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71화 (71/175)

71. 산 속의 나그네 (2)

이의민은 계속해서 사내에게 관심을 가졌다. 원래 이의민은 글만 읽을 줄 알고 무예에 대해서는 모르는 선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삼국지 시대에 넘어온 이후부터는 오히려 선비들에게 더 관심이 갔다.

아무래도 순유나 곽가 같은 지략가들을 접하다보니 문사들에 대한 인상이 더 좋아지는 이의민이다.

“그래. 그대는 어찌하여 홀로 산을 오르게 되었는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낙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바보 같이 여기서 길을 잃었지 뭡니까.”

“큭큭큭. 아까 봐서 알겠다만 정말 간이 크군. 홀로 이 험한 길을 떠날 생각을 하다니. 잘못하여 맹수라도 만나면 어찌할 뻔했나?”

“그럼 그냥 죽는 거지 별 수 있겠습니까?”

“크크. 그냥 간이 큰 놈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미친놈인 것 같군.”

두서없는 대화를 나누는 이의민과 사내. 의외로 말이 잘 통했다. 평소 말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이의민이지만 이 사내와 나누는 대화는 의외로 재미있었다. 살짝 곽가와 대화를 하는 느낌도 났다.

그렇게 둘은 정신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경계병들이 놀라 소리쳤다.

“장군! 장군! 큰일입니다!”

“웬 호들갑이냐?”

“아무래도 적군이 우리 진지를 포위한 것 같습니다.”

“뭐라?!”

이의민과 장수들이 모두 진 밖으로 뛰쳐나갔다. 확인을 해보니 정말로 많은 군사들이 진이 위치한 곳보다 조금 아래에 위치한 산등성이에서 모이고 있었다. 숫자를 보니 진 전체를 다 포위하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병력이었다.

“대체 저놈들의 정체가 뭐지?”

날도 어둡고 산속이라 숲이 우거져 있어서 적군의 복장이나 깃발이 정확히 식별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니 지금 이 시간에 이곳에 있을 대군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유표군이다.

태평하게 농담을 하던 이의민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물론 겁을 먹거나 당황한 표정은 전혀 아니다.

“이것들이 우리가 이곳에 있는 줄 어찌 알고 온 것이지?”

이의민이 의문을 표하자 고순이 칼을 뽑더니 불청객의 목에 겨누었다.

“이놈! 네놈이 유표의 간자였구나!”

그런데 불청객의 태도는 여전히 태연했다. 처음 이곳에 온 이후부터 보였던 여유만만 한 모습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 모습에 고순은 화가 나기도 하고 기가 차기도 해서 불청객을 더 추궁했다.

“할 말 없느냐? 어디 변명이라도 해보아라.”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요?”

“당연히 믿을 수 없잖느냐? 이리 모든 상황이 절묘하게 딱딱 들어맞으니, 누가 봐도 네놈은 간자일 것이다.”

“그것 보시오. 이미 결과를 정해놨는데 입 아프게 말해서 무엇 하겠소. 죽일 거면 죽이시오.”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고순이 당황했다. 정말 그 사내의 목을 벨지 말지 우물쭈물 하고 있는데 이의민이 고순의 팔을 잡았다.

“됐다. 간자는 아닐 것이다. 그가 간자라면 우리 진채만 확인하고 가면 될 것을 굳이 얻어먹겠다고 들어올 필요는 없지.”

확실히 이의민의 말대로 그 사내는 진채에 들어와서 일부로 주목을 끄는 듯한 행동을 했다. 간자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고순도 이의민의 말을 알아듣고 칼을 거뒀지만 여전히 사내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가 온 이후에 유표군에게 포위를 당한 사실이 못내 의심되는 건 사실이다.

“주군. 하지만 저 정체도 모르는 놈을 이대로 우리군 진영에 둘 수는 없습니다. 저자의 정체를 밝히든 아니면 진채 밖으로 내쫓으시지요.”

쉬운 방법은 역시 내쫓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의민은 왠지 그 쉬운 방법을 택하기 싫었다.

“이봐. 어찌할 텐가? 순순히 정체를 밝히고 좀 더 머물 텐가? 아니면 이대로 쫓겨나서 맹수들의 밥이 될 텐가? 흠. 만약 그대가 후자를 택한다면 맹수들의 밥이 되기 전에 유표군에게 먼저 죽을 것 같군. 물론 그대가 유표군의 간자가 정말 아니라면 말이지.”

의문의 사내에게 선택권을 주는 이의민이다. 사내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전자를 택했다.

“소인은 자양이라는 자를 쓰는 유엽이라 합니다. 대사농.”

의문의 사내는 바로 유엽이었다. 원 삼국지에서는 조조를 따랐던 사람이었다.

이의민도 유엽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적이 없었다. 그런데 유엽은 이미 이의민을 알고 있었다.

“내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군.”

때문에 이의민은 처음으로 의심스럽다는 투로 얘기했다.

“죄송합니다. 말씀드릴 시기를 놓쳐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한데 소인은 정말 대사농께서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온 것은 아닙니다. 대사농을 만나러 온 것이긴 하지만 낙양에 있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대사농과 만났으니 소인도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럼 아까 굉장히 중요한 사람을 만날 거라고 한 게....?”

“그렇습니다. 그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 바로 대사농입니다.”

“나를 만나려는 이유가 뭐지?”

“사실 소인은 자경의 친구입니다. 자경이 대사농을 한 번 만나보라고 권했기에 찾아뵈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노숙의 친구라는 말에 이의민의 표정이 다시 펴졌다. 노숙과는 좋은 인연이 아닌가.

“오오... 노숙의 친구가 이런 산에서 노숙을 하고 있었군. 이런 우연이....? 기가 막힌 인연이군. 그런데 자경의 친구라면서 어찌 그와 같이 원술을 따르지 않고 나를 찾으러 온 것인가?”

“소인도 원술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으나, 따를 만한 인물이 아니라 판단했습니다. 자경도 추천하지 아니 하더군요.”

다시 유엽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이의민. 그와 얘기를 나누는 것이 적잖이 즐거운 모양이다.

그러던 와중에 군사들이 다시 보고를 해왔다.

“주군! 적군이 서서히 우리 진채 쪽으로 접근해오고 있습니다! 포위망을 좁히고 있습니다!”

포위망이 완성 됐으니 본격적인 공격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흐음! 골치 아프게 됐군. 적군은 대략 얼마 정도인가?”

“아직 정확히 파악되진 않았지만 못해도 우리 보다 두 배는 많아 보입니다.”

이의민이 군사들을 보고를 들으며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유엽이 나섰다.

“혹시 지금 군사(軍師)가 없으십니까? 그럼 소인이 대사농을 위해 조언을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유엽은 아직까지 이의민의 모사라고 볼 수 없었다. 당연히 고순이나 우금 등은 반발했다.

“처음 보는 이자의 무얼 믿고 참모 역할을 맡기겠습니까? 무시하시지요.”

하지만 뛰어난 모사의 조력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충분히 겪은 이의민은 흔쾌히 수락했다.

“어디 한 번 해봐.”

이의민이 수락을 하자마자 유엽은 일어나서 고개를 한 바퀴 돌려 주변 지형을 살폈다. 그리고는 한가지 조언을 했다.

“포위당하긴 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 진채가 있는 지형이 전투를 하기에 불리한 지형은 아닙니다. 사방이 길로 연결이 되어 있지만, 실제로 좌우측의 길은 가파른 낭떠러지길이라 사람이 오르는 건 불가능합니다. 즉, 산등성이의 앞과 뒤만 막으면 됩니다. 허나 역시 불리한 상황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병력이 너무 차이가 납니다.”

유엽은 어디를 막아야 최선일지 알려는 줬지만, 확실한 필승법은 말하지 못했다. 그만큼 이의민군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다.

“결국 어려운 싸움을 해야 한다는 얘기로군.”

이의민은 담담하게 대부를 들었다. 그 모습에 모든 군사들이 바짝 긴장했다. 낙양에서 승승장구 할 때까지만 해도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이의민은 그런 군사들을 향해 한차례 일갈했다.

“너희들은 나 이의민의 군사들이다! 그런데 어찌 그런 눈빛을 보이는가?! 잘 들어라! 앞뒤에 적이 있다고 무언가 바뀐 것 같은가? 천만에! 바뀐 건 아무 것도 없다! 어차피 싸워야 할 적이고 쓰러트려야 할 적이다! 오히려 이렇게 찾아와주니 고맙다고 해야 할 것 아닌가! 너희들은 평소에 했던 것처럼, 내 등만 보면서 앞으로 전진 하면 된다! 힘들 땐 내 등을 봐라! 나 금강야차 이의민은 언제나 너희들의 앞에 서 있을 것이다!”

이의민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군사들의 눈빛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승리밖에 모르던 군사들의 눈빛으로 말이다.

“금강야차! 이의민! 금강야차! 이의민!”

모든 군사들이 금강야차를 부르짖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군사들의 함성소리를 음미한 이의민. 역시 야차라는 스스로의 별명의 너무 듣기 좋았다.

이의민이 선두로 나섰다. 거대한 대부를 들고 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뛰쳐나간 후 정확히 유엽이 가리켰던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유표군이 막 올라오고 있었다. 그 사이로 몸을 던지는 이의민. 진채에 있던 별동대 군사들도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고순이 지금껏 자신이 내본 가장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전군! 돌격!! 주군을 따르자! 주군의 뒤만 따르면 승리가 기다리고 있다!”

유엽은 이의민과 별동대 군사들의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전율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의문이 생겼다. 아무리 봐도 불리한 전투였다. 과연 이의민이 어떤 방식으로 이 불리함을 극복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도 됐다.

**

현재 이의민군 별동대를 포위하고 있는 유표군을 이끄는 대장은 채모였다.

“크큭. 그 서신이 사실이었군. 이의민이 여기 있을 거라더니....”

채모는 이의민이 있는 산등성이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개미새끼 한마리 빠져나갈 틈 없이 완벽히 포위망을 구축했다. 이제 이의민과 그 별동대 병력을 섬멸하기만 하면 되는 셈이다.

채모는 이의민이 너무 쉽게 느껴졌다. 이리도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아직 이의민군과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지도 않았건만 이미 이겼다고 생각하는 채모.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이 공격이 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병력도 거의 두 배 이상 차이가 나고 있었다. 물론 지형 상 밑에서 위로 공격하는 것이라 약간의 불리함을 안고 있지만 이 정도 병력 차라면 의미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이의민이라는 또 다른 변수가 있지만, 채모는 그를 실제로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신력이 조금 센 장수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리 강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 정도 전력 차이를 극복할 자가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다. 한명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쪽수에는 장사가 없다는 속담을 굳게 믿고 있었다.

“크크크. 이거 김이 샐 정도인 걸. 이리 쉽다니. 맹덕은 고작 이런 놈에게 패망했단 말인가? 한심하긴....”

채모는 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전군에 진격 명령을 내렸다. 마침 이의민군도 반격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진채에서 큰 함성 소리가 아래에 까지 들렸다.

“뭐? 금강야차? 흐하하! 그 무슨 유치한 별명인가? 쳐라! 이의민의 목을 내게 가져와라!”

산등성이를 돌진하는 군사들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채모는 이미 승자가 된 기분이다.

금강야차라는 별명을 한껏 비웃는 채모. 그런데 채모의 미소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굳었다. 그리고 자신이 비웃었던 금강야차의 실체를 곧 확인할 수 있었다.

“뭐, 뭐야?! 어찌 계속 우리 군사들만 쓰러지고 있는가....?”

산비탈에 시체들이 계속 떠내려 왔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전부 유표군의 시체였다. 이의민군의 시체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아직도 이의민은커녕 적군 하나도 못 잡았단 말이냐?! 이 한심한 놈들!”

처음에는 자신의 군사를 탓했다. 그런데 점점 내려오는 이의민을 확인해보니 군사들을 탓할 게 아니었다.

대부를 들고 이리 번쩍, 저리 번쩍 하는 이의민. 대부를 휘두르는 그 자리에는 피가 사방으로 튀는 것이 정말 야차가 따로 없었다.

채모는 군사들에게 명을 내릴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이의민의 활약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자신이 저기 있다면 일반 병사들과 달리 조금 더 버틸 수 있을지 가늠해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장수인 자신 역시 처지가 다를 것 같지 않았다.

“저, 저놈은 진정 괴물... 아니. 야차란 말인가? 이게 말이 되는가....?”

채모는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