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56화 (56/175)

56. 뜻밖의 소득 (2)

개양성에서는 이제 언제 전쟁을 했냐는 듯 평화로운 분위기까지 감돌고 있다. 성 내외의 백성들은 안심을 하고 각자 생업을 이어갔다.

그들과 동시에 거의 2만에 달하는 조조군 포로들도 각자 뭔가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상으로 신음하는 자들이었으나 이의민군의 배려 덕분에 이제 대부분 건강을 찾은 모습이다.

그들은 그런 은혜를 보답하기라도 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서인지 뭐라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다.

물론 그들에게 아직 무기는 쥐어주지 않았다. 혹시라도 2만이나 되는 숫자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감당 못할 일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실제로 그럴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들이 이리 필사적으로 일을 하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곽봉의 활약이 컸다. 곽봉은 2만 조조군 포로 사이를 이리저리 다니면서 온갖 일들에 참견했다.

“이놈들아! 그리 굼떠서 오늘 안에 이것들을 다 옮기겠냐? 굼벵이도 아니고 좀 빨리빨리 해라! 비켜봐! 내가 시범을 보여주마!”

물건 옮기는 일에 훈수를 한번 두더니 또 밥을 짓는 곳으로 가서 훈수를 두었다.

“이놈들아! 그딴 식으로 하면 밥맛이 없다고 내가 몇 번을 얘기했냐! 물 조절을 잘 하라고!”

그러더니 또 청소를 하고 있는 무리들에게 간다.

“이놈들아! 그렇게 마구잡이로 처리를 하려드니 시간이 걸리는 거 아냐! 비슷한 것끼리 종류별로 분류를 해서 처리를 해야지!”

얼핏 들으면 귀찮은 잔소리로 여겨질 수도 있는 곽봉의 참견이다. 하지만 조조군 포로들 중 귀찮다고 흘려듣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의민에게 밝혔던 것처럼 자신들이 쓸모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나름 필사적이었다.

그 덕분에 성 내부의 모든 일처리, 정확히 말하면 허드렛일 같은 것들이 최고의 효율, 최고의 속도로 처리되고 있었다.

비록 허드렛일이라고는 하지만 처리하지 않으면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포로들이 그런 일들을 도맡아준 덕분에 이의민군 전체의 전력도 향상되고 있었다. 이의민군의 수발을 포로들이 들어준 셈이고, 덕분에 이의민군은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미축과 미방 형제는 흐뭇한 표정으로 곽봉과 포로들을 바라보고 있다.

“생각보다 적응을 잘하는군요.”

“저 곽 장군 덕분 아니겠느냐. 그런데 방아. 자꾸 내 마음이 걸리는구나.”

“형님도 그러십니까? 소제도 같은 생각입니다.”

뭔가 불편하다는 미축과 미방.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듯 보이는데 뭐가 불편하다는 걸까?

포로들은 살기 위해서 아등바등 노력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수뇌부들이 저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어찌됐든 간에 그들로 인해 불필요하게 군량이 소비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미축은 결심을 내린 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주군을 봬야겠다.”

이의민에게로 간 미축.

“주군.”

“음? 자중? 무슨 일인가?”

“포로문제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 자네도 식량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저들을 내치자고 할 생각인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결정은 번복할 수 없어. 모든 이들 앞에서 곽봉형에게 일임한다고 공표했잖은가. 그걸 어찌 다시 뒤집으란 말인가.”

여러 장수들이나 부관들이 이미 이의민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들은 조조군 포로들을 내칠 핑계로 군량 문제를 들먹였다.

단순히 핑계라고만 볼 것도 아니다. 기존의 청주군은 군둔전으로 충분할 정도의 군량을 확보했다. 하지만 서주군이 합류했고, 전쟁으로 굶주린 서주 백성들까지 먹여 살려야 했다. 그 와중에 2만의 군식구가 더 늘어난 것이니 확실히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의민은 미축 역시 같은 얘기를 하기 위해 온 것이라 생각하고 거절을 하려 했다. 하지만 미축은 포로들을 내치자는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다.

“그때의 결정을 뒤집자는 말씀을 드리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포로들을 보니 어떻게든 도움이 되기 위해 애를 쓰는데 식량문제 때문에 불편한 시선을 여기저기서 받으니 그게 안타깝습니다.”

“오! 자네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군. 그래. 사실 나나 봉효도 그 문제로 살짝 골치를 썩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보고 있어. 연주까지 진출하게 된다면 해결이 되지 않겠나?”

“더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사실 저희 집안은 서주의 오랜 호족으로서 그동안 쌓은 재물이 제법 있습니다. 그것들을 주군께서 받아주신다면 대번에 해결이 되지 아니 하겠습니까?”

하지만 이의민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됐다. 날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니냐? 내가 부하들 코 묻은 돈까지 설마 뺏으려 하겠느냐? 됐으니까 넣....”

이의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가가 끼어들었다.

“자중? 재산이 얼마나 있길래 그러는 것이오? 그러고 보니 나도 소문을 들은 적이 있소. 서주에 금력으로 천하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던데 혹시 그대가....?”

이의민은 곽가의 말을 듣고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하! 솔직히 그건 너무 과장이 심한 얘기가 아니냐? 일개 지방호족이 금력으로 천하를 움직인다니? 그걸 믿는가? 봉효가 은근히 허당스런 구석이 있구먼.”

웃어넘기려는 이의민과는 달리 곽가와 미축의 표정은 진중했다.

“세간에 떠도는 얘기에 과장은 섞여 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는 자부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어느 정도....?”

“자세한 건 다시 확실히 알아봐야 하지만.... 대략 십만 군사를 20년 정도 먹일 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

“아! 뭐 그 정도 밖에 아니 되는....? 응?!”

됐으니까 넣어두라고 말하려 했던 이의민의 입이 벌어졌다. 곽가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나? 20년이라고....?”

“예.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20년 정도는 됩니다.”

“진짜?!”

“예.”

“그러니까 2년이 아니고, 20년 맞아?”

“예. 이.십.년 맞습니다.”

“이십년이....?!”

웬만한 일에는 꿈적도 않는 이의민과 곽가가 놀라 자빠지는 순간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린 이의민은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험험! 그러니까.... 음... 아까 내가 한 말은.... 부하들의 돈을....”

무안해진 이의민 대신 곽가가 나섰다.

“하하하! 자중선생은 주군의 진실한 벗이자 복덩이요. 하하하! 대의를 위해 큰 결심해준 자중선생께 감사드립니다.”

이의민 역시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다.

“자중. 자네의 그 마음, 내 평생 잊지 않겠다. 그리고 자네의 투자가 절대 헛되지 않았다는 걸 내가 증명해보일 것이야.”

“하하. 제 입으로 말하긴 좀 뭐하지만, 저 스스로 사람 하난 잘 본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리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실제 삼국지에서 몇 번이나 유비를 일으켜 세운 미축의 진가가 나왔다. 그리고 그 당시 유비가 미축에게 느꼈던 고마움과 똑같은 감정을 이의민은 느끼고 있다.

미축이 떠나고 이의민과 곽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흐흐! 주군. 너무 웃으시는 거 아닙니까?”

“그러는 봉효야 말로 입 꼬리가 뺨을 째고 하늘로 치솟는 것 같군.”

“입 꼬리가 귀에 걸린다는 좋은 표현을 두시고 하필이면.... 아무튼 정말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청주에서부터 공달형이 돈과 군량 때문에 얼마나 머리를 싸맸는지 아십니까? 그게 다 해결이 된 것입니다.”

“나도 그걸 아니까 이리 좋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사실 서주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청주에서 군둔전이 제법 잘 시행이 되고 있다고는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군 내부의 일이다. 청주 백성들까지 생각한다면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거기다가 수많은 청주 황건적들까지 군에 편입되게 된다면 청주군까지 지탱하기 힘들 수가 있었다.

그들을 전부 군둔전으로 돌리면 된다지만, 어쨌거나 군둔전으로 생산하는 군량은 당장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1년은 지나야 그 결실이 나온다는 소리다.

그런 문제들이 미축 덕분에 한방에 해결이 됐다. 어찌 기뻐 날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골치 아픈 문제를 말끔히 해결한 이의민은 갑자기 개양성의 옥으로 향했다. 필요가 있어서 여태 살려두었지만 이제는 정리할 인물이 있었다.

“그래. 진규. 옥 안에서 내가 보라고 했던 것들은 좀 봤나?”

진규는 희미하게 웃었다.

“보면 볼수록 소인의 어리석음만 보였습니다. 대사농께 크게 누를 끼쳤습니다. 소인의 남은 재산을 전부 거두어주십시오.”

진규 역시 미축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서주에서 알아주는 명사였다. 가진 재산이 결코 적지 않았고, 조금은 보탬이 되리라.

“기꺼이 받도록 하지. 그리고 자네와 진등은 살려둘 수 없지만, 조조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공이 있으니, 자네의 남은 가족들까지 연좌제로 처벌하지는 아니 하겠다.”

“감사합니다. 허나 저희 가족들이나마 살리고자 그리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서주 백성들을 진심으로 위한다는 자네의 의기는 정말이었군. 이제 눈을 감는다고 해도 걱정마라. 서주 백성들은 이제 내 백성들이다. 자네의 생각 이상으로 잘 대해줄 것이야.”

진규는 옥 안에서 이의민에게 절을 했다. 그에게 목숨을 잃게 될 처지의 진규지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담고 있었다.

이제 정리할 것은 다 정리했다고 생각한 이의민.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 할 겸 곽봉을 찾았다.

“형님 어떻소? 애들이 말 좀 듣소? 간만에 술이나 한잔 합시다.”

“흐흐! 내 말이라면 다들 껌뻑 죽지. 그런데 이 친구도 같이 한잔하면 어떻겠나?”

곽봉은 옆에 있는 작은 체구의 사내 한 명을 가리켰다. 바로 악진이었다. 그런데 악진은 어색하다는 듯 자리를 피하려했다.

“저... 혀, 형님. 흠흠. 제가 할 일이 있어서 이만....”

악진은 다른 조조군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포로의 신분으로 이곳에 잡혀 있었다. 그런데 어느덧 곽봉과는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된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의민과 함께 있는 건 아무래도 불편한 듯했다.

하지만 이의민은 악진이 빠져나가는 걸 막았다.

“그래. 너. 악바리 문겸. 저기 병사들이야 괜찮다지만 자네는 좀 다르지. 언제까지 이렇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채 살 텐가? 슬슬 결정해야 하지 않겠나?”

이의민은 이 자리에서 편을 확실히 정하라고 딱 잘라 말했다.

“야! 어서 말해. 의민이를 따르겠다고.”

곽봉이 얼른 귀순하라고 악진을 툭툭 치며 속삭였지만, 이의민은 그걸 제지하면서 악진에게 술을 한잔 내밀었다.

“형님은 나서지 마시오. 본인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오. 자! 선택해라. 조조에 대한 의리를 못 버리겠다면 이 잔을 버려라. 그게 아니라 이제라도 나를 따를 마음이 있다면 이걸 마셔라.”

악진은 잠시 고민하다 무릎을 꿇고 술잔을 받았다.

“나 악진은 조조를 탈출 시키고 장자 조앙을 목숨 바쳐 지키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포로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던졌습니다. 이 정도면 과거의 주군에 대한 의리는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대사농을 주군으로 섬기겠습니다.”

악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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