있는 환원관으로 후퇴해야 하오.”
“하지만 괴월 군사.... 이게 말이 된단 말이오?”
“제가 봐도 믿기지 않지만 지금 이것이 현실인 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어서 결단을 내리시오. 우리 측 군사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소.”
이를 악문 채모도 결국 후퇴명령을 내렸다.
“전군! 환원관으로 후퇴한다!”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이의민군이 아니었다. 유표군을 한명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쫓고 또 쫓았다.
그런데 우금의 유표군을 쫓는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적을 섬멸하기보다는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우 장군? 어딜 가시오?”
관해의 질문에 우금은 계속 유표군을 노려보며 답했다.
“장수 하나를 붙잡아야 하오. 그에게 꼭 물어봐야 할 것이 있소.”
유표군은 장수들부터 도망쳐서인지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도 용케 한 명을 찾은 모양이다. 우금은 빠른 속도로 자신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우금은 피 떡이 된 장수 하나를 끌고 왔다.
한편 이의민은 추격에 합류하지 않고 후방으로 향했다. 고순에게 믿고 맡기긴 했지만,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후방으로 가 보니 위태롭게 서 있는 고순과 비슷한 모습으로 힘들어하는 군사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발밑에는 수많은 유표군이 쓰러져 있었다. 아직도 서 있는 유표군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의민이 나타나자마자 모두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