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잊혀진 인연 (1)
청오는 결심을 내린 듯 정한과 심준을 불렀다.
“자네들.... 나를 믿는가?”
뜬금없는 얘기에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정한과 심준.
“당연히 아니 믿지. 내가 다른 놈도 아니고 자네를 어찌 믿겠나?”
“그래. 자네를 믿을 바에 이의민, 그놈을 믿고 말지.”
물론 이들이 진짜로 청오를 못 믿는 건 아니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낙양 경비병이 된 지금까지 서로를 의지해온 죽마고우들이었다.
단지 장난으로 청오를 놀리는 중이었는데, 그가 진지한 표정을 짓자 궁금해 했다.
“뭐야? 무슨 일이 있나?”
“그래. 속 시원히 어서 말해봐.”
청오는 잠시 둘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우리가 여기서 이리 비참하게 있을 바에 차라리 여길 떠나 이의민 그놈에게 가는 것이 어떻겠냐?”
청오의 말에 정한과 심준은 대경실색했다. 그 둘은 황군을 배신한다는 생각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요즘 같이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황군을 떠나면, 먹고 살 길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냥 황군을 떠나 도망치는 것과 이의민군에 합류한다는 건 아예 다른 얘기였다. 전자는 혹시 걸리더라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겠지만, 후자는 잘못되면 그대로 죽은 목숨이었다.
“청오! 너 미쳤냐? 정신이 나가도 보통 나간 게 아니로구먼.”
“아나! 난 아니 들은 걸로 할 테니, 그런 미친 소리는 다시는 입 밖으로 꺼내지 마.”
당연히 정한과 심준은 결사적으로 청오의 의견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청오는 침착하게 둘을 설득했다.
“그럼 평생 이리 종놈처럼 살 거냐? 아니. 차라리 종놈이 우리보다 더 나을 거다. 난 이대로는 못 산다.”
그 둘도 청오 못지않게 현재 자신들의 처지가 한탄스러웠다. 그렇지만 여러모로 생각해봐도 청오의 제안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청오. 자네나 나나 여기 심준도 그렇고, 모두 지금의 처지가 지긋지긋한 건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이의민한테 가자는 게 말이나 되냐? 내가 그 새끼가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생각해봐. 우리가 대체 뭐라고 이의민이 받아주겠냐?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말단 보사에다 그저 허드렛일이나 하는 놈들이잖아? 현실적으로 좀 보라고.”
심준 역시 정한의 얘기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한의 말이 백번 옳다. 다른 거 다 떠나서 우리가 저쪽으로 넘어간다고 쳐도 이의민 얼굴이나 볼 수 있겠냐? 이미 대사농에 잘 하면 낙양을 통째로 먹을 수 있는 인물이 됐어. 괜히 갔다가 첩자로 의심받아서 죽지나 않으면 다행인 셈이지. 그리고 괜히 가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그날로 목이 달아날 거 아닌가. 난 그냥 가늘고 길게 살고 싶어.”
정한과 심준은 절대 가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오히려 청오를 설득했다.
청오는 눈을 감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정한과 심준은 청오가 드디어 마음을 돌린다고 여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청오는 마음을 돌린 게 아니었다. 한참 고민하던 청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마음은 잘 알겠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나 혼자라도 갈 거다.”
“뭐?! 정말 미쳤냐? 잘못하다가는 죽는다고!”
“계속 말하지만 난 이리 살 바에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리고 자네는 이의민이 우리를 모른 척 할 거라고 말했지? 난 그리 생각하지 않아. 그간 이의민의 소문을 충분히 들었지 않나? 성격이 좀 급하고 괴팍하긴 해도 은원을 가벼이 생각하는 인물은 아니지. 우리가 그래도 이의민의 출세에 지대한 공이 있는데 모른 척 할 것 같진 않아.”
결국 청오는 혼자라도 이의민에게 간다며 짐을 챙겼다. 다급해진 정한과 심준은 계속 청오의 곁에서 설득을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가서 무조건 대우를 받을 거라 장담할 수도 없는데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겠다고? 제발 그만둬. 도박은 만악의 근원이야!”
“사람이 도박 한번 없이 산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냐? 난 어찌됐든 갈 테니 붙잡을 생각 마.”
결국 청오가 홀로 발걸음을 옮기자 정한과 심준 역시 그 뒤를 따랐다. 이에 놀라는 청오.
“왜 따라오는 거야? 난 분명 가겠다고 말했어. 이리 붙잡아도 소용없다.”
“에휴! 네가 간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 우리 둘도 갈 거다.”
“뭐? 방금 분명 아니 간다고....?”
“그랬는데 바늘 가는데 실 간다고, 자네가 끝끝내 간다고 하니 우리 둘도 어쩔 수 없이 가야지.”
정한의 대답에 청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바라보는 정한과 심준도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는다.
삼인방은 결국 야심한 밤을 틈타 몰래 민가를 나와 성벽 쪽으로 이동했다. 민가를 나오기 전에 들켰다면 모를까 여기까지 온 이상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설사 황군 내에서 삼인방의 탈영을 눈치 챘다고 해도 이들을 잡으러 올 수가 없다. 그럼 매복이 이의민군에게 그대로 들키는 셈이기 때문이다.
성벽 앞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이의민 군에 다가가는 삼인방. 청오는 정한과 심준에게 당부했다.
“모두 무기 버렸지? 우리에게 적의가 없다는 걸 온 몸으로 표현해야 돼.”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삼인방이 나타나자 경계하는 이의민군.
“웬 놈이냐?!”
“헤헤! 대인. 안녕하십니까?”
“이 새끼가 어디서 실실 웃어? 황군이 여긴 웬일이냐? 죽고 싶어 온 것이냐?”
예상은 했지만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비굴한 웃음을 짓던 청오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경계병의 눈을 똑바로 보며 외쳤다.
“어허! 어딜 감히! 나는 네놈의 주군이신 이의민님을 뵈러 온 손님이니라.”
“이 새끼가 미쳤.... 뭐? 누구의 손님?”
경계병들이 수군거렸다. 난데없이 이의민의 이름을 들먹이며 큰 소리를 치니 당황스러웠다. 혹시라도 정말 이의민의 손님이라면 자신들은 큰 실수를 하고 있는 셈 아닌가.
“험험! 너희들이.... 아니. 정말 주군의 손님이시라고....?”
“그렇다. 어서 이의민님께 전해라. 낙양 내성 담벼락의 추억을 공유하는 손님이 왔다고 말이다.”
청오가 구체적인 내용까지 들먹이니 경계병들은 정말 믿는 눈치였다.
“내성 담벼락... 이요?”
잠시 고민하던 경계병들은 부랴부랴 이의민을 부르러 달려갔다. 황군 복장, 그것도 말단 보사의 복장을 한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았지만, 이의민이 예전에 낙양 보사였던 사실은 유명했다. 정말 인연이 있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의민의 이름이 나온 순간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은 벗어났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주군께 확인해보겠습니다.”
“커흠!”
갑자기 저자세가 된 경계병들을 보며 거들먹거리는 청오. 정한과 심준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임마! 그냥 쉽게 군복을 빌려줬던 이들이라고 하면 되지. 추억을 공유한다는 그런 손발이 오그라드는 얘기는 대체 왜 하는 거냐?”
“모르는 소리. 그 놈.... 아니. 그 분은 대사농까지 오르신 분이 아니냐. 이제 우리도 그 분과 함께 하려면 그 분의 수준에 맞게 표현을 해야 한다니까.”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보고하러 갔던 경계병들이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잔뜩 화난 표정으로 외쳤다.
“저놈들 어디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아!”
“가, 갑자기 왜....?”
경계병들은 삼인방을 향해 욕설을 내뱉으며 팔을 걷어 올렸다.
“야이 새끼들아! 주군께선 너희 같은 놈들 모르신 댄다. 뭐? 내성 담벼락의 추억? 이 새끼들이 어디서 약을 팔아!”
“히익! 그, 그럴 리가.... 다, 다시 한 번만 여쭤 봐주시오. 예전에 군복을 빌려드린 내성 보사들이라고....”
하지만 이미 한번 농락당한 걸 안 경계병들이 삼인방의 부탁을 순순히 들어줄 리가 없다.
“그래도 이 새끼들이? 얘들아! 일단 팔 다리 하나씩 분지르고 시작하자. 아주 죽여 달라고 빌게 해주마.”
“크악!!”
살벌한 구타가 이어졌다. 삼인방은 비루하게 몸을 웅크리며 살려달라고 빌었다. 외성 경비대로 발령당하고 첫 부임 때 신고식으로 얻어맞은 것보다 몇 배는 더 아팠다. 원통함에 눈물까지 흘렸다.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그들이 아는 자가 나타났다.
“웬 소란이냐?”
“아! 곽 형.... 아니. 곽 장군님. 여기 주군의 손님을 사칭하는 사기꾼 놈들이 있어서 교육을 하는 중입니다.”
“헹! 어디 사칭할 게 없어서 감히 우리 아우의 이름을 팔고.... 응? 이 새끼들은....?”
바로 곽봉이다.
청오는 지옥에서 부처님 만난 기분으로 곽봉을 불렀다.
“곽봉! 아니. 곽 장군님!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이들에게 해명을 좀....”
그런데 한 가지 청오가 착각한 것이 있었다. 이의민은 청오를 비롯한 삼인방에게 악감정을 가질 이유가 별로 없지만 곽봉은 다르다. 곽봉이 낙양 외성 경비병이었던 시절 삼인방이 그를 괴롭히지 않았던가.
퍼퍽!
“이 새끼들 잘 만났다! 아니 그래도 낙양에 오면 너희들을 찾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곧 곽봉까지 합류해서 삼인방을 신나게 구타했다. 삼인방은 괜히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을 내밀었다가 더 심하게 쳐 맞게 됐다.
복날 개잡듯 구타를 가하던 곽봉은 옛 원한이 어느 정도 씻겨 내려가는 걸 느끼고 나서야 구타를 멈췄다. 그리고 그제야 삼인방에게 이곳으로 온 이유를 물었다.
청오는 울면서 그간 자신들에게 있었던 일들을 고했다.
“아! 그래! 이제 생각나네. 그때 분명 군복을 빌렸지? 쯧쯧. 그거 버린 지가 언젠데....”
“버, 버렸다고....?”
“버렸다고는 반말이고 새끼야.”
“죄, 죄송합니다.”
“아무튼 그거 때문에 황군 내에서 설움을 당하고 있고, 그래서 투항을 하러 왔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일단 주군에게 가자.”
곽봉은 삼인방을 이의민에게 데려갔다. 이의민은 삼인방의 얼굴을 보고 나니 그제야 기억이 났다.
“아! 그때 그놈들! 크크크. 그래서 그런 사소한 일로 감히 날 만나러 왔다?”
“사소한... 흑흑! 저희를 박대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희가 아는 정보를 모두 넘겨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 묻지도 않았는데 매복을 포함한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털어놨다. 하지만 이의민의 태도는 여전했다.
“흐흐. 그런 건 이미 우리도 다 아는 것이다. 우리가 성벽을 이미 넘어 놓고도 왜 공격을 아니 하고 있겠느냐?”
이의민은 너희들이 별로 필요 없다는 식으로 얘기를 하니, 삼인방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젠장! 무슨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고 목숨 걸고 여기로 왔을까.... 크흑! 이대로 죽는 건가?’
그때 순유가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잠깐! 방금 너희가 배식을 담당했다고 했느냐?”
“예! 그렇습니다.”
“주군. 이들이 그래도 제법 쓸모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어떤 점에서?”
“배식을 담당했다고 하니 어느 민가에 황군이 숨어 있는지 다 알겁니다. 그렇지 않느냐?”
삼인방은 순유가 내민 구원의 손길을 재빨리 잡았다. 이곳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그, 그렇습죠! 확실하게 압니다.”
순유는 지필묵과 양피지 하나를 가져왔다. 거기엔 낙양 외성의 민가가 모두 그려져 있었다.
“자! 너희가 아는 대로 표시해라.”
그들은 자신들의 기억을 최대한 떠올려 황군이 숨어 있는 민가를 찾아 표시했다. 만족스런 표정으로 이들을 바라보는 이의민. 완전히 잊고 있던 인연 덕분에 또 일이 잘 풀리게 생겼다.
“흐흐흐! 이 귀여운... 아니. 가여운 것들. 고생이 많았구나. 조금만 참거라. 이 일이 끝나면 음식과 물을 내리고 상처도 돌봐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내 군사들로서 명심해야 할 것이다. 너희들이 앞으로 어찌 하느냐에 따라 단순한 투항자로 살지, 아니면 큰 공을 세워 이전과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으며 살지 정해질 거다.”
“예, 옛! 주군!”
이의민의 충고에 재빨리 대답하는 삼인방. 처음에는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역시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