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일타강사 이의민 (2)
곽봉은 성벽 위를 보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엄청난 희열감이 그의 온몸을 감쌌다. 자신이 예측한 그대로 전장의 상황이 맞아떨어지는 것을 확인하니 자신이 순유나 곽가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 나도 할 수 있었어! 나만 못하는 게 아니었어!’
다른 부대에 있던 우금이 그런 곽봉에게 다가오더니 어깨를 두드렸다.
“크하하! 형님. 다시 봤소. 형님이 이리 훌륭한 장수인줄은 처음 알았소.”
“하하하! 내가 그동안 아니 해서 그렇지! 하면 이리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이제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곽봉이다. 우금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이들도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곽봉은 내친 김에 추가 공격을 명했다.
“지금이 기회다. 다들 성벽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라!”
곽봉의 명에 군사들은 일제히 거대한 사다리를 가져왔다. 보통이라면 낙양 외성과 같은 거대한 성벽으로 사다리 같은 걸 쉽게 가져갈 수 없었다. 성벽 밑의 침공군이 사다리를 가져오는 동안 성벽 위의 수비군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화살을 비롯한 돌, 끓는 물 등 방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할 터였다. 하지만 곽봉의 지시로 성벽 위 수비 병력들을 한 차례 정리한 덕분에 현재 이의민군이 사다리로 성벽에 오르는 걸 전혀 저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 방해 없이 사다리를 타고 낙양 외성 성벽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된 이의민군. 곽봉은 자신이 가장 먼저 가서 성벽 위를 확인하고 싶었다. 마치 화가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다른 누구보다 먼저 직접 감상하고 싶은 심정과도 같다.
곽봉이 사다리로 성벽 위를 올라간 이후에 보이는 광경은 더 가관이었다. 숨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황군이 전부 고슴도치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끓는 물과 기름은 항아리가 박살난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심지어 그 끓는 물이나 기름을 뒤집어쓰고 죽은 황군도 있다. 자신들이 준비한 함정에 자신들이 당한 셈이다.
곽봉이 생각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 응?!”
그런데 곽봉은 자신이 가장 먼저 성벽 위로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앞서 올라온 이가 있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의민이었다.
“억?! 의민이? 언제 올라왔는가?”
“흐흐! 왜 그리 굼뜨시오?”
“네가 여기에 왜 있어?! 이쯤 되면 사기 아니냐? 너 한참 뒤에 있었잖아? 언제 올라온 거냐? 아니지. 올라온 게 아니라 날아온 거 아니냐?”
곽봉은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이의민에 대한 경외심이 들었다. 보면 볼수록 대단한 인물이다.
‘하! 자식. 나 스스로 대단한 인물이라는 자부심 좀 느껴보려 했는데, 이놈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군. 크크. 어쩌면 잘 된 건지도.... 덕분에 자만심을 느낄 일은 평생 없겠어.’
전장에 대한 시야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전투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이의민이 더 대단한 인물이라는 게 느껴졌다.
사실 곽봉도 처음에는 이의민이 신력은 엄청나지만 머리에 든 게 없는 인물이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깨달았다.
실제로 이의민은 전장에서만 수십 년을 구른 사람이다. 그것도 최일선에서 말이다. 그 경험에서 나오는 판단력과 지휘 능력은 그 어떤 장수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크크크. 너 진짜 사람은 맞냐? 대체 못하는 게 뭐야?”
“흐흐흐. 난 이의민이오. 그거 하나로 모든 게 다 설명이 되는 것 아니오?”
“그렇지. 누군가는 뛰어난 신력을 가진 사람보고 항우라고 표현하는데, 아우는 아무래도 그런 걸로 설명이 아니 되는 것 같아. 제 2의 항우? 그딴 건 필요 없지. 아우는 그냥 이의민일 뿐이야.”
“흐흐. 맞는 말이오. 아무튼 드디어 낙양의 개차반 곽봉이 돌아왔군.”
“뭐? 낙양의 개차반? 어떤 호로새끼가 그딴 망발을....?”
“봉효가 퍼트리고 다니던데?”
“아놔! 곽또라이! 그 새끼. 곽씨의 수치인 놈!”
“크크. 봉효에게 그리 말하는 사람은 형님뿐이오.”
원래대로 돌아간 곽봉과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한차례 주고받은 이의민은 다시 성벽 아래를 보며 눈을 빛냈다. 다른 성이었다면 군사들이 성벽을 넘었으니, 사실상 함락시킨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곳 낙양은 아니었다. 낙양은 한나라의 최고 지존인 황제가 있는 곳인 만큼 성벽 역시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외성 성벽을 넘었지만, 또 다른 거대한 성벽인 내성 성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거기까지 넘고 황궁까지 뚫어야 진정으로 낙양을 함락시켰다고 할 수 있었다.
또 외성 성벽을 뚫었다고 해서 외성 내부를 전부 장악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이의민은 외성 내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곽봉에게 말했다.
“곽봉 형. 저걸 보니 느껴지는 것이 없으시오?”
이번에는 곽봉이 어리둥절했다. 낙양 출신의 그가 평생을 봐오던 광경이 그대로 있었다. 아무리 봐도 별달리 이상한 것은 없어보였다.
“글쎄.... 저기에 옛날 우리 집도 있을 터인데....”
“그렇소. 옛 형님 집을 비롯해서 많은 민가들이 있잖소. 저리 많은 민가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걸 보니 정말 생각나는 것이 없소?”
이의민이 재차 질문을 했고, 곽봉은 머리가 빠지게 고민을 했다.
‘그냥 평범한 집들인데.... 그래! 아까 의민이가 시야를 넓게 가져가라고 했지?’
이의민이 했던 조언들을 까먹지 않고 있던 곽봉은 다시 낙양 외성 내부를 관찰했다. 민가 하나하나를 별 생각 없이 보다가 이번에는 전체적인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렇게 보니 뭔가가 떠올랐다.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상황과 굉장히 비슷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저 집들 사이사이로.... 어?! 이건 우리가 얼마 전에 조조군을 상대로 개양성에 써먹은....?”
“그렇소. 우리 군사들이 저런 집들 사이에서 매복해 있다가 기습을 하면서 조조군을 격파했잖소. 필시 저들도 그런 매복이 있을 것이요. 황군에도 머리가 돌아가는 자들이 있다면 저런 것들을 활용하지 아니 할 리가 없지.”
“그렇군. 지금 바로 공격하면 큰 낭패를 보겠군.”
이렇게 곽봉의 시야가 또 한번 넓어지고, 경험도 추가됐다. 점점 장수로서의 역량이 올라가는 곽봉이다.
아무튼 이의민이 본 게 정확하다면 이대로 외성 내부를 통과할 수는 없었다.
“의민이. 그럼 어찌해야 되나?”
“그냥 다 무시하고 통과할 수도 있고, 내 성격에는 그게 맞지만, 군사들이 전부 나 같지는 않으니 그리할 수는 없소. 공달이나 봉효에게 해결책을 내 놓으라 해야겠군. 이제 그놈들이 일을 할 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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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 외성의 민가에는 이의민의 예측대로 중무장을 한 군사들 다수가 조용히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의민군이 지나가면 그 즉시 튀어나가서 기습을 하려고 말이다.
하진이나 하묘였다면 이런 생각도 못했겠지만, 주준, 왕윤 등이 황명을 받고 직접 전장에 참여 하면서 드디어 황군 쪽에서도 제대로 된 전략을 구사하는 셈이었다.
그렇게 이의민군이 지나가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이들을 이끄는 교위가 한숨을 내쉬며 나머지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젠장! 이의민군이 무슨 생각인지 진격을 멈췄다고 한다. 일단 매복대기는 해제한다.”
“아! 망할!”
“그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곳곳에서 푸념소리가 들렸다. 민가에 몰래 숨어서 기다리는 건 군사들에게 꽤나 고역이다. 비와 사람을 피할 수 있는 지붕이 덮인 집안에서 기다리는 게 밖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좋을 것 같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당연히 숫자 때문이다.
이런 민가는 보통 4-5인 가족이 사는 공간인데, 기습을 위해 그 안에 수십 명씩 때려 넣어버렸으니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명령이 떨어졌으니 어쨌든 더 대기를 해야 하는 황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숨어만 있을 수는 없기에 슬슬 저녁을 지었다. 그래도 민가 안이라 취식에 필요한 도구들이 있으니 그 점은 밖보다 더 좋긴 했다.
“밥 왔습니다.”
“아이고! 배고파 죽겠네. 빨리 빨리 배식 못하냐? 청오. 어쭈?! 표정 봐라? 불만이냐?”
“아, 아닙니다!”
한 선임병의 다그침에 청오라 불린 군사는 인상을 쓰면서도 고분고분 대답했다.
“낄낄! 그러니까 군복이나 뺏기고 다니지. 으휴! 덜 떨어진 놈들....”
청오뿐만 아니라 배식 당번으로 보이는 세 명이 유독 동료들에게 심한 모욕을 당하고 있었다. 단순 모욕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다른 군사들에게 배식을 다 해준 그들에게는 남은 찌꺼기 수준의 밥 밖에 없었다. 그래도 살려면 그거라도 먹어야 하기에 뒷간으로 가서 쪼그려 먹었다. 왜 하필 가도 뒷간에 가냐고? 자칫 잘못해서 다른 선임병들의 비위를 거스르면 그것마저도 못 먹을 수도 있다.
뒷간에서 똥오줌 냄새를 맡으며 억지로 밥을 먹던 청오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숟가락을 집어 던졌다.
“에라이! 씨팔!”
“자네, 밥 아니 먹을 건가? 갑자기 왜 그러나?”
“내가 억울해서 그러네. 이의민, 그 개 같은 놈 때문에 이게 뭔 꼴인가?”
“이 새끼가 밥 먹는데 재수 없게.... 이의민, 그 놈 이름은 입에 담지도 말게.”
이의민에 대한 욕을 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단순히 이의민 때문에 전쟁에 끌려와서 하는 욕 같지 않았다. 마치 이의민에게 직접적인 원한이 있는 듯한 어조였다. 대체 누구인데 일개 말단 병사가 이의민에게 직접적인 원한이 있는 걸까?
그렇다. 청오, 정한, 심준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 삼인방은 이의민이 이곳에 떨어지자마자 첫 번째로 주먹을 휘두르게 만든 내성보사 삼인방이었다.
그럼 삼인방은 그때 맞은 일로 아직도 이의민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걸까? 지금 이의민에게 욕을 퍼붓고 있는 건 그때 일 때문이 맞지만 맞은 것 때문은 아니다.
삼인방은 그 당시 이의민이 내성 성벽을 넘을 때 군복을 빌려주었다. 말이 빌려준 것이지 사실상 뺏긴 거나 다름없다.
이의민은 그때 잠깐만 입고 돌려준다고 했지만, 이미 그들의 존재자체도 잊은 이의민은 군복을 갖다 버린 지 오래였다. 그 덕분에 그들은 졸지에 군복을 뺏긴 병신 삼인방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이의민이 빌려갔다고 말해 보았지만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 게다가 그들의 상관이라고 해봤자 말단 교위에 불과했다. 이미 그 당시 후장군이 된 이의민에게 진상조사를 할 담 큰 인물은 없다.
삼인방에게 본격적인 시련은 그 이후 찾아왔다. 그들의 상관은 말단 병사들에게 새 군복을 지급할 돈이 아깝다며 그들에게 이왕 외성 경비대 군복과 바꿔치기 한 김에 그쪽으로 강제 발령을 시켜버렸다.
그렇게 병신 삼인방은 강제로 외성 경비대에 발령이 나버렸고, 그들이 간 경비대의 보사들은 평소에 자신들을 무시하던 내성 경비대 대원들이 신참으로 왔으니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결국 온갖 괴롭힘에 각종 배식이나 청소 같은 허드렛일은 다 그들이 도맡아서 해야 됐으니 그들이 갖는 분노도 이해가 가는 바이다.
“하! 빌어먹을! 불공평한 세상! 그때 그놈은 장군이 되었고, 난 이 모양 이 꼴이라니....”
청오는 억울한 듯 하늘을 보며 푸념을 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에 이의민군이 있는 성벽이 보였다. 황군은 안으로 유인하기 위해 공격을 하지 않고, 이의민군 역시 눈치를 살피느라 기묘하게 대치 중인 상황이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끝내야할 망상이었지만, 현재 자신의 처지와 함께 이의민이란 인물을 떠올리니 이 망상을 한번 실현시키고 싶은 청오다.
‘씨팔... 기왕 이리 된 거, 한번 저질러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