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연합의 향방 (1)
모든 황군이 일제히 내성으로 후퇴했다. 그들로서는 더 이상 버틸 수도 없었다. 이의민을 막기 힘든 것도 있지만, 설사 그가 없더라도 나머지 서황, 장료 등의 장수들도 막지 못하고, 잔뜩 사기가 충천되어 쳐들어오는 이의민군 역시 막지 못했다.
그래도 황군은 주준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후퇴한 결과 상당수의 병력을 보존하여 내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의민군의 진격도 내성 성벽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됐다! 여기서 멈춰라!”
이의민은 내친 김에 그대로 공성전으로 이어가고 싶었지만, 지금 군사들이 흥분했다고 해서 무리하게 공격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외성 성벽 못지않게 높고 웅장한 내성 성벽이다. 게다가 내성 역시 성벽을 넘는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내성 내부 역시 외성 내부와 마찬가지로 각종 매복들이 숨겨져 있을 공산이 컸다. 그리고 내성에 준비된 매복이나 함정은 아마 외성과는 차원이 다를 터였다. 황궁을 지키는 내성은 백성들이 많이 살고 있는 외성보다 규모는 작을지언정 방비는 훨씬 엄중했다. 대놓고 방어만을 위한 건물이나 구조물들이 어마어마했다.
이의민이 낙양 보사였던 시절 지나다니면서 본 것만 해도 한둘이 아니었는데, 숨겨진 것까지 생각한다면 얼마나 많은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다.
결국 이의민군은 내성 주변에 진을 치고 휴식을 취했다.
내성 성벽에 올라있는 황군도 이의민군이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으니 다소 안도한 모습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왕윤이 직접 성루에 올라와서 이의민군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네 이놈! 역적 이의민! 기어이 황실을 향해 칼을 뽑을 생각이냐? 네놈에게 일말의 충심이라도 있다면 지금이라도 물러가거라!”
주준이든 왕윤이든 전쟁이 일어난 자세한 전말을 모르기에 당연히 이의민이 역심을 품고 쳐들어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 모두 하진에게 완전히 매수당한 상태가 아니라 오직 한 황실에 대한 충심 때문에 이의민과 맞서고 있다는 얘기다.
이의민 역시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이의민이 왕윤의 마음을 읽어낸 건 아니고, 정욱으로부터 황실 내부의 모든 정보를 받고 있는 덕분이다.
“왕 사도! 아까부터 자꾸 나보고 역적역적 하는데, 상대가 내 목에 칼을 들이미는데도 그럼 가만히 목을 내밀고 있어야 하오? 어디 고명하신 사도께서 대답을 해보시구려.”
이의민의 반박에 왕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칼을....? 누가....?”
“쯧쯧! 사도씩이나 돼서 아무 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까막눈이나 다를 게 뭐란 말인가? 눈이 있다면 직접 보시오!”
이의민은 하진이 제후들에게 은밀히 보낸 연판장 하나를 챙겨서 왕윤 쪽으로 던졌다. 연판장이 그리 무거운 건 아니지만 성루까지는 까마득한 높이였다. 평범한 이라면 절대 손으로 던져서 닿을 수 없는 높이였지만, 이의민이 던진 연판장은 놀랍게도 정확히 성루 위에 떨어졌다.
이의민의 이런 신력이야 하루 이틀 보는 게 아니니, 이제 황군들조차 별로 놀라지도 않고 연판장을 챙겨 왕윤에게 가져다주었다.
왕윤은 바로 연판장을 펼쳐보았고, 격문의 내용을 다 확인했다. 그것으로 왕윤은 이의민이 왜 쳐들어온 것인지, 아까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이것이 사실인가? 자네들이 꾸며낸 건 아닌가 말이야.”
“내용은 몰라도 하진의 직인은 어찌 꾸며내겠소? 내가 신력은 몰라도 그런 신통한 요술을 부리는 재주는 없소.”
왕윤 역시 이의민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하진의 직인이 찍혀 있으니 빼도 박도 못할 증좌다.
혼란에 빠져 있는 왕윤을 향해 이의민은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어차피 서로가 죽고 죽이는 거 뭐라고 지껄여도 상관없긴 한데, 일의 전말이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고 무작정 싸우고 있는 게 웃겨서 그렇소. 이래봤자 이유가 어찌 됐든 황궁 쪽으로 칼을 든 건 아니 될 일이라며 결국 다시 싸우는 건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이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좀 제대로 아시오. 하진 같은 놈의 말도 너무 믿지 마시고.... 그럼 수고하시고 금방 다시 또 봅시다.”
마치 동네 친구한테 잘 놀았다고 말하는 듯한 이의민을 보고도 왕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왕윤은 하진에게 연판장을 들고 가서 따졌다.
“대장군!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그대가 아무도 모르게 이런 격문을 멋대로 돌렸다는 말이오?”
하진은 왕윤의 추궁에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아무리 대장군인 그라도 왕윤은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다.
“오해 마시오. 단지 극비를 요하는 사항이라 사도께 미처 알려드리지 못했소. 그러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이 나라의 사도인 내가 모르는 극비라니.... 아니! 나야 그렇다 치고, 폐하께서도 모르는 게 말이 되오? 그리고 제후들보고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오라니.... 지금 이의민이 하고 있는 짓거리와 다를 게 무엇이오?!”
왕윤이 흥분하여 하진에게 따지니 그걸 보고 있는 황군의 표정도 불안해졌다. 안 그래도 계속 밀리는 상황인데 내부에서도 이리 불화가 터지니 말단 군사들은 불안해 질 수밖에 없다.
결국 주준이 나서서 왕윤을 말렸다. 그도 연판장을 처음 본 입장에서 황당하긴 하지만 이미 벌어진 전쟁이니 어찌 됐든 대장군을 따라야 된다는 입장이다.
“왕 사도. 고정하시지요. 소장도 화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몰랐다고 대사농이 물러가지도 않을 테니 말입니다. 한데 대장군. 황보 장군은 서량으로 왜 보낸 것입니까?”
주준이 화제를 돌려주니 고마운 하진은 재빨리 대답했다.
“아! 그거 말인가? 하하. 폐하께서 주관하는 강족과의 화평협약 때문일세. 그것이 동탁과 마등이 연합에 참가하는 조건이었네. 자자! 사도. 그만 고정하시고 기왕 이리된 거 대책이나 세웁시다. 어찌 됐든 이의민만을 상대하기엔 연합군이 오는 게 나쁜 게 아니오. 이의민은 현재 외성에 위치해 있으니, 외성 밖에서 연합군이 공격하고 내성에서 우리가 호응하면 저들을 금방 진압할 수 있을 것이오.”
하진이 자신만만히 얘기했지만, 왕윤은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황실을 모시는 입장에서 이대로 이의민에게 항복할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왕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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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 있는 황하보다도 훨씬 더 거대한 장강. 이곳에서 수십여 척의 배들이 서로 부딪히며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마 두 세력이 수상전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원가라고 적힌 깃발을 꽂고 있는 배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침몰을 당하고 있다.
그렇다. 그들은 바로 원술의 수군이었다.
“주군. 우리 쪽 군선들이 거의 다 침몰했습니다. 이대로 수상전을 계속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원술의 오른팔인 기령이 면목 없다는 듯 보고했다. 그는 육상에서 싸우는 건 자신 있었지만 수상전은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배에 타기만 해도 멀미가 일어나는데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수상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참전을 했고, 덕분에 이리 참교육을 당하는 중이다.
“저 놈들은 밥만 먹고 배만 탔단 말이더냐. 뭐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기령! 뭐하느냐? 한 게 없으니 노라도 저어야 할 것 아니냐. 더 빨리 노를 저어라.”
기령은 억울했지만 절치부심하며 원술의 명을 따랐다.
원술이 장강에서 수중전을 하는 이유는 바로 손견 때문이었다. 원술은 이의민과 했던 약조대로 예주를 거치려는 손견군을 막아섰다. 그런데 손견군은 강남에 살아서 그런지 주로 장강에서 배를 타고 이동했다. 그들을 막으려면 수중전을 피하고 싶어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름 수십여 척의 군선을 구입하거나 건조하여 손견과 맞서보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처참한 패배였다. 역시 수상전은 손견을 이길 수가 없다.
손견은 장강 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몇 척 남지 않은 배에 의지해 도망치는 원술을 조롱했다.
“하하! 천하의 이름 높은 원술이 쥐새끼처럼 도망가는 꼴이라니!”
손견의 말에 그의 장수들이 모두 원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비웃었다.
“하하하! 주군! 저 꼴을 보십시오. 사세삼공의 명문 원가라는 깃발을 달고 저리 도망치고 싶을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꼴사납군요. 저였다면 장강물이 아직 따듯하니 그냥 장강에 뛰어들어 죽었을 겁니다.”
예전의 원술이었다면 그 도발에 넘어가 다시 수중전을 펼치는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의 원술은 한층 성장했다.
다 이의민 덕분이다. 그에게 하도 수위 높은 도발을 많이 받아보았기에 이 정도는 도발도 아니었다. 원술은 오히려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확실히 강남 촌놈들답게 물에서는 아주 귀신이구나! 하지만 육지에서도 네놈들이 그렇게 웃을 수 있을까?”
“뭐? 육상전은 너희들이 이길 것 같으냐?”
“당연하지! 내가 쥐새끼면 넌 생선이다! 생선이 물 밖으로 나오면 쥐에게 뜯겨 먹히는 거지!”
손견은 먼저 도발을 해놓고도 오히려 원술의 도발에 넘어갔다.
“원술 저 쥐새끼를 잡아라! 놓치면 아니 된다!”
하지만 원술의 배는 어느새 육지에 도착했다. 손견 역시 배를 멈추지 않고 강변까지 몰고 갔다. 진심으로 육상전을 하려는 손견이다.
“흐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겐가? 아니면 진짜로 육지에서도 우리를 이길 수 있다 믿나?”
원술은 손견을 어리석다 비웃었지만, 막상 하선을 하고 원술군을 향해 뛰어드는 손견의 기세는 대단했다.
마치 이의민과도 비슷했다. 특히 군주임에도 최전선에 나서는 모습은 이의민과 판박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손견은 자신의 군사들보다 먼저 선두로 나아가 강변에서 기다리던 원술군을 쓰러뜨렸다. 그 뒤로 손견군의 맹장들, 정보, 한당, 황개, 조무 역시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었다. 손견을 위시한 장수들을 앞세운 손견군 군사들은 순식간에 강변을 장악해나갔다.
육상전 역시 이미 승리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여기는 손견. 다시 한번 원술을 비웃었다.
“허명만 높은 원술이여! 육상전은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더냐? 애석하게도 너희 쪽에선 우릴 막을 만한 사람이 없구나.”
그런데 원술은 전혀 곤란하거나 당황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뭐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거냐? 원술! 너희는 졌다!”
“우습지도 않군. 혹시 정저지와(井底之蛙)라고 아는가?”
“하! 내가 우물 안 개구리라고? 끝까지 허세를 부리고 싶은 거냐?”
“허세가 아니다. 너보다 훨씬 더 미친놈을 내가 이미 봤거든. 그래서 그런지 네놈이 지금 아무리 날뛰어봤자 어린아이 재롱잔치 하는 걸로 밖에 아니 보이는구나.”
“흥! 나는 고사하고 내 장수들도 못 막는 놈이 입만 살아서....!”
“입만 산 것인지 한번 겪어보면 알겠지.”
말을 마친 원술은 군사들을 향해 오른손을 들었다. 그 신호를 시작으로 강변의 울창한 숲에서 원술군이 튀어나왔다. 미리 준비해둔 매복이었다.
“고작 이런 매복 따위로....!”
손견은 기세를 줄이지 않고 매복 군사들을 상대했다. 그런데 점점 그의 표정이 당혹스러워졌다. 매복한 적군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손견의 손발이 어지러워졌고, 휘하 장수들, 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크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며 처음의 기세가 줄어들었다.
“내게는 대신 머릿수가 있거든. 그것도 네놈들 정도는 찍어 누를 수 있을 정도의 머릿수가 말이지. 아까 말한 미친놈에게 이정도 쪽수 차이는 아무문제도 아니겠지만 너는 어떨까?”
원술의 말대로 손견은 이의민과 비슷한 성향이지만, 결국 이의민 만큼의 무력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차이만큼 결과도 달랐다.
“크아악!”
“주군! 후퇴해야 합니다!”
“이,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손견이 끝까지 강변을 사수하려는데 원술군에서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장수 두 명이 나왔다.
“아까 우리 군에서 너희들을 막을 장수가 없다고 했지? 그 말이 틀렸다는 걸 알려주마. 기령! 장훈! 저놈들을 쓸어버려라!”
“옛! 주군!”
특히 기령은 수상전에서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던 걸 만회하려고 더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순식간에 손견군 수십을 쓰러뜨렸다. 손견은 그걸 두고 보지 못하고 기령과 일기토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앞선 전투로 인해 체력을 상당히 소진한 그였다. 때문에 손견은 일기토에서도 기령을 압도하지 못하고 그대로 시간이 흘렀다.
손견도 기령에 막힌 마당에 압도적인 병력 차이로 계속해서 손견군이 밀렸다. 결국 정보가 와서 퇴각을 주장했다.
“주군! 진형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이대로라면 포위 될 것입니다. 일단 퇴각하시지요.”
결국 손견도 포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군사들을 모두 날려먹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배로 다시 후퇴하는 손견. 너무도 자존심이 상했다. 진짜로 자신이 개구리 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