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반 이의민 연합 (4)
완전히 호로관을 점령한 이의민은 따라온 교모에게 명을 내렸다.
“교모. 2만 군사를 주겠다. 호로관을 지켜라. 어쨌든 하북에서도 연합의 구색을 위해 군사를 보내긴 할 것이다. 그런데 하북에서 건너오려면 먼저 하내의 왕광을 쳐야 한다. 그러니 여기서 상황을 보다가 그를 지원하고, 힘이 모자란다 싶으면 바로 보고를 하라.”
“예! 주군!”
호로관을 먼저 장악했으니 연합이 낙양에 모이는 것도 충분히 방해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먼저 선점한 이의민이다.
이후 이의민은 낙양을 향해 파죽지세로 나아갔다. 호로관 이후에도 여러 작은 관문들이 있다. 하지만 그 관문들은 호로관만큼 거대하고 튼튼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의민의 10만 대군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드디어 낙양성이 눈앞에 보이는 벌판까지 도달한 이의민은 적당한 곳에 진을 쳤다.
한없이 거대하고 화려한 낙양성을 보며 이의민은 짤막한 감상을 내뱉었다.
“후우!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군. 거의 1년 만에 온 것인가....?”
흘러간 시간만큼 상황도 많이 바뀌었다. 낙양을 떠날 때만 해도 이의민의 군사는 고작 2만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려 10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있다. 그것도 이의민이 가진 전군이 아니고 일부는 그의 땅에 남겨둔 상태다.
게다가 이의민을 따르는 새로운 인재들도 많아졌다. 곽가, 관해, 태사자, 만총, 장료, 고순, 악진 등은 전부 낙양을 떠난 이후에 얻은 인재들이다.
결정적으로 이의민은 당시 황군과 한편이었다. 하진과 어느 정도 사이가 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완전한 적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명백히 그들과 전쟁을 치르는 적이 됐다.
그간 이의민이 호로관을 점령하고 수많은 관문들을 돌파하는 동안 당연하게도 황군 역시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이미 낙양성 외성 밖에는 수많은 황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황군의 선두에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바로 조조다.
“훗! 맹덕.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쳤군. 그리고 박쥐처럼 여기저기 잘 붙어먹는 구나.”
이의민이 조조를 향해 조롱했다. 정곡을 찔린 조조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조조는 이의민을 보고는 이를 악물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네 이놈! 역적 이의민!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감히 황제 폐하께 역심을 품은 것도 모자라 기어코 군사들까지 몰고 와서 역모를 일으켰구나.”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이번 출정의 목적은 황제폐하가 아니라 간신배이자 역적이라고 할 수 있는 대장군 하진을 처단하기 위해서다.”
“흥! 황제폐하의 신임을 얻고 있는 대장군을 아무 명분 없이 친다니 그게 곧 역모다!”
“흐흐! 어찌 그런 무엄한 말을 한단 말이냐. 네놈 말인즉 황제와 대장군이 같단 말이냐?”
모든 일에 막무가내고 아는 것이 없어 보이는 이의민이지만 의외로 이런 말싸움은 조금도 지지 않았다. 분명 논리가 없어보였지만 상대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지금도 이의민은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반면 그 말 잘하는 조조는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면서 조금은 당황스러운 모습이었다.
“이이익...! 그 말이 아니라....! 난 대장군을 명분 없이 치는 행위에 대해 얘기를 한 거다!”
“명분? 이미 얘기했잖느냐? 반역자인 대장군을 벌하러 왔다고. 자꾸 똑같은 말 반복하게 하네. 이제 슬슬 지겨워지는 참이니 더 개소리를 지껄이지 못하도록 해주마.”
하지만 이의민은 역시 이렇게 말로만 떠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슬슬 지겨워졌는지 말다툼을 마무리하고 조조의 앞에 명판 하나를 툭 던졌다.
그건 조조가 여러 제후들에게 보낸 격문이었다. 그곳엔 반 이의민 연합에 참가하는 제후들의 이름이 적혀 있고 하진의 대장군 직인이 찍혀 있었다. 그 격문이 이의민의 손에 들려 있다는 건 하진이나 조조와 매우 가까운 곳에 첩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익! 네놈이 그걸 어찌....?”
“그걸 보거라. 거기에 황제폐하께서 나를 역적으로 간주하는 그 어떤 표식이라도 있느냐? 전부 대장군이랑 네놈이랑 짜고 치는 것밖에 없잖느냐? 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청주의 백성을 도적들로부터 구하고 안정화 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폐하의 명을 훌륭히 수행하여 청주를 정리하였는데 이리 충성스러운 나를 치려고 하는 대장군과 네놈이야 말로 역적이 아닌가?! 뭣들 하는가! 저 역적 놈들을 전부 잡아들여라!”
이의민의 우렁찬 명에 따라 10만에 달하는 대군이 일제히 열을 맞춰 이동했다. 총 7개의 부대로 나뉘어져 자리를 잡았다.
각 부대의 선두에는 곽봉, 서황, 장료, 고순, 태사자, 우금이 있고, 남은 한 부대는 이의민의 뒤에 섰다.
군사들의 기세마저 이의민을 닮은 것인지 기세가 흉흉했다.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대열을 유지하는 모습은 훈련이 잘 되도 보통 잘 된 모습이 아니었다.
조조와 황군은 그런 이의민군의 모습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군사들 하나하나가 비범한 모습을 보이니 과연 이들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다. 시작부터 기세에서 지고 들어가는 황군이다.
이의민군은 일제히 황군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무려 10만의 대군이 7개의 부대로 나뉘어 일제히 돌격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악진. 괜찮겠나?”
곽봉은 선두로 나서면서도 악진을 걱정했다. 현재 악진은 곽봉의 부관으로 참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대가 조조다보니 부대 하나를 완전히 맡기기에는 위험요소가 있다.
악진도 그걸 알고 부대장으로 지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나름의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형님. 이미 조조와의 군신 관계는 끊어진지 오래입니다. 오히려 주군에 대한 제 충심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듯, 악진은 말을 채찍질해 가장 선두로 나섰다.
조조 역시 악진을 알아보았다. 당연히 죽은 줄 알았던 악진이 적이 되어 나타나니 조조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자꾸 인재들이 이의민에게 가고 있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조조는 분을 참지 못하고 황군을 재촉했다.
“이익! 뭣들 하느냐?! 저 역적 놈들의 목을 어서 베어버려라! 단 한놈도 살려두지 마라!”
그때 옆에 있던 자가 조조를 향해 버럭 화를 냈다. 아무리 세력이 몰락하고 떠돌이 신세가 된 조조에게 화를 낼 수 있는 자는 얼마 없다. 그는 바로 하진의 이복동생인 하묘였다.
“맹덕! 네놈이 대체 뭐라고 함부로 황군에게 명령을 내리는가?! 이들은 내 군사들이다! 네놈이 아니라 나만이 이들에게 명을 내릴 수 있단 말이다! 그러니 착각하지마라. 네놈은 내 지시를 받고 날 도울 장수들 중 하나일 뿐이다. 명심해라!”
안 그래도 화가 폭발하기 일보직전인데 같은 편이라고 앉아 있는 하묘마저 성질을 돋우고 있다.
‘이런 버러지 같은 놈까지 나를....?’
하지만 당장 힘이 없는 조조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장군. 소장이 전투를 앞두고 분을 참지 못하여 흥분하였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하묘는 순순히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는 조조를 보며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 앞으로 그렇게 하면 되는 걸세. 아무튼 자네는 내가 만든 함정으로 적들을 잘 유인하기만 하면 되네.”
하진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전장을 바라봤다.
한편 이의민군이 대치하고 있는 황군을 향해 일제히 돌격해 들어가는 도중 순유가 다급하게 이의민에게 다가왔다.
“주군! 주군! 이대로 들어가시면 아니 될 것 같습니다.”
순유가 보기에는 함정이 확실해보였다. 눈에 보이는 병력은 확실히 이의민군에 비해 황군이 더 적었다. 황군이 아직까지도 이의민군의 규모를 모른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황군은 굳이 낙양성 밖으로 나와서 요격을 하는 것이었다.
즉, 순유의 눈에는 하묘가 준비한 함정이 너무도 뻔해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의민 역시 그걸 모르고 있는 건 아니다. 이의민이 무식하고 막무가내처럼 보여도 전장에서 구른 짬밥이 어마어마했다. 이 정도로 뻔한 함정은 바로 알 수 있을 정도의 눈썰미는 있었다.
“훗! 적진 바로 앞에 군데군데 구덩이를 파놨군. 그걸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는가?”
“헛! 주군. 알고 계셨습니까? 그런데 어찌 이대로 돌격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군사들을 불러들이셔야 합니다.”
웬만해서는 순유의 말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는 이의민도 이번만큼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정석이긴 하지. 그러나 그 정석보다 이 상황에서 적을 더 확실하게 무너뜨릴 방법이 있단 말이야. 내가 한 수 알려주지. 잘 봐라. 이럴 때는 말이야.”
이의민은 그대로 한혈마를 채찍질하여 적진을 향해 돌파해 들어갔다. 제대로 대답을 듣지 못한 순유는 황당한 눈빛으로 이의민을 불렀다.
“주, 주군?! 주군!!”
하지만 이의민은 이미 적군 사이로 들어가고 있다.
“저기 이의민이다!”
“역적 이의민이 있다! 잡아라!”
황군은 혼자서 자신들 사이로 들어온 이의민을 보고 눈이 뒤집어졌다. 그래서 이의민을 잡으려고 난리가 났다. 문제는 하묘가 준비한 함정이 무용지물이 되고 있었다.
하묘가 준비한 함정은 자신들이 군데군데 파놓은 구덩이로 적군을 유인하고 빠뜨리는 것이었다. 그 함정을 성공시키려면 황군은 철저히 자신들의 진형을 유지하여 일관되게 움직여야 했다. 그 약속된 움직임이 있어야 적군을 함정으로 유도할 수 있다.
그런데 이의민이 황군 진영 한복판에 뛰어들자 그 진영이 다 무너지고 있었다. 황군 말단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수며 교위, 도위 등 가릴 것 없이 이의민을 잡기 위해 정신이 다 팔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의민만 잡으면 출세 길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을 올바르게 이끌어야 할 총지휘관인 하묘조차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서 이의민을 잡아라! 저 역적 놈만 잡으면 우리의 승리다!”
이에 조조가 다가와서 하진을 말렸다.
“장군! 뭐하시는 겁니까? 이의민 하나 때문에 진형이 이리 흐트러지면 아니 됩니다! 기껏 준비한 함정이 무용지물이 되고 있잖습니까?”
“함정이고 나발이고 이의민을 잡으면 끝나는 전쟁인데 무슨 상관이냐?!”
“이의민 저놈은 그걸 노리고 일부러 저러는 겁니다. 절대 쉽게 잡히지 아니할 겁니다.”
“그리 이의민이 겁나면 성 안에서 차나 마시고 있으라!”
“장군! 하! 미치겠군....”
하묘는 조조를 무시한 채 다시 이의민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됐다.
“주군! 하! 미치겠군....”
이의민 진영에서도 초조한 눈빛으로 전장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맨 처음 조언을 한 순유는 불안하다는 눈빛이었다.
물론 이의민 덕분에 적 함정이 파훼됐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이의민이 스스로 미끼가 되어 만든 상황 아닌가. 지켜보는 순유 입장에서는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다.
곽가는 오히려 태연하게 전장을 보며 순유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하하! 공달 형. 이제는 저보다 더 우리 주군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주군께서 아무리 막무가내로 하시는 것 같아보여도 여태껏 단 한번이라도 틀린 적이 있습니까? 어차피 되돌리기도 늦었으니 우리는 이 유리한 전황을 더 유리하게 만들 방법이나 생각합시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제야 순유는 걱정하는 표정을 지웠다.
“그렇군. 그게 우리가 할 일이지. 장군들! 적들은 주군만 보고 있소! 그들의 뒤를 치시오!”
순유의 지시에 각 부대의 장수들은 이의민이 선두에서 헤집어 놓은 적 진영을 유린했다. 이제 함정 따위는 더 이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이의민에게 정신이 팔린 황군이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병력 차이도 나는 편인데, 황군은 진영마저 흐트러진 채 무너지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황군의 피해가 어마어마하게 발생했다.
조조는 더 이상 그걸 지켜보지 못하고 퇴각 징을 울렸다.
“모두 퇴각하라! 성 안으로 후퇴한다!”
안 그래도 황군은 두려움을 느끼고 퇴각 징소리만 기다리고 있었다. 퇴각 징이 울리자마자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그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하묘는 조조를 향해 바락바락 악을 썼다.
“이놈! 뭐하는 짓이냐?! 명은 내가 내린다고 하지 아니했던가?!”
그러면서도 다른 군사들과 마찬가지로 성문 안으로 도망은 잘 치는 하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