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빛을 잃은 보석 (2)
조조는 전령이 전해준 서신을 읽더니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번에도 허유는 눈치 없이 조조를 아만이라 부르며 가장 먼저 서신의 내용을 물었다.
“아만. 거기에 뭐라고 쓰여 있는가?”
조조는 서신을 모두에게 보여주면서 대답했다.
“이의민이 아직 청주 황건적을 다 처리하지 못한 모양이야. 즉, 자신들의 땅에 황건적들이 남아있는데도 무리하게 서주를 도우러 온 것이지. 그런데 청주에 황건적 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져서 이의민이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군. 물론 단 시간 내에 해결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갔다고는 하는데....”
허유도 서신을 자세히 읽더니 눈을 빛내면서 외쳤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이리 있을 때가 아니지 않은가? 지금 당장 군사들을 몰고 가 어서 빈 개양성을 치세. 그리고 그 기세를 타서 바로 청주까지 치는 것일세. 이의민과 황건적들이 서로 치고 박고 싸우며 서로 힘을 빼고, 우리가 바로 그 뒤를 치는 형국이네. 한마디로 어부지리라는 뜻이지. 성공하면 자네가 청주와 서주, 연주까지 3개주의 패자가 되는 것일세.”
가슴 벅찬 허유의 말에 조조의 가슴도 동시에 뜨거워졌다. 여태껏 수많은 세력가들이 있었지만 동시에 3개주를 차지한 제후는 아무도 없었다. 그걸 자신이 해낸다면 내로라하는 수많은 제후들을 제치고 선두로 우뚝 서는 일이었다. 동시에 남몰래 꿈꾸던 천하일통이라는 과업 역시 가시권에 들어온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조조의 가슴을 뛰게 만든 건 이의민을 당장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조조는 그간 다른 누구보다 이의민을 경계하고 두려워했다. 특히 연주의 바로 옆에 있는 청주에 자리를 잡았으니 항상 신경 쓰였다. 그런 이의민을 잡을 절호의 기회가 왔다. 조조로서는 꿈같은 얘기였다.
조조 말고도 다른 인물들 역시 허유를 싫어했지만, 이번 얘기만큼은 동의하는 모습들이다. 모두 주먹을 불끈 쥐며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그때 옥으로 끌려가던 순욱이 크게 외쳤다.
“주군! 너무 섣부른 결정이십니다. 적들의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이가 얘기했다면 흘려들었을 조조다. 하지만 순욱이 한 얘기인 만큼 흘려들을 수가 없다.
“잠깐! 연행을 멈춰라. 문약.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의민은 몰라도 그의 곁에 있는 인재들 중 순유와 같은 두뇌가 비상한 인물들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청주를 정리도 하지 아니 하고 이곳에 섣부르게 내려왔다니,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과연 그 천재들이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 어찌 하자는 말인가?”
“진규에게 서신을 보내 한번 더 확인을 해보시지요. 혹시라도 재확인 후에도 진규의 보고가 맞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때 개양성을 공격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불확실하다면 절대 가시면 아니 됩니다. 주군께서는 계속 이곳에서 대치만 하시다가 적들의 움직임을 확인하셔야 될 겁니다. 만약 그리하지 아니 하시고 섣불리 움직이셨다가 적들의 함정이라면 어찌 하실 겁니까?”
조조는 순욱의 얘기를 듣고 심기가 불편해졌다. 방금 전까지 3주를 재패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그걸 깨버린 셈이다.
물론 순욱이 확답을 내놓았다면 불쾌한 기분을 저 멀리 밀어내고 받아들였을 터다. 그런데 지금 순욱이 하는 것도 적들이 함정을 팠다고 확신하는 것이 아닌 그저 추측일 뿐이다.
이런 조조의 심경을 허유가 눈치 채고 재빨리 끼어들었다.
“비록 문약의 말대로 이의민이 청주 황건을 빨리 잡진 못했으나, 어찌됐든 그가 청주 황건을 놔두고 내려올 것이란 걸 예측 못했네. 그런데 이번 예측은 어찌 맞으리라 장담하는가? 만약 자네가 또 틀린 예측을 내놓았다면 우리의 발목을 또 잡는 셈일세.”
허유는 이번 기회에 순욱을 완전히 제거할 심산이었다. 순욱은 그런 허유의 속셈이 뻔히 보였다.
“자원. 시기심 때문에 대사를 그르치지 마시오.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상황을 판단해야하오. 주군. 벌을 받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 받겠습니다. 다만 지금 개양성을 치시려는 결정은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너무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조조는 이미 아끼는 가족을 잃은 분노와 3주에 대한 야망으로 눈이 돌아가 버렸다. 순욱의 말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미안하네. 문약. 내 이번은 아무래도 자원의 말을 따라야겠군. 우리가 갔다 올 동안 옥에서 잠깐 머리를 식히고 있게.”
“아니 됩니다! 주군!”
순욱은 피를 토하며 조조를 만류했다. 하지만 조조는 그대로 냉정하게 돌아섰고, 군사들이 발버둥치는 순욱을 그대로 옥에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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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양성의 진규와 진등 부자는 이의민이 떠난 날 이후부터 성벽 위에 올라가서는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누군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그런 그들의 바람을 이뤄주기라도 하듯 저 멀리 지평선에서 먼지를 휘날리며 개양성으로 다가오는 한 무리의 군사들이 있었다. 그걸 보는 진규는 표정이 처음에는 밝았다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진규는 지금 오는 군사들이 조조의 군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담현이 이곳과 가깝다 해도 비정상적으로 빨리 오는 것이었다.
‘뭐지? 그럼 이 군사들은....?’
그리고 그 군사들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즈음에는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런 진규와 진등과는 달리 성벽 위 군사들은 기쁘다는 듯 소리치고 있다.
“주군께서 돌아오셨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청주의 황건적들을 정리하기 위해 떠났던 이의민이 다시 돌아왔다.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았으니 청주엔 가지도 않고 그냥 온 셈이었다.
“주, 주군? 어찌 이리 일찍 돌아오셨습니까?”
“아! 청주로 가고 있었는데, 순유에게서 바로 전갈이 또 오지 않겠는가. 급한 상황은 넘겼으니 올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
서주의 구신들은 모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대규모 군을 움직이는 걸 이리 마구잡이로 한단 말인가. 그래도 어쨌든 대다수는 이의민이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 크게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혹시라도 그가 없는 동안 조조가 쳐들어오지 않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주군.”
“잘 오셨습니다.”
이의민이 모두의 인사를 받으며 성 안으로 들어가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흠! 그런데 말이야....”
이의민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 모습에 모두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모두가 이렇게 나를 반기는데... 몇몇은 그렇지 않나보군?”
이의민의 얘기에 미축은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모두 주군이 다시 오셔서 기쁩니다. 허나 워낙 갑작스럽게 오신 거라 놀라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야... 그렇지가 않아.”
이의민은 서주의 구신들 한명 한명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모두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이의민의 시선을 마주했지만, 그래도 대부분 반가운 표정이 남아있다.
그러던 중 이의민의 시선이 멈췄다. 바로 진규와 진등 부자에게서 말이다.
“진규... 진등... 자네들은 내가 온 것이 반갑지 아니한가 보군.”
“예?! 아, 아닙니다. 저희들이 언제....?”
“아니야. 난 알 수 있어. 수하들이 정말 내게 충성을 하는지 아닌지. 다른 이들은 그래도 내가 온 것에 대해 반갑거나 다행이라는 표정인데, 너희들은 아니군. 내가 온 것에 대해 명백히 잘못되었다는 표정이야.”
이의민의 말에 진등은 사색이 됐다. 하지만 진규는 이왕 이리 된 거 좀 더 뻔뻔하게 나가자는 심산이다.
“주군!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억측이십니다. 저희들을 처벌하셔도 좋습니다. 허나 단순 표정만으로 일을 처리하신다면 주군이야 말로 일을 감정적으로 처리하시는 군주가 되시는 겁니다.”
“그래? 좋다! 데려와라!”
진규는 이의민이 표정만 문제를 삼으며 자신과 아들을 몰아붙이는 것을 보고 심증만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의민은 단순 심증만으로 진규와 진등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의민의 명에 의해 만총이 한 사내를 데려왔다. 그를 본 진규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병사 중 하나였다. 진규는 같은 고향출신의 그 병사가 절대 배신을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병사도 이의민과 함께 싸우며 전우애, 그리고 승리의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군사들을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아량까지 확인하며 완전히 이의민에게 반한 상태였다. 군사들 모두 이의민에게 진심으로 탄복하고 충성하게 됐다는 사실을 놓친 진규다.
“네가 직접 말해보아라.”
“진규가 직접 소인에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조조의 첩자들과 접촉하여 서신을 전달하라고 말입니다. 이 서신이 그 증거입니다.”
병사가 내민 서신에 진규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서신의 필체 역시 진규의 필체 그대로였다.
진규가 배신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던 미방은 그 자리에서 분개했다.
“이 미친 늙은이가! 네놈이 바른 말을 하고도 옥에 갇혔다 생각했거늘, 알고 보니 진짜 배신자였구나!”
다른 구신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까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진규와 진등을 욕했다.
진등은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해보고자 변명을 하려 했지만, 증거까지 다 나온 마당에 목소리에 힘이 없다.
“이, 이것은 모함입니다....”
이제는 단순 표정을 트집 잡는 게 아니라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나왔으니 더는 발뺌 할 수가 없는 진규. 갑자기 크게 웃는다.
“크하하하하하하!!”
미친놈처럼 한참을 웃던 그는 결국 모든 것을 시인했다.
“등아. 다 끝났다... 더 비참해지지는 말자꾸나. 주군. 아니. 대사농의 말이 모두 맞소.”
“한유 선생. 선생이 배신할 사람은 아니잖소? 대체 왜 그랬소?”
진규가 배신자라는 사실을 끝까지 믿지 않았던 미축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물었다.
“다 서주를 위해서였네. 도겸은 절대 조조를 이길 수 없네. 그렇다고 항복도 할 생각도 없었지. 도겸의 자존심 때문에 피해는 서주의 백성들이 받는 것을 도저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가 없었네. 난 그들을 지키고 싶었다네. 그들을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조조가 이 땅을 다스리는 게 낫다고 생각해 그리했네.”
변명 아닌 변명을 내뱉은 진규는 이의민을 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대사농이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아니지. 의미 없는 가정이 무슨 소용이오. 자! 모든 걸 다 털어놓았소. 어서 처단하시오.”
“저들을 옥에 가두라.”
그런데 이의민은 그들을 그 자리에서 처단하지 않았다. 미축은 울면서도 왜 진규 부자를 이 자리에서 처단하지 않는지 의아했다.
“크흑! 주군... 저들은 어찌됐든 배신자입니다. 본보기로 죽이셔야 합니다.”
“당연히 죽일 생각이다. 배신자를 살려둘 만큼 내가 아량이 크진 않으니 말이다. 다만 저놈들에게 확실히 알려주고 싶다. 진규. 서주의 백성들을 위해 조조에게 문을 열어주겠다고 했나? 옥안에서 지켜봐라. 네 선택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 말이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진규. 그가 서주를 위해 배신을 했다는 것은 진심이었다. 이렇게 된 거 자신이 틀렸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