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산 속의 나그네 (1)
낙양의 내성 성벽 하나를 두고 황군과 이의민군은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막으려는 황군과 뚫으려는 이의민군의 모습은 마치 폭풍전야를 연상시켰다.
그래도 이의민은 바로 공성을 명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의 전투로 군사들이 적잖이 지쳤다. 그리고 황궁을 감싸고 있는 내성은 결코 쉽게 뚫을 수 있는 성벽이 아니다.
그래서 이의민은 군사들에게 휴식을 주고 자신 역시 적당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물론 이의민에게 있어 휴식은 다른 이들의 눈에 휴식으로 보이지 않는다.
“크악! 주군! 왜 저만 때리십니까?!”
관해는 이의민 앞에서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네놈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신선노릇을 하고 있으니 그렇지. 그리고 맞는 것이 그리 억울하면 제대로 막아보던지, 아니면 반격이라도 좀 해봐. 나도 너무 일방적이니까 재미가 없잖아.”
이의민은 관해와 고순, 우금을 데리고 삼대일로 대련을 하는 중이다. 무려 삼대일이지만 이의민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관해와 고순, 우금이 주군이라고 봐주는 것일까? 천만에. 그 셋은 온몸에 땀에 젖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지만, 이의민에게 제대로 된 일격 하나 먹이지 못했다.
그만큼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는 이의민이다.
이의민은 도저히 성에 차지 않는다는 투로 장료를 불렀다.
“에이! 삼대일도 조금 시시한 것 같구먼. 문원. 자네도 합류하지. 사대일은 되어야 조금 재미가 있을 것 같군.”
장료도 그렇고 여기 있는 대부분의 무장들이 나름 스스로의 무예에 자부심이 있었다. 이의민의 말은 이들의 자존심을 박살낼 발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이의민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무력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료는 이의민과의 대련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
“주군. 조금 이따 순 군사께서 오실 겁니다. 또 순 군사께 한 소리를 듣고 싶으십니까?”
“뭐? 공달이 온다고? 슬슬 그만해야겠군. 공달이 요즘 잔소리가 심해져서....”
이의민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대련을 멈췄다. 특히 심하게 얻어맞은 관해는 살았다는 표정이었는데, 고순과 우금은 오히려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이의민과의 대련을 하면 할수록 실력이 늘었기에 그들은 조금 얻어맞는 한이 있더라도 좀 더 하고 싶었다.
얼마 후 순유가 허겁지겁 이의민을 찾아왔다.
“주군! 큰일입니다. 원상 형으로부터 급보가 왔습니다.”
“이제 조조도 죽기 직전이라고 하지 않았나? 큰일이 날 게 있는가?”
“예. 대장군과 황군 쪽은 별다른 큰일이 없습니다. 문제는 유표입니다.”
“유표?”
유표는 반 이의민 연합에 가담한 제후들 중 하나였다. 특히 그는 하진과 일전에 따로 맹약을 맺으며 이번 연합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순유와 곽가도 유표가 연합에 참여하지 않을 방법은 딱히 찾지 못했다. 공작을 하려고 해도 하북처럼 건덕지가 딱히 없었다.
결국 유표의 연합 합류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그를 비롯한 다른 연합이 모이기 전에 먼저 낙양을 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유표가 예상보다 좀 더 빨리 낙양으로 오는 모양이다.
“예. 주군. 유표가 군사들을 이끌고 벌써 숭산 쪽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나흘 뒤 즈음에는 낙양 외성 앞에 도착할 것이고, 그리 되면 우리는 앞뒤로 적을 두게 됩니다.”
“흠! 그리되면 아니 되지. 유표군의 병력은 어느 정도 되는가?”
“원상 형의 보고대로라면 대략 5만 정도라고 합니다.”
유표가 만약 낙양에 도착한다면 이의민군은 곤란에 빠질 수 있었다. 여태껏 황군을 내성 안에 고립시켰던 이의민군이지만, 유표군이 오게 되면 오히려 이의민군이 낙양 외성 쪽에 고립되는 꼴이었다.
“그럼 이대로는 아니 되겠군. 놈들이 낙양에 도착하기 전에 손을 써야겠어.”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순유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허나 주군. 먼저 유표군을 요격하는 것도 지금 상황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만약 유표군 5만을 요격하기 위해 그와 비슷한 숫자의 군사를 뺀다면, 현재 내성 안에 있는 황군이 그걸 노리고 나올 수도 있습니다.”
순유의 말이 그럴 듯했다. 하지만 순유가 한 가지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유표군을 요격하는 군사들의 숫자를 최소한의 병력으로 간다면 어떤가? 대략 만 오천 정도 말이야.”
이번에도 순유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만 오천으로 5만 병력을 상대한다? 더군다나 성벽을 끼고 수성하는 것도 아니고 요격을 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확실히 만 오천이라면 황군들도 함부로 내성 밖으로 나올 만한 숫자는 아니긴 합니다. 허나 그 방법 역시 아니 되는 말씀이십니다. 고작 만 오천의 군사들로 어찌 5만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괜히 각개격파 되기만 할 뿐입니다.”
“그 만 오천을 내가 이끌어도 말인가?”
이의민의 질문에 순유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 만 오천에 이의민이 포함된다면 완전히 얘기가 달라지긴 했다.
이의민은 일인군단이나 마찬가지다. 유표군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막대한 피해는 입힐 수 있을 거 같았다.
‘아니지.... 주군이시라면 어쩌면 만 오천으로 오만을 막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순유는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이의민의 말에 순순히 수긍을 해버리면 주군에게 위험한 일을 떠맡기는 셈이었다.
“주군. 솔직히 말씀드리면....”
“알아. 공달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두 다 날 걱정해서 하는 말이겠지. 허나 여태껏 날 그리 보고도 모르겠나? 나 이의민이야. 이의민.”
순유는 호언장담하는 이의민을 보면서도 대답을 못했다. 이의민이 대단하다는 건 잘 알지만 기본적으로 만 오천 대 오만의 전쟁터는 사지나 마찬가지다.
그때 곽가가 기어들었다.
“공달형. 주군의 말씀대로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소. 공달형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도 잘 아오. 허나 공달형이 여길 맡고 내가 주군의 곁을 지킨다면 큰 문제는 없지 않겠소?”
곽가까지 나서니 순유도 드디어 마음을 바꿨다.
“알겠습니다. 주군. 그리 하시지요.”
순유가 보기에도 만 오천으로 유표군의 진격을 막고 나머지 군사들이 내성의 황군과 계속 대치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차피 반 이의민 연합의 결성된 이후부터 이의민에게 불리한 전쟁이었다. 아무리 공작을 통해 연합의 참여 제후를 줄이고, 합류 시점을 늦춘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유리한 상황보다 불리한 상황이 많을 수밖에 없다.
결국 이 불리한 점을 이의민과 그 수하들의 능력으로 보완해야 했다. 그리고 가장 큰 보완책이 바로 이의민이다.
“결정됐군. 그럼 봉효가 날 따라오면 되겠군. 그리고 부장으로는 고순, 우금, 관해를 데리고 가겠다.”
지금까지 계속 대련을 해왔던 세 장수를 콕 집어 데려가는 이의민. 그 중 관해의 표정은 울상이었지만, 고순, 우금은 환한 표정으로 답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이의민과 만 오천 별동대는 즉시 낙양성을 벗어나 숭산으로 올라갔다. 특히 몸이 날랜 자들로 구성된 군사들이라 산을 오르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물론 그래봤자 이의민을 따라잡을 이들은 아무도 없지만 말이다.
이의민은 숭산의 중턱 즈음에 자리를 잡고 군사들에게 진을 치게 했다.
“이쯤에서 진을 쳐라! 여기서 유표군을 기다릴 것이다!”
이의민의 명에 따라 군사들은 숙달된 솜씨로 막사를 세우고 나무 몇 그루를 연결하여 고정시킨 임시 벽을 만들었다. 모두 곽봉에게 제대로 배운 솜씨다.
이제는 장수들이 별다른 지휘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진을 치는 이의민군. 이의민은 그런 군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한쪽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큰일 났습니다. 곽 부군사께서....”
이의민은 보고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바로 곽가에게 달려갔다. 가서 보니 곽가가 매우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얼굴은 시뻘겋고 연신 기침을 하고 있었다.
“쿨럭! 쿨럭! 죄, 죄송합니다! 쿨럭! 주군....”
“갑자기 무슨 일인가? 낙양에 있을 때만 해도 멀쩡하지 않았는가? 의원은 없는가?!”
낙양에 있는 본대에는 군 의원이 있지만, 지금 이 별동대에는 없었다. 그래서 더 속이 탔다.
“쿨럭! 제가 사실 몸이 그리 좋은 편이... 쿨럭! 아닙니다....”
곽가는 약골에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원래 삼국지에서도 결국 단명을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낙양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 이전, 청주를 나설 때부터 몸에 부담이 축적되고 있었다. 청주를 나선 이후 조금의 휴식도 없이 낙양까지 쉴 새 없이 달려 온데다가 지금 산까지 타고 있으니 곽가의 몸이 버틸 수 있는 한계치는 진즉에 넘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주군 곁을 지킬 터이니.... 쿨럭!”
“됐다. 봉효. 자기 몸도 못 가누면서 누굴 지키겠다고.... 그냥 본대로 가서 의원에게 치료를 받아.”
“그럴 수는.... 쿨럭! 없습니다....”
“어허! 이건 명이다. 호위군사 몇을 딸려 보낼 테니 지금 당장 하산하라.”
“주군.... 그리되면 주군 곁에 군사(軍師)가 없습니다.”
“걱정마라. 어차피 내게 처음부터 자네나 공달과 같은 군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넌 잘 모르겠지만 백파적이랑 싸울 때도 나랑 곽봉형 둘 뿐이었어.”
하지만 곽가는 여전히 걱정스러웠다. 전장은 변수가 많다. 변수들을 분석하고 통제할 수 있는 군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형주의 거인이라 불리는 유표는 백파적과는 질이 다른 적이 아닌가.
하지만 이의민의 다음 얘기에 곽가는 마음을 바꿨다.
“지금 네 상태로는 내게 짐만 될 뿐이다. 무얼 걱정하는지는 알지만 그게 지나치면 날 얕보는 것이지. 그리고 네 스스로 최대한 건강을 챙기는 것이 내게 충성하는 것이다. 명심하도록.”
퉁명스러운 어투에 약간 무뚝뚝한 단어 선택이었지만, 곽가는 그 속에서 이의민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 것인지 똑똑히 느꼈다.
“주, 주군.... 크흡!”
“사내자식이 어디서 눈물을! 꼴사나운 모습 보이지 말고 어서 내려가!”
“옛! 주군! 큽!”
결국 몇몇 군사의 호위를 받으며 낙양으로 돌아가는 곽가다.
물론 돌아가면서도 다른 군사들에게 당부를 하며 이의민을 마지막까지 챙겼다.
“쿨럭! 원상형의 정보에 따르면 유표군은 지금쯤 환원관에 있을 것이다. 쿨럭! 굳이 관을 뺏을 필요는 없으니 기다렸다가 그들이 관을 나오면 치라.”
“알았으니까 빨리 가라고! 임마!”
겨우겨우 곽가를 보내고 이제야 마음 편하게 모닥불을 쬐는 이의민. 그리 쉬고 있는데 숲 한쪽에서 부스럭 거리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장수들은 일제히 무기를 빼들고 소리가 난 쪽으로 뛰어갔다. 유표군의 척후병일 가능성도 있으니 상대를 무조건 잡겠다는 기세다.
얼마 후 장수들은 한 사내를 잡아왔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척후병은 아닌 것 같았다. 복장이나 차림을 보면 군인이라기보다는 그냥 남루한 서생 같아 보였다.
만약 그자가 척후병 따위가 아니라 복장 그대로 일개 서생이라면, 그의 입장에서도 황당한 일이다. 산을 넘고 있는데 갑자기 군대를 만나고, 그 군사들에게 붙잡혀 왔으니 말이다.
그런 황당한 상황 속에서도 그 사내의 표정이 묘하게 침착해보였다. 이의민은 그런 사내를 보며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네놈은 누구냐?”
사내는 이의민을 보면서도 여전히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읍을 하며 답했다.
“산속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이 불쌍한 소생에게 먹을 거나 좀 나눠주시겠습니까?”
민가에 들려 동냥이라도 하는 듯 태연했다. 그 모습에 우금이 기가 차다는 듯 나섰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죽고 싶은 게냐?”
우금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도 사내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설마 이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시는 분이 저 같은 서생 하나에게 나눠줄 밥이 아까우신 겁니까?”
이의민은 피식 웃었다. 간이 배 밖으로라도 나온 듯한 상대는 언제든 흥미로웠다.
“그래. 산 속 나그네는 다 친구란 말이 있지. 이 자에게 밥과 술을 내주어라.”
화끈한 이의민의 반응에 사내는 오히려 신기한 듯 이의민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의민과 같이 피식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한다.
“후훗! 산 속의 나그네는 다 친구라. 멋진 말입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