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잊혀진 인연 (2)
낙양 외성 내부에 있는 민가 곳곳에는 현재 황군 군사들이 숨어 있었다. 그들을 이끌고 있는 장수 주준은 이의민이 있는 외성 성벽 쪽을 한참 노려봤다.
외성 성벽을 넘었으니 이제 슬슬 민가가 있는 곳을 통과해야 했다. 그래야 내성까지 도달하고 결국에는 황궁을 점령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의민군은 성벽 근처에만 머물 뿐 좀처럼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군.... 처음에는 성벽을 넘는데 힘을 많이 썼으니 휴식을 취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너무 오래 걸리지 않는가? 설마 우리 군의 매복을 눈치 챈 것인가?’
주준은 이의민이 충분히 복병을 눈치 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치 챘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어차피 이의민군이 내성까지 도달하려면 무조건 민가가 있는 곳을 지나쳐야 했고, 그러면 복병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주준이 한참 생각에 빠졌을 때, 부관 하나가 다급히 보고를 해왔다.
“장군! 이의민군이 드디어 움직였습니다. 군사들을 이끌고 본격적으로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후훗!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결국 넘어오는 구나. 전군에 전달하라. 예정대로 이의민군이 근처로 오면 기습한다.”
주준은 다가오는 이의민군을 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민가 사이로 달려 나가는 이의민군 옆을 치면 큰 피해를 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주준의 미소는 바로 다음 사라졌다.
“장군! 이 집입니다!”
이의민군의 선두에 선 병사가 양피지 하나를 펼쳐 보더니 황군이 숨어있는 민가를 정확히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에 뒤따르던 군사들은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으며 그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비명소리가 들렸다.
“크아악!”
“들켰다!”
그 비명소리는 당연히 황군의 것이었다. 뒤를 치려다가 정면으로 상대하게 된 황군은 이의민군과 맞붙는 족족 쓰러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황군은 기습을 하려다가 도리어 기습을 당한 셈이다. 게다가 이의민군의 선두에는 장료와 서황, 태사자, 고순, 우금 등이 빼어난 무위를 뽐내며 황군을 도륙하고 있었다. 황군에는 그들을 막을만한 장수가 없다.
“젠장! 적들에게 들켰다! 매복은 실패다! 전부 나와서 싸워라!”
그래도 주준은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하여 최선의 지시를 내렸다. 주준의 명령 덕분에 황군은 숨어 있던 민가에서 나와 빠르게 진영을 갖췄다.
제대로 된 정면 대결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역시 이의민군에게 될 리가 없었다. 이의민군의 맹장들, 장료, 서황, 태사자, 고순, 우금 등은 여전히 선두에서 맹활약하며 군사들을 이끌었고, 이의민군을 상대로 승리를 해본 적이 없는 황군은 형편없이 밀려났다.
“어이! 거기! 민가에 적군이 아직 남아 있을 수 있으니, 절대 대열을 벗어나지 말라고!”
이제는 제법 훌륭한 지휘관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곽봉이다. 그의 지휘 덕에 이의민군은 계속 안정적인 전투를 펼쳤다.
그때 곽봉의 눈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잠깐 멈춰!”
이의민군 군사들은 곽봉의 지시에 모두 어리둥절했지만, 지시대로 공격을 멈추고 한 무리의 황군과 대치했다.
황군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는지, 병장기를 들고는 있었지만, 온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이의민군이 공격을 멈추니 다소 안도하다가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곽봉은 그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황군들도 이상함을 눈치 채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곽봉과 눈이 딱 마주쳤다.
황군들은 크게 당황했다. 적장으로 만난 이가 하필이면 예전의 동료다. 아는 척을 하고 싶었지만 상대는 적이었고, 그것도 장수인 만큼 아는 척을 해도 되는지 판단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했다. 반면 곽봉은 황군들에게 아는 척을 하며 그들의 이름을 천천히 하나씩 읊었다.
“한형. 주형. 구봉이, 삼수.... 다들 살아있었군. 나요. 곽봉. 기억 아니 나시오? 예전에 훈련이 끝나고 싸구려 죽엽청 한 잔 기울이던 곽봉이란 말이오.”
곽봉의 목소리가 회한에 젖어 있다. 그제야 곽봉에게 인사를 건네는 황군들이다.
“곽봉. 오랜만일세. 내 어찌 자네를 잊겠는가?”
“곽형. 정말 반갑소.”
이때 황군의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뭣들 하는가? 적들과 한가롭게 통성명이나 하러 전장에 나왔는가? 계속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나중에 군법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다.”
아무래도 황군의 지휘관인 것 같았다. 곽봉은 일단 적 지휘관부터 처리해야 할 것 같아서 목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봤다. 그런데 심지어 그 지휘관마저 곽봉이 아는 얼굴이었다.
“어?! 종 교위? 당신이었구려. 나 잊었소?!”
곽봉이 종 교위라 부른 적 지휘관은 종만이라는 이름으로, 원래 곽봉과 이의민이 속했던 외성 경비대의 교두였던 자였다.
분명 구면인데 그는 무엇 때문인지 곽봉을 모른 척하고 있다. 그래도 곽봉이 끈질기게 묻자 결국 종만도 대답을 해주었다.
“곽봉.... 음. 이제는 곽 장군이라 불러야 되나. 자네를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허나 자네는 이제 황군의 적이 아닌가. 적과 전장 한가운데서 만났는데 어찌 사사로이 옛 인연을 들먹이겠나.”
고지식한 종만의 얘기에 곽봉은 슬쩍 웃었다.
“하하! 거참. 성격은 예전 그대로시오.”
곽봉이 종만의 휘하 병사로만 있을 때는 그저 깐깐한 지휘관이라고만 느꼈는데, 자신이 지휘관이 되어 보니 종만이 그런대로 괜찮은 지휘관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쨌든 곽봉은 옛 인연이 남아있는 이들을 죽이기는 싫었다. 교위인 종만은 그렇다 쳐도 나머지 병사들은 민초와 다를 바 없는 순박한 이들이 아닌가.
“종 교위. 내가 책임지고 제안을 하나 하겠소. 애들 이끌고 지금 즉시 항복하시오. 지금 당장 항복하면 목숨은 내가 보장하겠소. 하지만 나도 주군의 명을 받드는 몸이오. 만약 거부하겠다면 죽일 수밖에 없소. 자! 선택하시오.”
약간 고지식한 종만은 곤란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곧 결정을 내렸다. 그가 여태껏 고지식한 상관으로서 휘하 병사들을 대했던 이유는 다 그들을 위해서였다. 고지식하고 깐깐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휘하 병사들이 별 다른 문제에 휘말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휘하 병사들을 위한 결정을 내렸다.
“알겠다... 아니. 알겠소. 우리 부대는 이대로 항복하겠소. 다들 무기를 버려라!”
주변의 황군은 전부 쓰러지고 있었다. 살 기회가 있는데 일부러 거부한다면 충심은 인정받겠지만 휘하 군사들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었다.
종만과 함께 있던 곽봉의 옛 동료들도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무기를 버렸다. 그리고 곽봉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고맙네! 곽봉. 아니. 감사합니다! 곽 장군님!”
“잘 생각했네. 종 교위. 아니. 종만아!”
종만의 부대를 시작으로 많은 수의 황군들이 하나둘씩 무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여기저기서 황군이 무너져 내려갔다. 항복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계속해서 맞서 싸우는 이들도 일방적으로 쓰러졌다.
주준은 어떻게든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이의민을 비난했다.
“이 역적 놈아! 황제 폐하와 대장군께서 네놈을 총애하셨거늘, 어찌 이리 역심을 품고 황군을 공격하느냐?!”
이의민의 명분 없음을 공격하면서 이의민군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황군의 사기를 올리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이의민 앞에서는 그딴 명분 놀음 따위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역심 같은 소리하네! 어쩌라고!”
이의민의 대부가 춤을 춘다. 이의민의 대부를 따라 황군들의 피와 살점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야말로 야차와 같은 모습에 이미 명분이고 뭐고 없었다.
당장 눈앞에서 야차가 내려와 자신들을 도륙하고 있는데, 반역자에 맞서서 싸우는 충신의 편이라는 게 뭐가 중요한가. 그 야차가 아군으로 든든하게 앞을 뚫고 있는데 자신들이 반역자라는 게 뭐가 중요한가. 눈앞에 닥친 공포에는 명분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으아악! 살려줘!”
안 그래도 밀리고 있는데 이의민이 본격적으로 활동하자 더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리는 황군이었다.
그래도 황군을 이끄는 주준이 명장은 명장이었다.
“모두 대 이의민 진법을 펼쳐라!”
이의민을 상대하기 위해 뭔가 준비한 게 있는 것 같았다. 혼란에 빠졌던 황군은 주준의 지휘 하에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리고 약간은 특이한 형태로 진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뭐? 대 이의민 진법? 내 이름까지 따서 뭐하는 건데?”
황군 6명이 한 조가 되어 뭉쳤다. 그리고 그 6명이 똘똘 뭉쳐 방패를 들었다. 6명이 힘을 합치니 그 견고함은 단순 6배가 되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이다.
방패마저 박살내는 이의민의 대부도 6인의 방패를 뚫지 못했다. 물론 방패가 완전히 찌그러져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을 정도가 됐지만, 어쨌든 한번을 막아낼 수는 있었다.
그리고 그 한번의 방어는 엄청난 기회였다. 6인으로 구성된 다른 조 군사들이 이의민을 향해 창을 찔러 들어왔다. 물론 굉장히 쉽게 피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시를 할 수는 없었다.
이의민은 몸을 날려 6인조의 공격을 피하고 그들을 향해 대부를 휘둘렀다. 그들은 다시 방패로 자신들의 몸을 감싸서 대부 공격을 막아냈다. 또 다시 방패를 박살냈지만, 이번에도 그들을 재차 공격할 수 없다. 다른 6인조가 또 창을 세워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대 이의민 진법을 펼친 황군은 이전과 달리 거의 병력 피해 없이 이의민을 묶어두고 있었다. 한명을 묶기 위해 무려 수천의 군사가 동원되는 셈이지만, 어쨌든 그 누구도 막지 못할 것 같은 이의민을 막아내고 있다는 것은 황군 입장에서 매우 큰 소득이었다. 압도적으로 무력이 강한 한 사람을 상대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방법은 아마 없을 터였다.
하지만 이의민은 곤란하다기보다는 흥미롭다는 표정이다.
“호오! 제법이구나. 그래. 어디 한번 놀아보자.”
이의민은 다시 6인조의 방패를 박살냈다. 어김없이 다른 조에서 창을 찔러왔다. 그런데 이번에 이의민은 그 창을 피하지 않고 잡아채버렸다. 상대의 창을 빼앗은 것이다.
황군은 창을 빼앗겼지만 당황하지 않고 바로 방패를 세우며 방어태세를 갖췄다. 어차피 공격이 통하리라 기대도 하지 않았고, 방어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때 이의민이 방패 진형을 보고 슬쩍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대부를 휘두르는 대신 빼앗은 창으로 찔렀다.
“커어어억!!”
이의민이 찌른 창이 6명을 그대로 관통했다. 급조하여 만든 대 이의민 진법은 사실 그의 대부를 막기 위한 방법이다. 그래서 6인의 방패가 합치며 군데군데 빈틈이 많았다. 대부와 같은 거대한 무기가 파고들 틈은 없지만 창과 같이 얇은 무기는 충분히 들어갈 틈이 있다.
이의민은 몇 번의 전투 속에서 바로 이런 대 이의민 진법의 약점을 간파했다.
이후 전투는 역시 볼 것도 없었다. 이전처럼 다시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오히려 이전보다 황군이 쓰러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창 한번 찌르면 무조건 6인이 한꺼번에 꼬치가 되니 말이다.
결국 주준은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군사들에게 다시 명을 내렸다.
“크윽! 모두 대 이의민 진법을 풀어라!”
이의민은 그런 주준에게 의기양양한 태도로 외쳤다. 적장이지만 마음에 드는 인물이었다.
“흐흐흐! 시도는 괜찮았소. 허나 내게 통할 리는 없지. 주 장군. 그래도 꽤 즐거웠소. 어떻소? 나와 함께 할 생각은 없소? 장군 정도의 인재라면 언제든 환영이오.”
하지만 주준은 종만과는 달리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자다. 순순히 항복할 생각은 없었다.
“웃기지 마라! 너희 역적 놈들에게는 절대 항복할 생각이 없다! 모두 끝까지 싸우라!”
결사항전의 의지를 내비치는 주준.
그때 사도 왕윤이 급히 주준을 찾았다.
“주 장군. 그냥 외성을 내주고 내성에서 항전을 하는 게 낫지 않소? 내성엔 외성과는 비교도 아니 되는 방어 시설이 있잖소?”
“허나 사도. 이리 쉽게 외성을 역적들에게 내줄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소장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무슨 심정인진 알겠으나 여기서 주 장군이 분사한다면 앞으로 남은 전투는 대장군이 이끌게 될 것이오. 그 점을 명심하시오.”
왕윤의 말을 듣고 보니 주준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현재 좌장군인 황보숭도 서량으로 가서 없는 상태였다. 앞으로 하진이 주도적으로 황군을 이끌 거라고 생각하니 그들의 앞날이 캄캄했다.
결국 왕윤의 조언을 듣는 주준이다.
“모두 퇴각하라! 목숨을 아껴라! 내성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