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반 이의민 연합 (3)
이의민이 복양현에 있을 때, 그를 찾아 방문한 인물들이 있었다. 몇몇은 이의민이 처음 보는 이들이었지만 딱 한명은 구면인 인물이었다.
"양홍이 왔다고? 그 원술의 똘마니 말이냐?"
양홍이 원술의 사신으로 왔다는 소식에 이의민의 다른 수하들은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양홍이라면 원술의 두뇌라고 볼 수 있는 최측근 인물 아닌가. 그리고 그 원술은 이의민과 케케묵은 원한이 있었다.
게다가 최근 하진과 조조가 반 이의민 연합을 만들고 거기에 원술의 이름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니 원술의 사자로 온 양홍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가 없다.
양홍도 그런 분위기를 읽고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이의민을 대면했다. 살짝 변명하듯 입을 여는 양홍.
"하하하. 대사농. 동맹끼리 이리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습니까?"
"동맹이라.... 생각해보니 예전에 원술과 그런 비스무리 한 걸 한 것 같기도 하군. 하지만 그걸 먼저 깨버린 쪽은 다름 아닌 네 주인인 것 같은데?"
이의민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얘기를 하자 양홍은 살짝 겁을 먹기도 하면서 동시에 놀랐다. 원술은 이미 노숙의 조언을 받아들여 이의민과 동맹을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양홍과 노숙을 사신으로 보낸 것인데, 사실 양홍은 이의민에게 반 이의민 연합에 대한 귀띔을 해주고 적당히 생색을 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의민의 말을 들어보니 이미 그가 반 이의민 연합의 존재를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양홍은 괜히 제 발 저린 것이라 여기며 일부러 모른 체 시치미를 뗐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저희 주군께서는 그때 대사농과 맺었던 약조대로 단 한번도 대사농을 노린 적이 없습니다. 솔직히 조조와 전쟁을 하실 때 저희 쪽에서 충분히 기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실 수는 없으실 텐데요."
"지금 그걸 얘기하는 것이 아니란 걸 너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난 최근 대장군이 보낸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의민의 말에 의해 그가 반 이의민 연합을 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래서 양홍은 더욱 놀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그걸 어찌....?"
양홍이 당황하고 있을 때, 그 옆에 있던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양홍의 수행원이라고만 생각했던 인물인데, 이의민을 앞에 두고도 얘기가 막힘이 없고 위축된 느낌도 없었다.
"죄송하지만 소인이 대사농께 잠깐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소인은 자경이라는 자를 쓰는 노숙이라 합니다."
삼국지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이의민은 노숙 역시 몰랐다. 하지만 한눈에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역시 대사농께서도 반 이의민 연합에 대해 이미 알고 계셨군요. 얘기가 좀 더 편하겠습니다. 일단 하나 바로 잡자면, 그 명단은 하진이 마음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주군께서는 거기에 가담하실 생각이 전혀 없으십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저희 주군께서는 동맹에 대한 의리로 대사농을 돕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리 온 것입니다."
왠지 모르게 이의민은 노숙이 마음에 들었다.
"훗! 원술이 의리를 지킨다라...."
가볍게 웃는 이의민과는 달리 그의 수하들은 적잖이 놀랐다. 원술이 얼마나 이의민을 증오했었는지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와 일전에 맺었던 약조는 그야말로 허울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요즘 시대에 문서 쪼가리로 하나 남긴 것 없는 약조 따위가 얼마나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원술이 이의민과 의리 운운하며 약조를 끝까지 지킨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순유는 그걸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단순 의리라니, 씨알도 먹히지 아니할 말씀은 마시지요. 물론 원 태수께서 어떤 이유에서든 대장군이 아니라 우리 주군을 선택하신 건 감사할 일이라지만, 분명 바라는 바가 있으시니 이러실 것 아닙니까?"
노숙도 순유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서로 선수끼리 숨기고 재고 할 필요가 없다.
"예. 맞습니다. 단순 의리 때문이라면 거짓말이지요. 어쨌든 저희 주군께서는 대사농이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데 판돈을 거신 겁니다."
"호오? 누가 봐도 우리 주군의 전력이 열세인데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그거야 연합이 대장군과 조조의 뜻대로 이뤄졌을 때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요. 대사농께서 연합이 그리 순순히 결성 되도록 두고 보시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노숙도 이의민 쪽의 계획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눈을 빛내며 얘기했다. 역시 만만찮은 인물이다.
순유도 그걸 느끼고는 일부러 앓는 소리를 했다. 노숙의 통찰력이 어디까지 되는지 시험이라도 해보겠다는 기세다.
"훗! 그렇지요. 우리는 적어도 하북의 원소나 공손찬, 유우, 한복, 그리고 서량의 동탁, 마등 등의 합류는 견제할 것입니다. 허나 그들이 참가하지 못한다고 해도 연합은 만만찮습니다. 형주의 거인 유표가 있습니다. 거기다 강동의 호랑이 손견 역시 무시할 수 없지요. 그런 이들이 모두 힘을 합친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우리 주군의 승리에 전 재산을 걸라면 걸 수 있으십니까?"
"물론 확실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담하여 확실한 승부를 만들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유표나 손견이 가담한다고 해도 형주에서 바로 올라가는 병력은 우리가 못 막겠지만, 적어도 예주에서 연주로 올라가는 건 우리가 막아 줄 수 있을 겁니다."
노숙이 막힘없이 대답하니 순유도 결국 감탄을 터뜨렸다. 상대는 절대 자신보다 아래가 아니었다.
"허허! 과연 세상이 넓긴 넓군요. 선생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보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오히려 제가 더 놀랐습니다. 대사농께서 이리 승승장구할 수 있는 데는 선생의 공이 아주 크겠습니다."
그제야 순유와 노숙 둘 다 서로의 능력을 탐색하기 위한 논쟁을 끝내고 서로에 대한 순수한 감탄을 터뜨렸다.
이제 서로의 진심을 파악했으니 더 이상 간 볼 것도 없다. 동맹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가 오갔다. 좀 더 세부적인 얘기는 나중에 더 해야겠지만, 대략적인 동맹 안에 대해서는 확정이 됐다.
노숙은 만족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럼 이것으로 대사농과 저희 주군과의 동맹이 더욱 굳건해졌군요. 주군께서도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노숙이 나가려는데 이의민이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 그런데 분명 네가 아까 전에 의리만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지금 나온 얘기들을 보면 사실상 그냥 우리를 도와주는 것 같지 않은가? 더 요구할 것이 정녕 없단 말이냐?"
노숙과 순유가 나눈 세부적인 사항을 보면 실제로 그랬다. 물론 원술이 얻어 가는 것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이의민을 돕는 것에 비해 지나치게 작았다. 완전히 동등한 조건은 아니라도 어느 정도 높은 조건을 요구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이에 노숙은 슬쩍 웃으며 답했다.
"이 이상 없습니다."
"정말인가? 나중에 가서 또 말이 바뀌는 건 아니겠지?"
"이번 동맹으로 대사농과 우리 주군은 운명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주군께서는 그걸 가장 큰 소득으로 생각하십니다. 물론 전황이 지금 예상보다 훨씬 더 좋아진다면 그때 더 받을 것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승리하는 것만 생각하고 나중에 상의를 하는 게 좋겠습니다."
노숙의 대답에 이의민은 점점 더 마음이 동했다. 물론 노숙은 원술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일 뿐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이의민은 왠지 이 모든 것들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크큭. 볼수록 마음에 드는 놈이구나. 처음 나를 대할 때부터 범상치 않았어. 어떤가? 자경.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 없는가?"
대놓고 하는 영입 제안에 노숙이 처음으로 뜸을 들였다.
"흠.... 솔직히 말씀드려서 소인의 마음도 흔들리고는 있습니다. 허나 지금은 그런 얘기를 나눌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할 날이 있겠지요."
노숙은 그렇게 마무리하며 복양현을 나섰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이의민을 보고 순유가 넌지시 얘기했다.
"물론 저도 자경이 탐나는 인재라고 생각됩니다. 허나 지금 노숙을 건드려서 원술과 척을 질 필요는 없겠지요."
"듣고 보니 그렇군."
뜻하지 않은 원술과의 동맹 덕분에 이의민은 이제 망설일 것이 없었다. 하진과 조조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움직이려는 이의민이다.
"청주는 공융과 조표, 길태에게 방어를 맡긴다. 미축은 만약을 대비해 서주를 지키고 있으라. 첫 번째 목표는 호로관이다!"
그길로 16만의 군사들 중 12만을 이끌고 호로관으로 향했다.
호로관은 낙양의 동쪽에 위치한 거대한 관문이다.
야밤을 틈타 몰래 접근하는 이의민의 군사들. 당연히 호로관 군사들은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진은 당연히 이의민이 연합을 모를 거라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니 선제공격에 대한 대비는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조조는 하진과 다르게 이의민의 상황을 주시하려 했지만, 문제는 이미 세력이 거의 무너졌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거기다가 황군에 대한 지휘권 역시 하진과의 처음 약조와는 다르게 거의 받지 못한 상태라 대비를 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12만이나 되는 대군을 그대로 호로관 앞까지 끌고 가서 대놓고 공격한 건 아니었다. 아무리 대비가 안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무려 12만이라는 군사들이 오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의민은 12만을 호로관 동쪽 40리 밖에 주둔한 후, 대략 백여 명의 소수 별동대를 이끌고 호로관을 기습했다.
역시 가장 선두는 이의민이었다. 거대한 대부를 들었는데도 날다람쥐처럼 가볍게 호로관의 벽을 타고 올라간다. 그리고 호로관 관문 벽 위를 순찰하는 군사 수십을 순식간에 베어냈다. 순찰병들은 어둠 속에서 자신들의 목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쓰러졌다.
그래도 대략 백여 명의 순찰 군사들이 쓰러지고 난 이후에는 들킬 수밖에 없었다.
"치, 침입자다!"
"누구냐?!"
하지만 거침없이 대부를 휘두르는 이의민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의민을 뒤를 따라 별동대 군사들까지 관문 벽을 타고 올라와 벽 위를 완전히 장악했다. 별동대 군사들은 이미 수차례 훈련을 받은 듯 전혀 망설이거나 주춤거림 없이 관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도 제법 많은 군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지만, 워낙 갑작스레 습격을 당한 터라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 모두 허둥지둥 대다가 이의민의 별동대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의민의 별동대는 그대로 관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40리 밖에 주둔하고 있던 12만 대군이 일제히 움직였다. 즉각적인 통신이 없는 시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군이 정교하게 움직였다.
역시 순유나 장료, 서황 등의 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두두두두!!
순식간에 호로관 관문을 통과하는 12만 대군이다. 그리고 호로관에는 이의민의 깃발이 하나 둘 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