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54화 (54/175)

54. 빛을 잃은 보석 (4)

전장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양측의 군주인 이의민과 조조가 드디어 서로를 대면했다. 그래도 한 때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한마음으로 싸우던 사이가 아니었던가. 거기다가 내심 서로를 인정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이의민과 조조가 이제는 서로 적이 되어 대치 중이다.

“맹덕. 자네와 언젠가는 이리 적이 되어 만날 줄 알고 있었지. 허나 이리 빨리 만날 줄은 몰랐군. 나만 만나지 않았다면 좀 더 오래 살 수 있었겠지.... 그러게 연주에 조용히 처박혀 살지, 왜 기어 나와서 이 고생을 하는가?”

처음에는 이의민을 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던 조조.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가 그럼 아니 될 말이지. 자네가 나였어도 조용히 살았겠는가?”

“뭐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하군.”

“일전에 자네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분명 내게 있었네. 하지만 어쩌면 자네를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주저했지... 지금에야 그 때의 일이 후회되는군.”

“훗! 마치 네가 날 봐준 덕분에 내가 살아있다고 얘기하는 건가? 지나친 착각이군. 만약 자네가 날 어찌 하려고 했다면, 자네의 명줄은 진작 끊어졌을 거야.”

이의민과 조조는 서로의 직위나 나이도 다 버리고 마치 오랜 친구처럼 대화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만큼 나올 수 있는 대화였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지도 못하고 눈치 없이 끼어드는 인간이 꼭 있었다.

“군사들은 뭣들 하는가? 어서 적을 죽여라! 아만! 자네는 대체 뭐한다고 적과 한가롭게 대화나 나누고 있는가?”

바로 허유다. 그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조조의 군사들에게 악을 썼다. 누가 보면 마치 허유가 군주인줄 알 정도다.

하지만 조조군 모두 조조의 눈치만 볼 뿐, 허유의 명을 듣지 않았다. 결국 허유는 조조의 장수들에게도 난리를 치며 명령조로 재촉했다.

“자효! 묘재! 다들 뭐하고 있는 게야?! 맹덕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면 너희들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할 것 아닌가!”

허유의 말투는 점점 도가 지나쳐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조조의 사촌들, 장수들 역시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비단 그들에게 명령조로 말한다고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었다. 지금 허유가 하는 행동은 조조까지 욕보이는 짓이다.

오래간만에 조조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했던 이의민은 뜻밖의 훼방꾼에 눈살을 찌푸렸다.

“쯧쯧. 맹덕. 그리 보지 아니 했는데 사람이 무르군. 아랫것들 교육을 이따위로 시키면 어찌 하는가?”

“뭐, 뭐라고?! 대사농! 말을 가려서 하시오!”

“넌 빨리 뒤지기 싫으면 입 좀 다물고 있어라. 여태껏 그 입을 가지고도 살아있는 건 네놈 스스로가 잘 나서 그런 게 아니야. 다 맹덕의 자비 덕분인 걸 모르는가?”

그간 열등감이 가득했던 허유는 이의민의 신랄한 비판에 꼭지가 완전히 돌아버렸다.

“이놈이! 대사농이고 나발이고 다 죽여 버릴 것이다! 맹덕! 어서 명을 내리지 아니 하고 뭘 하는가?”

결국 허유는 이의민에게도 막말을 퍼부었다. 허유는 아직 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다.

반면 이의민은 막말을 들었음에도 여유로웠다. 허유 같은 놈은 자신이 직접 상대할 가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의민 휘하의 장수들이 나섰다.

특히 허유와 가장 가까이 있던 장료의 기세가 무서웠다.

“이 놈! 찢어진 입이라고 감히 주군께....!”

장료의 쩌렁쩌렁한 외침은 허유의 돌아버린 꼭지를 금방 원위치 시켜주었다. 허유는 장료의 사자후 한번에 공포심을 느끼고 군사들 사이로 쏙 들어가 버렸다.

이제 다시 조조와 대화할 분위기가 됐다. 조조는 전투에서 태사자와 서황을 봤고, 여기서 장료도 봤다. 서황은 구면이었지만, 태사자와 장료는 처음 본다.

“저 장수는 누구인가?”

“장료라는 자일세. 군사를 통솔하는 능력이 아주 일품이지. 게다가 아주 사납기까지 하다네.”

“좋은 장수를 거뒀군....”

조조는 말을 하면서도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좋은 인재들이 자꾸 이의민 쪽으로만 몰려가는 것 같았다. 서황은 물론 곽가 역시 조조가 영입하려 애를 썼지만 결국 이의민을 택한 이들 아니던가. 게다가 장료나 태사자 역시 이의민만 아니었다면 자신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의민에게만 다 가는 것인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의민은 모든 게 부족한 청주에서 군사들과 물자를 마련하고, 황건적을 몰아내는 것만도 벅차보였다. 반면 조조는 조부의 재산을 등에 업고 편하게 세력을 키우고 사람들을 모았다. 그런데도 많은 인재들이 알아서 이의민을 따랐다. 조조는 그 이유를 몰라 답답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부러웠다.

하지만 지금 조조에게 필요한 건 인재에 대한 욕심이 아니다. 당장 이 포위망을 뚫고 개양성을 탈출해야 했다.

“인사는 이쯤 하도록 하지. 난 이만 가봐야겠네.”

“흐흐! 알겠네. 허나 자네 마음대로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그래. 내게도 사람이 없지는 않다.’

“악진!”

“옛! 주군!”

조조가 부르자 장수 하나가 그 앞에 부복하며 포권했다. 그런데 악진이라 불린 그 장수는 장수치고 몸집이 작았다.

이 시대의 장수들은 대부분 범인(凡人)들에 비해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악진은 평범한 병졸들보다도 더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눈빛이 사납다 못해 야수와 같이 이글거리고 있었고, 당당하면서도 곶은 태도는 스스로 무위에 자신이 있는 듯했다.

이의민 역시 악진의 비범함을 알아보았다.

“호오! 몸집은 작지만 근성이 있어 보이는 군. 자신보다 훨씬 더 거대한 적들 사이에서 밀리지 아니 하고 싸운 흔적이 보여. 악바리라는 소릴 좀 들었겠어.”

이의민의 평가대로였다. 악진은 지금껏 깡 하나로 불리한 싸움도 수차례 역전을 해냈다. 조조가 이의민을 뚫기 위해 악진을 내보낸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가 어느 정도 비슷해야 되는 일이다.

“어디 한번 막아봐라!”

이의민은 악진을 향해 지체 없이 거대한 대부를 크게 휘둘렀다. 여태껏 자신보다 몸보다, 신장보다 훨씬 더 큰 무기를 수없이 막아왔던 악진이다. 하지만 이의민의 대부만큼은 막지 못했다.

악진은 자신의 무기인 장창을 수평으로 세우며 대부를 받아내려 했다. 하지만 대부는 악진의 장창과 함께 몸까지 그대로 날려버렸다.

“크으윽! 쿨럭!”

장창을 끝까지 놓치지 않은 덕에 대부에 바로 쪼개지지는 않았지만, 수십 걸음 정도 날아간 것도 모자라 내상을 입어 피까지 토했다.

그래도 악진은 악바리였다. 피를 토하면서도 다시 장창을 들고 일어났다.

“하하! 그걸 버텨내다니 대단하구나. 그럼 이것도 버텨낼 수 있겠나?”

이의민은 적당한 장난감을 만났다는 듯 기쁜 미소를 지으며 악진에게 집중했다. 이의민의 다음 공격에는 악진이 버티지 못할 터였다. 조조도 그 사실을 깨닫고 다른 장수들에게 소리쳤다.

“악진을 도와라!”

악진을 구하기 위해 조조군의 수많은 장수들과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순간 혼자서 수십의 군사들을 상대하게 된 이의민. 하지만 이의민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난입한 군사들 몇몇이 악진 대신 명을 달리했다. 그래도 덕분에 악진의 목숨은 겨우 구출해 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상황이 끝난 게 아니다. 여전히 조조군은 포위가 되어 있었다. 특히 장수전에서 조조군이 크게 밀리고 있었다. 조인은 서황과, 하후연은 태사자와 비등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의민을 막을 장수가 없다는 게 문제다.

악진마저 부상으로 이탈하자 이의민은 그야말로 야차처럼 조조군을 도륙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의민뿐만 아니라 우금과 곽봉 등도 조조군 사이에서 활약을 펼치고 있다.

안 그래도 성 안에서 포위당해 어려운 진영을 유지한 채 싸워야 되는데 장수들의 싸움에서도 크게 밀리니 이길 도리가 없었다.

조조는 큰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자효! 묘재! 일기토를 멈추고 돌아와라!”

조조의 명에 따라 조인과 하후연은 각각의 상대인 서황과 태사자에게 무기를 크게 휘둘러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 틈을 타 퇴각했다. 그들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퇴각을 앞두고 경거망동을 할 수도 없다.

조인과 하후연을 불러들인 조조는 침통한 표정으로 아들인 조앙에게 명을 내렸다.

“조앙. 너는 군사들을 이끌고 앞쪽을 막아라. 나는 성문을 뚫겠다.”

조조의 명에 아직 어린 조앙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아버지.”

조조가 내린 명의 의미를 아직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아는데도 기꺼이 행하려는 것일까? 조앙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조조의 명대로 군사들을 이끌고 이의민군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 조앙을 보는 조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친아들이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가장 도움이 안 되면서도 가장 확실한 미끼는 그밖에 없었다.

확실히 조조의 결단은 빠른 시간 내에 효과를 발휘했다. 조앙이 이끄는 군사들은 크게 사기를 올리며 이의민군과 맞섰다. 물론 조앙이 대단해서 그런 건 아니다. 조앙은 아직 한참 어린 나이로 실질적으로 군사들을 제대로 이끌지도 못했다. 군사들의 사기가 올라간 건 조조의 친아들인 조앙이 직접 선두에서 군사를 이끌고 있으니 감동한 것이었다. 그들은 조조의 진정한 뜻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들은 설마 조조가 자신의 아들을 버리는 작전을 실행할 거라고 상상할 수 없을 터였다.

이의민군도 조앙에게 집중됐다.

“조앙이다! 조조의 아들, 조앙이 저기 있다!”

“잡아라! 조앙을 잡는 자는 큰 포상이 있을 것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조조의 친아들이었다. 모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수밖에 없다.

결국 조앙과 일부 군사들을 미끼로 내준 덕분에 조조의 본대에서는 퇴각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겨우겨우 개양성 성문을 뚫고 나가는 조조군.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 컸다.

이의민의 일격을 받아냈던 악진은 계속해서 피를 토하면서 가다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에 조조가 놀라 그를 불렀다.

“악진? 뭐하는 것인가?”

“주군. 먼저 가십시오. 소장이 반드시 공자님을 구해올 것입니다.”

“아, 아니 된다!”

“어차피 소장은 담현까지 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라도 주군께 쓰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악진은 스스로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계속해서 피를 토하고 있었는데, 토한 피에서는 내장 조각으로 보이는 듯한 살가죽도 섞여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시급히 의원을 불러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 어찌 그럴 여유가 있겠는가.

악진이 비장하게 돌아서고, 조조는 어떻게든 그를 막으려 했지만, 조인과 하후연 등이 조조를 억지로 잡아끌었다. 장수로서 군주에게 하면 안 되는 무례였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쩔 수 없었다.

간신히 조양성을 빠져나온 조조. 비통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끌고 왔던 5만의 대군 중 살아남은 군사는 고작해야 일만 기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아직 빠져 나오지 못한 군사들이 더 합류할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무엇보다 조조가 아끼던 악진도 이 자리에서 죽는 것이 기정사실이었고, 맏아들은 조앙 역시 생사를 몰랐다. 결국 슬픔을 이기지 못한 조조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머릿속에 한 사내가 떠올랐다.

“내가 어리석었다. 어찌하여 문약을 그리 대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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