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반 이의민 연합 (2)
햇살이 쨍쨍 내비치는 푸르른 하늘에 구름이 몇 점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림 같은 풍경에 절로 감탄이 나올 만도 하건만 한 사내는 그런 하늘을 보면서 한숨만 푹푹 쉬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사내는 탁자 위에 있는 서신 몇 장을 손으로 쥐어 구겨버렸다. 대체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에잇! 이까짓 거.... 그래! 때려 친다! 때려 쳐!”
사내는 결국 손으로 구긴 서신들을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짐 몇 개를 챙기더니 관청을 나와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관청을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곧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앞으로 십여 명쯤 되어 보이는 무장 군사들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그들을 보며 겁이라도 먹어야 되는 상황. 하지만 사내는 덤덤한 표정으로 이들을 맞이했다.
사내와 군사들은 이미 서로 아는 사이인 듯 했다.
“자네들이 이곳까지 어쩐 일인가?”
“자경선생. 주군께서 찾으십니다.”
“주군이라.... 그래. 아직은 주군이지.... 주군께서 직접 오셨는가?”
“그렇습니다.”
군사들에게 자경선생이라 불린 사내는 바로 노숙이었다. 원래 삼국지에서 조조에게 순욱이 있고, 유비에게 제갈량이 있다면, 손권에게는 노숙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노숙은 삼국지에서 큰 역할을 한 인물이고 오나라의 기틀을 만든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럼 그가 현재 주군이라고 부르는 자는 손권일까? 당연하게도 아니다. 이맘때에 손권이 아니라 원술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노숙이다.
“휴우! 알겠네. 가지.”
하지만 주군을 만난다는 얘기에도 노숙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오히려 만나는 것이 껄끄러운 듯했다.
노숙은 사실 몰래 원술을 떠나 도망치려는 중이었다. 그런 도중에 그의 군사들을 딱 만났고, 이대로 원술과 다시 만나게 생겼으니 영 좋지 않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
동성현 관청으로 다시 되돌아간 노숙은 원술과 딱 마주쳤다. 원술은 참으로 반갑다는 표정으로 노숙을 맞이했다.
“아이고! 자경, 이 사람. 관청에 찾아와 봤더니 없어서 얼마나 놀란 줄 아는가? 대체 이 시간에 어딜 갔는가? 어쨌든 반갑네.”
“오셨습니까.... 주군.”
그런 원술과는 달리 노숙은 상당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노숙이 원술에게서 떠날 생각을 했던 건 다른 게 아니다. 원술의 반복되는 간청에 그의 밑으로 들어왔으나, 노숙은 일을 하면 할수록 도통 그와는 맞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구분 못하는 원술이 너무나 답답했다.
얼마 전 지척거리에 있는 서주에서 이의민과 조조가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였다. 그들 못지않은 세력을 가진 원술에게는 더 큰 세력을 키울 절호의 기회였다. 어느 한쪽을 도와 승리를 하고 전리품을 챙긴다던지 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원술은 무슨 생각인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전쟁을 가만히 구경만 하는 중이었다. 이에 답답해진 노숙이 몇 차례 조언을 했으나, 원술은 계속 우유부단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노숙은 조언을 포기하고 그냥 동성현에 눌러 앉아 잡무나 보고 있던 중, 끝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도망을 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딱 걸린 것이고.
원술은 계속해서 노숙을 붙들어 놓고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숙의 귀에는 단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주인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떠났다. 어서 새 주인을 찾든 아니면 홀로서기를 하든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
‘나중에 유엽이나 불러서 소면에 죽엽청이나 한잔 해야겠군.’
원술의 말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며 다른 생각에 빠져있던 노숙. 그러던 그의 귀가 번쩍 뜨였다.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주군?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반 이의민 연합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하진이 내게도 참여를 하라고 성화를 내고 있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물론 자네 입장에서는 자네 말을 듣지도 아니 하면서 괜히 물어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 자네 말을 듣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건 자네도 잘 알지....”
“잠깐!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빨리 얘기를 하시죠. 그 하진이 보내온 격문이란 것부터 보여 주십시오.”
“아, 알겠네.”
노숙은 원술이 내민 서신을 빼앗다시피 낚아챘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격문을 펼쳐봤다.
노숙은 온몸의 활기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원술 아래로 들어온 이후로는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느낌이다.
들뜬 음성으로 원술에게 말하는 노숙.
“주군.... 이건 기회입니다! 그것도 보통 기회가 아닙니다.”
“으음... 기회라.... 하긴 그렇지? 다른 이들도 대부분 같은 말을 하더군. 내가 이의민과 가장 가까이 있으니 그를 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울 수 있다고....”
원술 입장에서는 어쩌면 듣고 싶은 얘기일 수도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밀었다고 해도 결국은 해묵은 원한이 있으니까. 하지만 원술의 표정이 이상하게도 좋지 않았다.
그런데 노숙이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갑자기 성을 내면서 원술의 말을 끊었다.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주군! 지금 당장 죽고 싶어 무덤을 파고 싶으신 겝니까?”
“뭐? 자, 자경이야 말로 무슨 얘기를....? 반 이의민 연합에 가담하면 내가 죽는다는 말인가?”
“당연한 걸 왜 물으십니까? 만약 정말로 거기에 가담하신다면 현재 주군께서 이의민과 가장 가까이 있는 셈이니 가장 먼저 죽으실 겁니다.”
노숙의 대답에 원술은 순전히 궁금하다는 투로 묻는다.
“어찌 그리 생각하는가? 자네는 이의민이 정말 제후들의 연합을 이길 수 있다고 믿는가?”
“하진이 무얼 기대하며 이 연합을 만든 건지는 잘 알겠습니다. 허나 그 힘은 생각처럼 잘 모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애초부터 뭉치기 힘든 이들끼리 연합을 한 것이니까요.”
노숙은 놀랍게도 순유가 노리는 바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으음.... 그럼 가만히 있으면서 기회를 노리라는 말인가....?”
“또! 또! 그런 우유부단한 말씀하실 거면 더 이상 절 잡지 마십시오. 이제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런 애매한 태도는 버리십시오. 둘 중 누구의 편이라도 들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주군은 반 이의민 연합이 아닌 이의민의 편에 서야 합니다.”
노숙의 조언에 원술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그런데 원술의 검이라고 할 수 있는 기령이 살짝 불쾌한 듯 노숙에게 따졌다.
“자경선생. 주군께서는 이의민, 그놈과 오래된 원한이 있으시오. 그런데 주군께 그놈과 손을 잡으라고 권하는 것이오?”
기령의 험상궂은 표정에도 노숙은 눈 하나 깜빡 않고 답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오. 군주에게 개인적 감정은 한낱 사치일 뿐이라는 걸 모르시오?”
“기령은 그만하라.”
장고를 거듭하던 원술은 기령을 제지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그 자는... 항상 내 예상을 벗어났었다. 별 볼일 없던 보사 때부터, 병주 원정, 청주, 서주, 조조와의 일전까지.... 모두가 힘들다고 했던 것들을 거침없이 돌파했었지. 한번 겪어보고 싶군. 왕광이나 포신이 왜 그리 이의민에게 안달인지 말이야... 자경. 자네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지. 그러니 내 오른쪽에 서서 날 도우라.”
원술이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노숙은 그 즉시 원술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에게서 도망쳐 강남으로 가려던 생각이 싹 사라진 노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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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우면서도 화려한 낙양의 황궁. 그곳에서는 두 사내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원상형. 진짜 이러실 겁니까?”
“문약. 자네답지 않게 자꾸 나한테 와서 왜 이러나? 나는 정말 모르는 일이라니까?”
말다툼을 벌이는 듯한 두 사내는 바로 종요와 순욱이었다.
순욱 입장에서 종요는 낙양에 있는 이의민의 첩자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하진이 종요를 멀리한 지는 꽤 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도 계속 정보가 새어 나가는 정황이 나왔다. 문제는 그게 도통 누군지 몰랐다.
처음에는 조조의 진영에서 새어 나가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여 조사를 했다. 하지만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럼 의심할 곳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하진의 주위에서 정보가 새고 있다는 것. 하지만 하진 쪽은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다. 그래서 종요라도 추궁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찾아온 순욱이었다.
순욱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종요를 보았지만, 종요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딴청을 피웠다. 순욱은 계속 종요를 당황시켜 뭐라도 얻어 볼 생각이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혹시 대장군의 곁에 누군가를 심어 놓은 게 아닙니까?”
“쯧쯧.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부에서 분란이 생긴 모양이군. 아무튼 난 모르는 일이니까, 이럴 시간에 자네 주군이나 좀 더 보필하시게. 괜한 사람 잡을 생각하지 말고....”
순욱이 종요에 비해 모자란 인물은 절대 아니지만, 원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숨기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든 법이다.
결국 순욱은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하고 돌아섰다. 순욱이 그리 종요의 뒤꽁무니를 쫓으며 첩자를 색출하려 할 때, 조조는 하진을 쫓아다니고 있었다.
“대장군! 어찌하여 자꾸 말을 바꾸시는 것입니까? 분명 소장에게도 황군을 나눠 줄 것이라 장담하셨지 않습니까?”
따지는 조조를 상대로 하진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그만 좀 하게. 폐하께서 거부하셔서 그리 된 것을 나더러 어쩌라는 말인가? 어쨌든 미안하게 됐네. 난 바빠서 이만 가보겠네.”
조조 역시 하진에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모양이다.
“빌어먹을 백정 놈의 새끼! 저딴 게 대장군이라고....!”
조조는 하진이 떠난 후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얼마 전부터 조조는 하진과 자꾸 틀어졌다. 하진은 조조와 한 계획이나 약조를 계속해서 뒤집었다. 반 이의민 연합에서 황군의 지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하진은 어제까지만 해도 황군 3만의 지휘권을 보장해준다더니 갑자기 그 결정을 뒤집었다. 그가 황군 3만을 준다고 할 때는 조조의 아부에 완전히 넘어가서 멍청한 표정으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때와는 다르게 칼 같이 뒤집는 하진을 보면 분명 뒤에 누가 있었다.
문제는 순욱도 조조도 그걸 알아내지 못하고 점점 시간이 끌리고 있었다.
“대체 어떤 놈이 하진과 나 사이에서 장난질을 치고 있는 건지....”
조조는 아직 그걸 알 방법도 없고 하진의 결정을 뒤집을 힘도 없었다. 결국 그 누군가의 농간대로 흘러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
조조가 그리 씩씩 분을 삭일 때, 조인이 급하게 들어왔다.
“형님! 형님! 큰일 났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리 호들갑이냐? 내가 황군을 받지 못한 것보다 더 큰일이냐?”
“그렇습니다. 지금 이의민이 호로관 쪽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 합니다.”
“뭣이?!!”
경악에 찬 조조의 목소리가 황궁 뒤뜰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