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빛을 잃은 보석 (1)
이의민은 조홍을 쓰러뜨린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퇴각하고 있는 이전의 군사들까지 모조리 쓰러뜨릴 기세다.
“적들을 도망치게 두지 마라!”
굳이 이의민이 명을 내리지 않아도 군사들은 자발적으로 조조군을 쫓았다. 특히 원래 서주군이었던 이들이 가진 증오는 매우 컸다. 여태껏 당하고만 있었으니 그 울분이 얼마나 크겠나. 이제는 여태까지 쌓아왔던 울분을 모두 풀겠다는 듯 질릴 정도로 끈질기게 조조군을 추격했다.
그래도 이전과 그를 따르는 조조군 역시 만만찮았다. 이의민이 조홍, 그리고 그 휘하 조조군과 싸우는 동안 이미 멀찍이 거리를 벌렸다.
그래도 어느새 근처까지 따라온 이의민의 군사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처음 보였던 우왕좌왕 하던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연주에서부터 이어져 왔던 조조군의 승전 감각이 다시 살아난 덕분인지, 조금 전과는 달리 확실하게 적들의 추격을 뿌리치고 있는 모습이다.
또한 이들을 이끌고 있는 이전의 통솔 능력 역시 그 빛을 발했다.
“적들이 붙었다고 해서 무작정 뒤돌아서 도망치지 마라! 끝까지 대열을 사수하고 동료들과 함께 퇴각한다!”
혹시라도 추격하는 적과 교전이 발생할 경우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최선의 지시를 내렸다.
“병장기를 제외한 무게가 나가는 것들은 최대한 버려라! 특히 가지고 있는 식량은 미련 없이 버린다!”
군량과 각종 보급품까지 버리라는 지시 덕분에 조조군의 퇴각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역시 조조군은 제대로 퇴각도 못하고 쓰러진 백파적이나 흑산적, 청주 황건적들과는 차원이 다른 저력을 보이는 중이다. 물론 그 저력이 퇴각할 때가 되어서야 나왔지만 말이다.
결국 이전과 그를 따르는 조조군은 병력을 상당수 보존하여 퇴각할 수 있었다. 서주군은 악에 받혀 지옥 끝까지라도 추격할 기세였다. 하지만 정말 그리하도록 놔둘 수는 없기에 이의민이 명을 내렸다.
“멈춰라! 추격을 중지한다! 이쯤하고 개양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조조군을 추격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 같았던 서주군은 이의민의 명 한마디에 귀신 같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만큼 그들은 이의민을 크게 의지하고 있다.
이의민과 군사들이 다시 개양성에 돌아왔다. 성을 빠져나갈 때와 들어올 때의 기세가 완전히 달랐다. 여기에 이의민에 대한 시선 또한 완전히 바뀌었다.
구 서주군과 구신들까지 모두 이의민만 바라보고 있었다. 만총이 임치성에서 보았던 모습이 이곳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이의민은 자신만을 의지하는 시선들을 둘러보더니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어제까지 썩은 동태눈깔이더니, 이제야 눈빛들이 좀 마음에 드는군. 다들 고생했다! 푹 쉬어라!”
“와아아아아!!”
별 것도 아닌 얘기에 모든 군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의민도 그 모습을 만족스러운 듯 바라보더니 당근을 하나 더 내밀었다.
“아까 추격할 때 보니 적들이 식량을 다 버리고 갔더군. 거기에 고기도 충분히 많던데?”
이의민이 한 질문의 의도를 눈치 챈 곽가가 재빠르게 답했다.
“예. 그들이 버리고 간 것들을 모두 회수했습니다. 주군의 말씀대로 고기도 제법 있었는데... 이 많은 군사들을 모두 먹이기에는 조금 부족합니다.”
“부족하다.... 그럼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고기까지 합치면 어찌 되나?”
“그럼 충분할 겁니다. 그런데 그럼 장수들에게 앞으로 배급할 고기가....”
“그냥 풀어. 잔치를 하는데 누구는 고기를 먹고 누구는 먹지 못한다면 흥이 나겠는가. 그리고 앞으로 배급할 고기야 조조군을 한번 더 치면 금방 보충될 것이다.”
“예. 주군.”
이의민의 결정에 군사들은 다시 한번 환호성을 내질렀다.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게 된 장수들도 전혀 불만이 없었다. 다른 이가 이의민처럼 공약을 했었다면 다들 믿지 못하고 불만을 가졌을 터였다. 하지만 다른 이가 아닌 이의민이 한 공약이었다. 무조건 이의민의 말대로 될 것이라고 추호도 의심치 않고 있다.
결국 이의민의 명으로 개양성에서 승전 잔치가 벌어졌다.
서주의 구신들 모두 이의민에게 다가와 진정한 충성을 맹세했다.
“주군!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까 성을 나가기 직전까지만 해도 주군을 믿지 못했습니다. 못난 속하에게 벌을 내려주십시오.”
“됐어.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이제부터라도 잘 하면 되는 거지.”
“감사합니다. 이제 이 조표, 주군이 가시는 길이라면 불구덩이도 뛰어들겠습니다.”
도겸의 유언에 의해 마지못해 따르는 모습은 이제 없다. 호칭 역시 대사농에서 주군으로 바뀌었다.
이의민과 원래 그의 수하였던 이들 역시 이 분위기에 편승하여 즐겁게 술을 마셨다. 그들도 서주의 구신들과 함께 술잔을 교환하며 친분을 다졌다. 그러던 중 곽가는 만총과 은밀한 눈빛을 교환했다. 곽가는 그 직후 은근슬쩍 진규 부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하하. 다른 분들께는 술을 따라드렸지만 아직 한유 선생께 술을 따라드리지 못했군요. 지금이라도 제가 술을 한잔 따라드리지요.”
너무도 자연스럽게 진규에게 술을 권하는 곽가. 진규도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곽가가 내미는 술잔을 받았다.
“허허. 고맙소. 이번 전투에서 봉효 선생의 활약이 대단하더이다.”
“과찬이십니다. 듣자하니 전 자사이신 도겸이 한유 선생의 말만 들었더라도 우리가 굳이 올 필요도 없었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하! 전 주군에 대한 험담이 될 것 같아서 말을 아끼고 싶소이다만.... 어쨌든 우리가 이 개양성까지 몰리지 않을 정도의 기회가 분명 있긴 했소.”
곽가는 적당히 진규를 띄워주며 좋은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만총이 다급히 곽가에게 다가왔다.
“곽 군사. 큰일입니다.”
“백녕? 무슨 일이오? 이 좋은 날에 무슨 큰일이....?”
“청주에서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아무래도 순 군사 혼자서 청주 황건을 상대하기가 너무 힘이 드는 것 같습니다.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합니다.”
만총이 곽가에게 보고를 하는 걸 보면서 진규는 순간 눈을 빛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곽가에게 물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오? 내 듣기로는 청주의 일은 전부 정리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이오?”
진규의 질문에 곽가는 어두운 낯빛을 띄며 대답했다.
“사실 아닙니다. 그 지독한 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벌써 정리를 했겠습니까? 그래도 한번 크게 패퇴시킨 덕분에 이제 여유가 생겼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금세 다시 문제가 될 줄은 우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 그랬군요. 그런 상황에서도 대사농께서는 우릴 도우러 오셨다니.... 참으로 감읍하지 아니 할 수가 없소.”
“아무튼 이 좋은 분위기에서 흥을 깨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저희도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아무래도 청주군을 다시 귀환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심각한 곽가의 말에 진규는 괜찮다는 듯 얘기했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소이까? 어차피 조조군도 큰 대패를 한 직후고, 우리가 군사들의 공백을 잘 숨긴다면 섣불리 공격을 하지 못할 것이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다행입니다. 그럼 이곳은 걱정하지 아니 하고 최대한 빨리 청주를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백녕. 바로 주군께 보고를 하고 군사들을 청주로 귀환시켜야 되겠소.”
“예. 곽 군사.”
결국 만총의 보고가 이의민의 귀에 까지 들어가게 됐다. 이의민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군사를 출병시켰다.
구신들 대부분 크게 걱정하는 가운데 진규의 아들인 진등이 이의민 앞으로 나왔다.
“무슨 일인가? 내가 떠나는 것이 그리 걱정이 되는가?”
“아닙니다. 단지 주군께 이곳은 걱정 마시고 청주에 다녀오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흠. 그리 받아들여주니 고맙군. 어쨌든 자네 부자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구나. 금방 다녀올 테니 다들 잘 기다려라.”
이의민은 기특하단 듯 진등의 어깨를 두드렸다. 진규와 진등은 그런 이의민을 보며 남모를 미소를 지었다. 진규 부자는 자신들이 몰래 지은 이 미소를 아무도 못 봤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을 향한 수많은 눈동자가 있다는 것을.
**
담현에서 주둔하고 있던 조조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에 부들부들 떨었다.
“말도 아니 된다. 정녕 홍이와... 원양이 죽었다는 말인가? 이의민 그놈에게....?”
조조의 분노가 사방으로 전해졌다.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순욱은 그 앞에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주군....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설마 그들이 그리 빨리 황건을 정리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전부 제 능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평소라면 순욱을 두둔했을 조조도 지금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하후돈과 조홍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찌 둘 다 죽었다는 말인가... 바보같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살아서 와야 할 것 아닌가....”
“주군.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군사로서 잘못된 판단으로 주군의 혈육을 잃게 했습니다.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순욱의 말에도 대꾸를 않던 조조가 드디어 대답했다.
“아닐세... 나 역시도 그리 판단했고, 결국 결정을 내린 건 나일세. 문약의 잘못이 아니네.”
조조는 순욱의 잘못을 조용히 덥고 넘어가려고 했다. 하후돈과 조홍의 죽음은 사무치도록 슬프지만, 조조는 그걸 엄한데다가 화풀이를 할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조조의 결정에 강하게 반발하는 이가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아만! 자네라면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았건만!”
조조에게 아만이라 부르며 소리친 자는 허유였다. 원소, 조조와 오랜 친구사이인 그는 원 삼국지였다면 원소를 따라 기주에 있었겠지만, 원소가 낙양의 논공행상에서 크게 망신을 당했다는 것을 듣고 미련 없이 낙향해 조조를 따르는 중이다.
허유는 순욱이 눈엣가시였다. 자신이라면 조조를 도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순욱의 재주는 매번 그를 뛰어넘으면서 조조 휘하의 2인자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허유도 그런 순욱을 제치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허유가 의견을 내도 조조가 채택하는 것은 언제나 순욱의 의견이었다. 허유로서는 자존심이 크게 상할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순욱에 대한 반감은 더 커졌다.
“아만. 이 자를 벌하지 않는다면 자네가 지금껏 쌓았던 군의 기강 바로 무너지는 것일세.”
허유의 말에 순욱은 조용히 눈을 감았고, 조조의 다른 수하들은 죽일듯한 눈빛으로 허유를 노려보았다.
허유가 지금 틀린 얘기를 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조조의 다른 수하들 중 순욱을 감싸는 이들도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 처벌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허유의 말처럼 기강이 중요하니까.
그런데 문제는 허유의 태도다. 아무리 어릴 적 친구 사이라고 해도 여기는 엄연히 공적인 자리였다. 조조에게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는다면서 정작 허유 자신은 사석에서 부르듯 ‘아만’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으니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가.
거기다가 허유의 이런 태도는 비단 오늘 일만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고, 다른 이들도 문제를 제기 했지만 조조는 그냥 웃어넘겼기에 모두 속으로만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허유의 태도는 다른 문제다. 지금 이 자리는 순욱의 처벌을 결정할 자리였다.
“자원의 말이 맞습니다. 주군. 벌을 받겠습니다.”
고민하던 조조도 결심을 내렸다. 그도 허유가 순욱을 싫어하는 건 알지만, 어찌됐든 허유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문약. 잠시 머리를 식히고 오게.”
순욱이 군사들에게 끌려 옥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전령이 다급하게 뛰어왔다.
“개양의 진규가 보낸 급서입니다. 시급을 요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