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뜻밖의 소득 (1)
조조는 성문을 빠져나간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각했다. 지금도 쉴 새 없이 눈물을 뿌리고 있는 눈과는 전혀 다른 행보였다.
아들인 조앙과 아끼던 장수인 악진을 사실상 잃은 것이나 다름없음에도 거침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조조란 인물이다. 냉정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최선의 수를 위해서 아무리 아끼는 것이라도 과감히 버렸다. 그것이 땅이든 재물이든 인물이든 말이다.
어쨌든 조조는 겨우 이의민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도망칠 수 있었다. 허유는 계속된 강행군으로 힘들어하며 조조를 불렀다. 그는 전투에 한번도 참여한 적이 없지만 아무래도 장수가 아닌 이상 이 상황을 버티는 건 쉽지 않다.
“헉! 헉! 맹덕! 더 이상 추격은 없는데, 여기서 좀 쉬어가세.”
이번에도 역시 허유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조조.
“그래. 말도 지쳤으니 좀 쉬세.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있네.”
“처리라니? 무슨....?”
허유가 어리둥절 하는데 조조는 하후연과 조인에게 눈짓을 했다. 둘은 바로 조조의 눈짓을 알아듣고 칼을 뽑았다. 허유도 그제야 조조의 의중을 알게 됐다.
“매, 맹덕? 왜 그러는가? 이, 이러지 말게.”
“자네의 말대로 했다가 이 사단이 나 버렸어. 거기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하지 아니 하겠는가? 어서 자원의 목을 베라!”
하후연과 조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안 그래도 눈엣가시 같은 허유였다. 그들 역시 평소에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아! 사, 살려....!”
허유는 외마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목이 떨어졌다. 조조의 곁에서 천하를 호령하려고 했던 허유는 스스로의 오만함 때문에 허망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그런데 조조가 말한 처리라는 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자! 이제 다음....”
조조는 장막을 가리켰다. 조인은 허유를 베었던 칼로 그대로 장막을 베었다. 허유야 충분히 이유가 있다지만 장막은 좀 의외다.
장막 역시 믿을 수가 없다는 눈빛으로 쓰러지기 직전 억울한 듯 따졌다.
“크억! 매, 맹덕...! 나는 왜....?”
“장막. 자네의 속마음이 내게 다 들리지 뭔가?”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난 다 알고 있었네. 내 힘이 커졌으니 자네는 어쩔 수 없이 내게 고개를 숙였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약해졌지 아니한가. 그러니 자네는 날 제거하고 내 자리와 힘을 차지할 수 있다고 여기겠지.”
장막은 정말 억울하다는 듯 눈을 감기 직전까지 피를 내뿜으며 항변했다.
“크윽! 맹덕.... 나, 난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자네를 따르겠다고 했을 때부터 한마음 이었다고...!”
죽기 직전까지 오해라고 부르짖는 모습을 보니 조조는 정말 자신이 오해를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장막을 벤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았다.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 의심의 싹이 텄는데, 장막이 진심이 어떻든 이대로 갈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런가? 자네의 마지막 모습을 보니 정말 자네 말이 맞을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미안하게 됐네. 대신 자네의 병력은 내가 대의를 위해 잘 쓸 테니 용서해주게.”
“이... 개, 개자식....! 결국 이러려고 내게....”
장막도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밝힌 것이 진심이라면 허유와는 달리 억울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조조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에게 있어 이런 일은 대의를 위해 당연히 겪어야 할 작은 희생일 뿐이다.
조조와 그 군사들은 담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순욱을 풀어주었다. 순욱은 옥에서 풀려나옴에도 표정이 어두웠다. 조조가 어떤 결과를 가지고 이리 급히 돌아왔는지 뻔히 예상됐기 때문이다. 순욱은 차라리 자신이 계속 옥에 갇히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예상이 틀렸기를 바란 인물이다.
“주군... 역시 이의민의 함정이었습니까?”
“그렇다네.... 자네가 옳았어. 내 항상 자네 말을 잘 들어왔었는데 그때는 눈에 뭐가 씌었었어. 내 이제부터는 결코 자네의 충언을 도외시하는 일은 없을 걸세.”
순욱은 바로 조조군의 상황을 확인했다. 그도 사람인만큼 이번 일로 섭섭한 감정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감정을 누르고 주군인 조조를 위해 최선을 다 하려 한다. 조조도 순욱의 그런 점을 좋아하고 있고.
“현재 남은 군사가 얼마나 됩니까?”
“2만 정도 밖에 되지 않네.”
조조가 데려갔던 군사 5만 중 3만 3천이 죽거나 이의민군의 포로가 됐다. 17,000기만 겨우 살려 돌아왔고, 담성에 남겨뒀던 삼천 군사와 합해서 대략 이만의 군사를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 이의민의 군사들이 4만이라고 했고, 서주군도 1만 이상은 남아있었으니 현재 병력으로는 상대가 아니 되겠군요. 게다가 패퇴를 한 상황이라 사기까지 바닥일 터이니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습니다.”
조조도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럼 어찌해야 되는가? 이대로 도망쳐서 연주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순욱은 고개를 저었다. 조조는 그에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순욱에게 기막힌 수가 있나 싶어서다. 하지만 다음 순욱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조의 기대감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연주로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근거지를 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임하셔야 할 겁니다.”
“뭐라? 연주까지 버리라고....? 어째서 그런가? 난 연주 출신이고 거기에 아버지를 비롯한 내 가족들, 내 모든 근본이 다 거기에 있네. 게다가 수도까지 지척에 두고 있지 않은가? 그런 연주를 이대로 포기하자는 말인가? 이의민이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연주는 내 안방일세. 거기서 상대를 한다면 분명 지금과 같지는 아니 할 걸세.”
조조의 말대로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먹어주는 게 있다. 하지만 조조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제가 공달이었다면, 지금쯤 연주에 주군의 세력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청주에서 황건적들을 이미 정리했을 거라는 건 나도 알고 있네. 허나 그렇다고 청주에 병력이 남아 있지는 아니 할 터인데? 우리가 연주를 아예 비우고 온 것도 아니고, 무슨 병력으로 연주를 칠 수....?”
조조는 얘기를 하다가 자신이 놓쳤던 사실을 깨달았다.
“아아! 동군과 제북...!”
동군과 제북은 조조가 연주에서 끝내 회유하지 못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동군 태수가 교모고 제북 상이 포신이었다. 그들은 바로 도적 토벌전에서 이의민의 수하가 된 이들이었다.
그제야 조조도 인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쯤이면 그들과 함께 순유가 연주를 쳤을 거고, 벌써 상당 부분을 점령했을 터였다.
“크윽! 그러면 그 새로운 시작은 어찌 하면 좋겠는가?”
“크게 두 가지 방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장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현재 양주는 주군의 2만 군사만으로도 능히 정복할 수 있는 빈 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장강이라는 훌륭한 방패가 있으니 당분간 이의민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거기라면 다른 누구에게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세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대신 시간은 많이 걸릴 것입니다.”
조조는 내키지 않았다.
일단 세력을 키우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이 불만스러웠고, 무엇보다 적들의 위협에 안전하다는 말은 그만큼 자신들도 타 세력에 진출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으음.... 그럼 두 번째 방도는 무엇인가?”
“낙양의 황실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대장군과 이의민의 사이가 틀어졌다고 하니, 일단은 대장군의 비호 아래 힘을 키울 수가 있습니다. 아마 양주로 가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세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허나 전 두 번째를 추천해드리지 않습니다. 낙양으로 가려면 연주를 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조는 고민에 빠졌다. 방금 전까지 무조건 순욱의 말을 듣는다고 했으면서도 그가 추천하지 않는 두 번째 방안에 꽂혔다.
“두 번째로 가지.”
결국 낙양으로 향하는 조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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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민과 그 군사들은 개양성으로 돌아왔다. 끝까지 추격을 했지만 끝내 조조를 잡지는 못했다.
“결국 도망쳤군. 이 많은 군사들과 자신의 아들까지 버리면서 도망가다니.... 하여간 사고방식이 보통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놈이야.”
그래도 이의민이 얻은 건 많았다. 일단 청주와 가장 가까이 있는 성가신 적인 연주의 조조의 세력을 거의 무너뜨렸다. 단순히 무너뜨린 것이 아니다. 조조가 남기고 간 2만의 군사들이 포로로 잡혀 있었다.
“포로들은 어찌할까요?”
악진을 비롯한 조조군 포로 대부분이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다. 이의민은 그런 포로들을 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래도 서주의 군사들까지 합류를 하게 되었는데, 이 밥버러지들까지 데리고 가자면 감당이 되는가?”
이의민에게 밥버러지들이라 불린 조조군 포로들은 얼굴에 핏기가 싹 사라졌다. 저 말 한마디로 그들의 운명이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다.
몸이라도 성하면 모를까 부상을 당한 포로니 말 그대로 밥버러지였다. 그런데 어쨌든 이의민이 저리 직접적으로 언급을 한다는 것은 쓸모없는 이들을 굳이 힘들게 데리고 있을 필요 없이 그냥 쉽게 처리할 거라는 얘기였다.
온 몸이 너덜너덜한데도 악진은 기어코 일어나 이의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신이 이의민이였다 해도 자신들을 죽일 것 같았다. 하지만 악진은 이들의 지휘관으로서 눈뜨고 지켜볼 순 없었다.
“대사농! 이들을 살려 주십시오! 이들은 그저 소장과 같은 자들의 명을 들은 죄밖에 없습니다. 소장의 목숨만 가져가시고 이들에게는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시길 바랍니다.”
“쯧쯧. 악바리가 이제야 무릎을 꿇는군.”
이들의 목숨을 구걸하는 이는 악진뿐만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이의민군 내부에도 그런 자들이 있었다.
“의민! 아니. 주군! 정말로 이들을 모두 죽일 셈인가?”
이의민을 이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명, 바로 곽봉이다.
“어쩔 수가 없소. 형님. 군량이 이들에게 소모되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이런 놈들을 이끌고 가려면 싸워야할 우리 군사들이 이놈들의 수발을 들어야 되는 꼴이잖소.”
냉정한 얘기 같지만 이 시대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곽봉이 무릎까지 꿇었다.
“의민! 아무리 그래도 항복한 생사람 2만을 죽이려는가? 그래선 아니 되네. 이 놈들을 위해서가 아니야. 너를 위해서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하! 형님. 일단 일어나쇼. 이들을 어디에 쓴단 말이오? 내게 적개심을 갖고 있는 놈들이요.”
“쓸 데가 없긴 왜 없어?! 군노라도 삼아서 허드렛일이나 농사를 시키면 되지. 야! 거기! 그래! 너 이 새끼야! 눈동자 굴리지 말고. 너 농사지을 줄 알지? 안다고 대답해! 새끼야!”
곽봉이 윽박을 지르자 지목당한 조조군이 재빨리 대답했다.
“네? 네넵! 농사라면 그 누구에도 뒤지지 않습니다.”
이어 다른 조조군들도 자신이 뭐라도 할 수 있다는 걸 밝혔다.
“장군! 전 요리를 잘합니다.”
“장군! 제가 장작 하나는 기가 막히게 팹니다.”
여기에 쐐기를 박듯 곽봉은 조조군들을 향해 다시 물었다.
“야이! 식충이들아! 너희들은 주군께 적개심을 가지고 있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실 이전부터 대사농을 모시고 싶었습니다. 보사들의 영웅 아닙니까?”
“적개심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 외가가 사실 이가(李家)입니다.”
곽봉은 마지막으로 조조군 포로들을 변호했다.
“의민! 조조가 이들을 버리고 갔는데 어찌 자네에게 적개심을 가지겠나. 워낙 압도적인 전투라 이들에게 상한 이도 거의 없지 않은가? 게다가 저들도 나름 쓸모가 있지 않겠는가.”
이의민은 이쯤 되니 곽봉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했다.
“형님. 대체 왜 이러시오? 이들을 대체 언제 봤다고?”
“방금도 얘기했지만 이들을 위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난 아우가 사람들에게 악마라고 불리길 원치 않아.”
“끙... 이미 야차라고 불리고 있긴 한데....”
결국 이의민도 곽봉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전장이고, 이의민도 거기에 익숙한 사람이다. 하지만 곽봉 덕분에 생각이 살짝 바뀌고 있다.
“포로문제는 형님께 모두 일임할 것이다. 다들 그리 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