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빛을 잃은 보석 (3)
조조는 흥분된 마음으로 개양성을 향해 진격을 하면서도 순욱의 얘기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정말 이것이 이의민의 계략이라면 크게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결국 조조는 순욱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지 못했다.
“전군! 잠시 진격을 멈춘다!”
이에 허유가 다가와서 또 난리를 쳤다.
“아만! 잘 나가다가 갑자기 뭐하는 건가? 적들이 눈치 채기 전에 어서 개양성을 함락시켜야 하네. 혹시 눈치 채고 회군이라도 한다면 기껏 다 잡은 서주를 놓칠 수도 있네.”
“나도 알고 있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마지막으로 진규에게 연통을 넣어보세. 진규의 답변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라면 그 즉시 진군할 것이고, 아니라면 문약의 말대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지 아니 하겠는가.”
허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만큼은 조조가 자신의 뜻을 받아들인 줄 알았는데, 결국 순욱의 뜻대로 가는 모양새였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허유지만 조조의 결심이 이 정도로 확고히 내려졌다면 그걸 바꿀 길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허 참! 마음대로 하게!”
“고작 전서 한번을 더 전하는 것이니 얼마 걸리지 아니할 게야.”
허유의 안하무인격인 행동에 조조의 수하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도저히 눈뜨고 봐줄 수가 없는데도 조조는 계속 넘어가고 있다.
조조는 진규에게 전할 서신을 전달할 첩자를 보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진규의 답신을 기다리는 조조. 얼마 지나지 않아 첩자가 돌아왔다.
“어찌 되었는가?”
“진규의 답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첩자는 진규의 답신을 전달했고, 조조는 바로 서신을 펼쳐봤다. 정확히 진규의 필체로 되어 있고, 그의 인장까지 찍혀있는 답신이었다.
“허허! 역시 괜한 기우였구나. 미안하네. 자원.”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는가?”
조조는 진규의 답신을 받아보고 나서야 이번만큼은 허유의 말이 옳다고 확신했다. 다시 개양성으로 진격을 재촉했다.
어느새 개양성 앞에 도착한 조조군은 성문 앞으로 나아갔다. 성벽 위에는 서주군인지 청주군인지 모를 군사들이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확실히 5만에 가까운 병력은 절대 아니었다. 대충 어림잡아 1만이 조금 넘는 정도밖에 안 보였다.
물론 당장 공성전을 치른다고 한다면 제법 오랫동안 시간이 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조조는 걱정 없었다. 진규의 마지막 답신에 따르면 그가 몰래 성문을 열 것이라고 했다.
즉, 조조군은 굳이 힘들게 성벽을 넘을 필요 없이 간단히 문을 열고 개양성을 접수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조조도 진규가 배신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조조는 진규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았다. 진규는 자신의 안위나 이익을 위해 도겸을 배신하고 조조에게 붙으려는 게 아니다. 오직 서주를 위한 결정이었다.
조조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배신하는 놈은 믿을 수 없다지만, 대의를 위해 배신하는 자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조군이 개양성 성문 앞으로 다가가니 약속대로 성문이 활짝 열렸다. 진규가 서신대로 한 것이다.
“어서 성문을 통과하라! 저기만 통과한다면 개양성은 우리 것이다!”
내부에서 진규를 따르는 군사들과 아닌 자들이 실랑이라도 벌이는지 성문이 계속 왔다 갔다 했다. 하지만 닫히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조조군은 먹잇감을 발견한 매처럼 순식간에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조조군이 성 안으로 들어왔다!”
서주군은 그제야 허둥지둥 대며 성벽에서 성 안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마 성 내부에서 수비진을 구축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조조군이 이미 안으로 들어온 이상 그들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갈 것으로 보였다. 고작해야 1만이 약간 넘는 병력으로 5만이 넘는 조조의 대군을 막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하하하하! 어떤가? 아만. 내 말대로만 하면 개양성을 쉽게 점령할 거라고 내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는가? 앞으로 내 말만 들으면 이런 승리가 계속 찾아올 걸세.”
너무도 손쉽게 승리를 가져오는 듯하자 조조의 수하들조차 깐죽대는 허유의 목소리가 듣기 좋은 것 같았다. 모두 신나게 개양성 안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런데 순간 조조의 표정이 굳었다.
전장에서 반드시 들려야 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바로 적군의 비명소리 말이다. 현재 이곳에서 들리는 소리는 오로지 조조군의 함성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성벽 위에서 우왕좌왕하는 적군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게 전혀 없었다. 다른 이들은 아직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아예 고요했다면 분명 많은 이들이 눈치를 챘겠지만, 아군의 함성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니, 이 사실을 느낀 이는 조조 밖에 없다.
“모두 조용하라!”
조조의 명령에 그제야 조조군은 전부 입을 닫았다. 그리고 그제야 조조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다. 전장 한가운데서 느껴지는 이 이질적인 고요함,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아뿔싸! 함정이다! 전부 신속히 빠져....!”
조조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고요한 성 안에서 갑자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피피핑!!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였다.
“크아악!”
선두에서 수십의 조조군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화살이 날아온 쪽을 보니 서주군인지 청주군인지 모를 군사 수십 명이 화살을 쏘고 있었다. 특히 선두에서 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화살을 쏘는 족족 조조군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활솜씨였다.
이에 지지 않겠다는 듯 하후연이 맞서 화살을 쏘았다. 하후연의 화살도 정확히 적군 대장을 향해 날아갔지만 너무도 가볍게 피해버렸다. 그런데 피하는 자세가 살짝 우스꽝스럽기도 한 것이 마치 조조군을 도발하는 듯했다.
조조의 종제인 조순은 그걸 보고 참지 못하고 칼을 뽑았다.
“내 저놈을 반드시 죽이리라!”
조순은 적 대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적 대장은 도망칠 생각도 않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조조는 그걸 보고 조순이 적 대장을 쉽게 제압할 거라 여겼다. 그 자는 다른 무기가 없고 활만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 대장은 조순이 다가올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화살을 하나 꺼내들었다. 하지만 조순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활시위를 메기기도 전에 조순의 칼에 쓰러질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적 대장은 화살을 시위에 메기는 대신 손으로 잡고 그대로 조순의 목을 향해 찔렀다. 조순은 칼을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모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아무리 조순이 형 조인에 비해 모자란다고 하나 무기도 없이 화살 하나만 든 상대에게 단 일합에 죽었다.
또 다시 친족의 죽음을 겪게 된 조조다. 그런 조조를 약 올리듯 적 대장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사해에 명성이 높은 조공을 이리 뵈어 영광이오. 나는 태사자라고 하오.”
그렇다. 그의 정체는 바로 태사자였다. 이의민 덕분에 더 높아진 궁술 실력으로 조조군의 혼을 뺐다.
조순의 죽음에 원통해 하지만 조조는 그래도 조조였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무리 봐도 지금은 적의 함정에 당한 것이었다.
“일단 퇴각하라! 성문을 다시 빠져나간다!”
들어왔을 때는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때는 결코 아니었다. 조조가 퇴각 명령을 내리자마자 성내의 건물에서 숨어있던 이의민군이 튀어나왔다.
“와아아아아!!”
“퇴로를 막아라!”
혹시나 적은 수의 서주군이 필살의 계책을 짜낸 것일 수도 있으리라는 조조의 기대가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지금 나온 이의민군의 숫자는 얼핏 봐도 아까 봤던 1만 조금 넘는 병력보다는 훨씬 많은 것 같았다. 이들은 청주군이 포함된 군사들이 틀림없었다.
“역시 이 모든 것이 함정이었구나!”
조조는 그제야 처음부터 이의민의 함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욱의 말을 듣지 않은 걸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조조군의 피해가 점점 커졌다. 사방에서 이의민군이 나와 공격을 이어갔고, 그걸 막느라 성문을 제대로 빠져나갈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성벽에 있던 이의민군 역시 어느새 내려와서 성문을 다시 닫으려 하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성문이 닫힌다면 조조군은 개양성 안에서 포위당해 전멸당할 위기였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개양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조조군이 지금은 빠져 나가기 위해 안달이다.
그래도 조조군은 역시 만만찮았다. 조조의 맹장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내가 앞장 설 것이다! 어떻게든 포위망을 뚫어라!”
가장 먼저 조조의 종제인 조인이 활약했다. 직접 선두로 나서며 수십의 군사들을 홀로 쓰러뜨렸다. 방금 전 태사자에게 일합에 쓰러졌던 조순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이었다.
특히 그의 통솔 능력이 탁월했다. 아직 병력 자체는 절대 밀릴 숫자가 아니라는 걸 빠르게 파악한 그는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숫자는 비등비등하다. 절대 우리가 불리하지 아니하니 정신만 차리면 된다!”
조인뿐만 아니다. 하후돈의 동생인 하후연 역시 무지막지한 신력을 뽐내면서 이의민군의 접근을 막았다. 둘의 활약을 중심으로 조조군도 똘똘 뭉쳤다. 조조의 동생인 조덕, 그리고 아들인 조앙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덕분에 조조군은 어느새 성문 바로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이제 성문을 막고, 닫으려 하는 이의민군만 돌파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희망을 가지고 정면을 확인한 조조. 그의 시선에 익숙한 남자가 대부를 들고 서 있었다.
“공명.... 그대인가?”
조조가 본 사내는 바로 서황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맹덕.”
전쟁터에서 적을 대한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깍듯한 인사였다. 그런 서황을 본 조조는 지난날의 인연을 들먹이면, 어쩌면 그가 성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입을 열었다.
“공명.... 그대가 지난날의 인연을 기억한다면....”
실제로 삼국지에서 조조는 이런 식으로 관우를 설득하고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서황은 관우가 아니다.
서황은 그저 옛 인연에 대한 예우로 인사를 한 것일 뿐이었다. 그 이상은 해줄 생각이 없다. 서황은 조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부를 들고 조조군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휘하 군사들을 향해 명까지 내렸다.
“다들 잘 들어라! 조조의 목을 가져오는 자는 금 백 냥과 장군직을 내릴 것이다!”
“고, 공명이 어찌 내게....!”
조조는 황당한 듯 외쳤지만,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지난 인연이고 뭐고 없이 달려드는 서황 앞에 조인이 나섰다.
“형님. 저 자는 소제가 상대하겠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날 운명이었나 보군. 서 장사. 아니. 이젠 서 장수라고 불러야 하나?”
일전에 병주 토벌전에서부터 인연이 있는 두 사람의 만남이다.
곧 서황의 대부와 조인의 창이 맞부딪혔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결이 펼쳐졌다. 둘 다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태행산에서 처음 만나 일기토를 펼칠 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조조는 점점 초조해졌다. 조인이 특별히 밀리는 건 아니었지만 이대로 시간이 끌리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결국 하후연까지 불렀다.
“묘재. 인이를 도와라.”
조조는 비겁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하후연까지 투입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부웅!!
마치 대붕이 날개 짓하는 듯 바람을 시원하게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가 들린 자리에 사뿐히 내려앉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인영의 손에는 방금 전 땅에 닿는 소리 하나 없이 사뿐히 착지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대부가 들려 있었다.
분명 서황과 같은 대부인데, 이상하게도 그 위압감이 서황의 대부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는 조조를 보며 씩 웃었다.
“오랜만이군. 맹덕.”
조조는 그 인물을 마주보며 이를 갈았다.
“이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