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일타강사 이의민 (1)
낙양외성 바로 근처에 지어진 이의민군 막사에서는 잔치소리가 요란했다. 물론 아직까지 승리를 확정지은 건 아니지만, 이의민은 일부러 잔치를 열게 했다.
군사들이 바라는 건, 공과에 대한 확실한 보상이다. 승전을 하고 좋은 전과를 올린 군사들에게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걸맞은 상을 확실히 내렸다.
특히 군대의 기본이 되는 말단 병사들에게 가장 좋은 상은 지휘관의 칭찬 따위가 아니다. 당장에 먹을 것, 특히 술과 고기라면 환장할 수밖에 없다.
이의민은 그런 점에서 병사들에게 가장 좋은 지휘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들 고생 많았다! 승전을 했으니 다들 오늘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도록 하라!”
“와아아아아!!”
“대사농! 감사합니다!”
“이의민 장군! 최고십니다! 평생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군사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던 이의민은 늘 함께 하던 익숙한 사람 둘이 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으음? 공달! 공달?!”
“예. 부르셨습니까? 주군?”
“그런데 아까부터 봉효가 아니 보이는군.”
“의원에게 진맥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게 평소에 대련까지는 아니더라도 운동이라도 좀 하라니까. 그럼 곽봉 형은? 술을 마다할 형님이 아닌데.... 혹시 곽봉 형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나?”
이의민이 찾는 인물은 곽봉이다. 술과 고기가 있는 잔치라면 마다할 인물이 아니었다. 전투가 끝났을 때 신변에 아무 이상이 없는 것도 확인했는데, 갑자기 승전잔치에는 나타나지 않으니 아무래도 이상할 수밖에 없다.
“으음... 전투 직후에도 곽 장군의 표정이 무척 좋지 않아보였습니다.”
“뭐? 왜 그런 거야? 곽봉 형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제 짐작으로는.... 이번 전투에서 곽 장군의 부대만 꽤 피해를 입었지 않습니까? 아마 그것 때문에 상심을 한 게 아닐까 합니다.”
“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일 텐데.... 나랑 가장 가까이 있던 부대가 곽봉 형의 부대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테지.”
아무리 승전을 했다고는 해도 피해가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이번 전투에서 이의민군은 황군 만 오천을 죽이거나 포로로 붙잡았지만, 이의민군 역시 3천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3천에 가까운 사상자가 거의 대부분 곽봉의 부대에서 나왔다는 게 문제였다. 순유의 말대로 곽봉은 그에 크게 상심을 한듯했다.
그러나 이의민의 말대로 그걸 곽봉의 책임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적군 모두가 이의민을 잡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의민과 가장 가까이 있던 부대가 바로 곽봉의 부대였다. 그러니 곽봉의 부대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오는 건 당연했다.
순유도 그걸 잘 알고 있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승전을 했고, 피해에 대한 책임을 억지로 물으려 하더라도 곽 장군에게 그 책임을 묻는 건 지나친 것이지요. 한데 곽 장군이 괴로워하는 건 책임여부를 떠나 자신의 능력 부족에 대해 한탄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부터 다른 장수들에 비해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것 같다고 의기소침 했었는데, 이번에 그 열등감으로 인해 더 괴로워하는 것 같습니다.”
이의민은 순유의 말을 듣고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다. 그에게 있어서 자괴감 같은 단어는 생소한 단어였다. 언제 누구에게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있어야 알 수 있는 감정인데, 이의민이 그런 감정 따위를 느낄 리가 없으니 말이다.
“흠.... 곽봉 형님이 평소에 그런 생각을....? 왜 그런지 모르겠군.”
이의민은 곽봉이 겪는 어려움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 넘어갈 수가 없었다. 곽봉 스스로는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만, 지금 곽봉이 하급 장수들이나 병사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굉장히 컸다. 이의민이 군사들 사이에서 아버지와 같은 어려운 존재라면 곽봉은 마치 어머니나 형 같은 존재다. 이의민보다 군사들하고 훨씬 더 자연스럽고 스스럼없이 소통을 하면서, 이의민과 군사들 사이를 연결하는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런 곽봉이 의기소침한 상태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건 군 전체로 봤을 때도 절대 좋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설사 곽봉이 정말 군대에서 쓸모가 없는 존재라고 해도 역시 이의민은 그냥 넘길 생각이 없었다. 피붙이 하나 없이 홀로 떨어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족과 같은 존재가 바로 곽봉이었다. 그의 고민은 곧 이의민의 고민이기도 했다.
“아니 되겠군. 공달. 내일 있을 공성전 부대 편성을 바꿔야겠군. 나와 곽형을 같은 부대에 편성하도록.”
“음.... 예. 주군.”
순유는 이의민에게 곽봉에 대한 얘기를 좀 더 하려다가 말았다. 적어도 곽봉에 관한 건 자신이 더 이상 끼어들어 충고할 일이 아니었다. 곽봉을 더 오래 알고 지낸 이는 자신이 아닌 이의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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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첫 닭이 울기도 전인 이른 새벽,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주변이 어두웠다. 그런 어둠 속에서도 잠든 이의민군은 없었다.
다들 밤늦게 까지 술을 마셨지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일어나 낙양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치를 한 직후 바로 공성전을 한다. 황군은 당연히 이의민군이 공격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다가 기습을 당하는 셈이다. 이 역시 이의민의 노림수였다.
“모두 최대한 소리를 죽여 움직여라. 적들에게 들키면 아니 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투 채비를 갖춘 이의민군은 곧 낙양 외성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이번에도 역시 총 7개의 부대로 나뉘어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각 부대의 대장들이 달라졌다. 다른 부대는 이전 전투와 같았지만, 곽봉의 부대는 이번에 악진이 맡고 있었다. 대신 곽봉은 이의민 부대의 부장으로 따라왔다.
이제 부대장을 맡지 않게 된 곽봉은 상당히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전까지 부대장이었다가 이번 전투에서는 부장으로 강등이 된 셈이니 보통의 장수라면 그럴 만했다. 하지만 곽봉이 침울한 표정을 짓는 건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곽봉은 오히려 자신이 부대장을 맡지 않게 된 걸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가 침울한 이유는 자신 때문에 군사들을 잃었다는 죄책감이 아직도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의민은 그런 곽봉의 눈치를 보며 슬쩍 말을 걸었다.
“흐흐. 형님답지 않게 왜 그리 죽을상이요?”
“아우님... 아무래도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게 맞는가 싶네. 다들 내게 형님 형님 하며 따르는데, 난 아무런 도움이 아니 되는 거 같은.... 아니. 실제로 아무런 도움이 아니 되고 있네. 어제 사실 난 죽을 뻔했어. 눈 먼 창 하나가 찔러 들어왔지. 악진 동생이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 것이네. 차라리 내가 그때 죽었어야 했어. 내 동생들이 거기서 죽었는데 난 아무것도.... 음... 그런데 오늘은 왜 이리 얌전한가?”
넋 놓고 하소연을 하던 곽봉은 이상함을 느끼고 이의민을 바라봤다.
이의민군의 기습적인 공격에도 낙양의 황군은 대비를 하고 있었던 듯, 요격대를 이끌고 나왔다. 상대가 하묘였다면 먹혔겠지만, 지금 황군의 지휘관은 순우경이었다.
어쨌든 기습은 실패를 했고, 사실상 정면으로 격돌하는 황군과 이의민군이다. 기습이 실패했다고는 해도 기가 죽을 이의민군이 아니다. 장수들은 물론 군사들까지 모두 우렁찬 기합소리를 내며 황군을 향해 돌진했다.
그런데 곽봉의 의문처럼 평상시라면 가장 앞서 있어야 할 이의민이 얌전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아니고 다른 평범한 지휘관들처럼 뒤쪽에서 군사들을 통솔하는데 신경을 쏟고 있었다.
“거기! 오른쪽에 키 큰 놈! 네가 자리를 비우면 뒤쪽의 진열이 모두 흐트러지는 걸 모르느냐?! 악진!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고 인접부대와 간격을 유지해라.”
곽봉은 평소와는 너무 다른 모습에 어리둥절 하는데, 군사를 지휘하던 이의민이 넌지시 말을 이었다.
“형님. 장수란 군사들을 지휘, 통솔하는 자이지 무예가 뛰어난 자를 말하는 게 아니오. 무예까지 뛰어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장수의 자격이 없는 게 아니라는 말이오.”
곽봉은 그제야 이의민이 자신을 위로하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지금 내 밑에 있는 애들이 좀 유별나긴 하오. 지휘도 잘하지만 선봉에서 돌격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지. 하지만 그렇다고 형님까지 그들처럼 할 필요는 없소. 무사든 문사든 전장에 나오면 모두가 장수요. 순유가 갑옷을 입고 돌격하는 걸 본 적 있소?”
“허나 내가 무예만 못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지휘 능력 역시 다른 이들에 비해 떨어지니....”
“전장에서 군사들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만이 지휘라고 볼 수 없소. 얼마만큼 군사들에게 믿음을 주고 따르게 만드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형님은 아주 잘 하고 있소.”
“그럼 뭐하나? 정작 중요한 전장에서는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데....”
여전히 곽봉의 표정을 풀리지 않았다.
“좋소.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형님의 그 부족한 판단력, 통솔력을 올려줄 수 있소.”
“저, 정말인가?”
곽봉은 기대감을 품고 이의민을 바라봤다.
“별 거 없소. 시야와 자신감, 두 가지만 기억하시오. 몇 번 하다보면 익숙해 질 것이오. 하다못해 하묘도 하는 건데 형님이 못하겠소?”
“알겠네. 해보겠네.”
“그럼 지금부터 앞으로 나간 우리 부대 군사들을 잘 지켜보시오.”
곽봉은 이제 집중해서 이의민의 말을 듣고 있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다.
곽봉은 이의민의 말대로 아군 부대를 지켜보고 있는데, 적군에서 뭔가 이상한 움직임을 느꼈다.
“음? 저들의 움직임이....?”
“움직임이 뭐 어떻다는 말이오?”
“저놈들이 우리 군사들을 유인하고 있는 거 같은데....?”
곽봉의 말대로 순우경은 조금씩 후퇴를 하면서 이의민군을 성벽 쪽으로 유인하고 있다. 평상시라면 낌새도 못 느꼈겠지만, 이의민의 조언대로 시야를 넓힌다는 생각으로 보니 확실히 보였다.
“훗! 거 보쇼. 내 뭐라고 그랬소? 곽봉 형도 분명 볼 수 있을 거라고 했잖소. 그럼 이제 어찌 해야 되겠소?”
이의민의 질문에 곽봉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전 침울했던 표정은 오간데 없고, 이 전투를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을지만 고민하는 지휘관의 모습이다.
“보자... 저 놈들 꼴을 보니 바닥에 함정을 파 놓지는 않은 것 같고.... 그렇다면!”
이의민의 표정에 미소가 깃들었지만 전장에 집중하고 있던 곽봉은 보지 못했다.
곽봉은 흥분한 표정으로 외쳤다.
“성벽 위다! 의민! 그러고 보니 성벽 위에 군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아. 필시 우리가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화살과 바위라든지, 끓는 물 같은 걸 퍼 부을 생각이야. 그럼 어서 우리 부대를 성벽 쪽에서 멀리 떨어지게 해야겠군.”
“그런데 만약 곽형의 예측이 틀렸다면? 그럼 적군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그대로 놓치는 꼴이오.”
이에 다시 갈등하는 곽봉.
“끙! 그럼 어쩌지....? 내 예측이 틀렸다면....?”
이때 다시 이의민이 한마디를 던졌다.
“흐흐. 내 방금 뭐라 그랬소? 시야, 그 다음 두 번째는?”
그제야 곽봉은 크게 깨닫는 바가 있는지 앞서 나간 부대원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추격 중지! 적들을 쫓지 마라! 성벽 쪽에서 최대한 멀어진다!”
이의민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시야와 자신감. 이제 모두 갖췄군. 곽형. 형님은 장군이지 군주가 아니오. 판단에 대한 책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장군의 필수 덕목이오. 게다가 내가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면 문제지만, 형님은 잘못된 판단을 내려도 수습할 사람이 있지 않소.”
이의민의 말에 곽봉은 힘이 솟았다. 그리고 다시 다른 아군 부대를 향해 외쳤다. 이제 완전히 자신감을 되찾은 표정이다.
“보사들은 뒤로 물러서고, 궁병들은 앞으로 나오라!”
한번도 이런 행동을 한 적 없던 곽봉이 이러자 모두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일사분란하게 자리를 잡았다.
“곽 형님. 아니. 곽 장군님. 소장 태사자, 궁병을 준비했습니다.”
“좋네. 자의. 성벽위에 적군이 숨어있네. 자네가 저들을 잡아주게.”
“예! 모두 들었느냐? 성벽 위를 향해 일제 사격을 개시한다! 발사!”
곽봉의 지시를 따르는 태사자와 그 부대원들, 그들이 쏜 화살은 아직도 어두운 새벽하늘을 수놓았다. 이어서 성벽 위에선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