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새로운 전쟁의 시작 (2)
이의민이 도겸의 방을 나간 이후에도 서주의 구신들은 방을 떠나지 않았다. 도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들끼리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조표가 울먹거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주군께서 이리 돌아가시다니... 우린 어쩌면 좋습니까?”
이에 미축 역시 슬프지만 단호한 음성을 대답했다.
“어쩌긴요. 당연히 주군의 유지를 따라야 할 것 아닙니까. 그것이 신하된 자의 도리이지요.”
미축의 대답에 일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조표를 비롯한 일부는 거칠게 반발했다.
“그럼 정녕 이의민, 그자의 수하가 되자는 말입니까?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외부인이 아닙니까. 왜 우리가 힘들게 일군 것을 고스란히 남에게 갖다 바쳐야 합니까. 주군께서 그리 말씀은 하셨다지만, 돌아가시기 직전 온전한 정신으로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주군의 장성한 아드님도 있으시고.... 차라리 자중을 따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아드님들은 벼슬길에 뜻이 없고, 나 역시 군주가 될 그릇이 전혀 못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저들을 내쳤다간 우리가 조조를 어찌 막겠습니까?”
“당연히 그들을 내치자는 게 아닙니다. 주군의 말씀대로 하는 척하면서, 조조를 몰아내는 데만 적당히 이용하면 되지 않습니까?”
조표의 말에 미축은 상당히 화가 난 듯 그를 나무랐다.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외다. 대사농을 그리 쉽게 속을 수 있을 것 같소? 그리고 만약 우리가 속였다는 걸 그가 알게 되면 과연 어찌 될 거 같소? 서주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고 말 것이오.”
미축의 열변에 진규가 나섰다.
“자중. 그래서 결국 주군의 유언대로 할 건가?”
“그렇습니다. 한유선생. 어차피 우리 스스로는 조조를 상대로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만으로 싸운다면 이대로 멸망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주군의 유지를 떠나 결국 조조냐 이의민이냐 원술이냐를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지요. 주군의 원수인 조조를 따르는 것은 정말 말도 아니 된다고 치면, 원술 또는 이의민 둘 중 하나를 따라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리 어려울 때 모른 척 한 원술보다 우리를 도우러 온 이의민을 따르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막힘없는 미축의 말에 반대를 했었던 조표마저 수긍했다. 확실히 미축의 의견이 제일 타당해보였다. 미축의 말대로 이제 서주는 스스로 살아남는 게 불가능하다. 누구에게든 붙어야 했는데, 다른 누구보다 이의민이 가장 나아보였다.
“자중의 뜻을 이제 이해했습니다.”
“알았다니 다행입니다. 주군의 유지대로, 상은 전쟁이 끝난 후 치를 것입니다. 그때까지 대사농을 도와 서주를 침범한 조조와 싸울 것이니 모두 협조해주십시오.”
그렇게 도겸의 구신들은 뜻을 하나로 모았다. 그런데 유독 두 명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바로 진규와 그의 아들인 진등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는 못했지만, 둘은 아까부터 눈빛을 교환하면서 불편한 심정을 숨기고 있었다.
결국 둘은 도겸의 방을 나오고 나서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아, 아버지... 이제 어찌 합니까? 이리 되면 우리 계획이 틀어질 것입니다.”
“침착 하거라. 아직 저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 우리는 처음 계획대로 밀고 나갈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전부 이대로 이의민을 따르겠다고 한다면....”
“됐다. 이의민이 변수가 되었지만,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진규는 아들인 진등을 애써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도 속으로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의민의 등장으로 인해 모든 것이 틀어졌다.
‘빌어먹을 도겸.... 그 망할 놈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도움이 아니 되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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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민은 개양성의 성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청주군의 등장으로 잠깐 후퇴했던 조조군은 어느새 다시 개양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다.
조조군은 대략 4만 정도로 보였다. 현재 청주군도 4만이니 굳이 서주군처럼 개양성 안에 틀어박혀 수성만 할 필요는 없다. 이의민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성문을 열고 나가 전투를 치를 준비를 했다.
“다들 전투준비를 하라! 두 시진 뒤 성문을 열고 나갈 것이다.”
이에 이의민을 따르기로 결심을 내린 미축과 그와 뜻을 함께 하는 서주의 구신들이 다가왔다.
“대사농. 우리가 굳이 먼저 공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서주 군사들의 사기는 이미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에다가 갑자기 합류한 청주군으로 인해 혼란스런 상태입니다.”
미축은 말을 하면서도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 너무 염치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미축은 이의민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이의민 입장에서는 앞으로 전투에 청주군을 앞세우는 것보다 서주군을 앞세울 터였다.
그런데 서주군의 상태는 너무 심각했다. 조조군과의 전투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 군사들은 모두 희망이 없는 표정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고, 그저 오늘은 죽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뿐인 서주군이었다.
이의민은 미축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명을 내렸다.
“적을 두려워만 해서는 절대로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서주군이 선봉에 설 것이다!”
‘역시 그렇구나. 하긴 이게 당연한 것을...’
자신의 예상대로 서주군을 앞세우겠다는 이의민의 말에 미축이 섭섭한 마음을 애써 감추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그의 귀가 번쩍 뜨일 만한 말을 들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선봉에 설 것이다.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하라.”
설마 이의민이 청주군도 아닌 서주군을 이끌고 선봉에 서겠다고 말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미축은 살짝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자신들을 버리는 패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문을 먼저 열고 나가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미축은 다시 한번 이의민에게 조언했다. 이번에는 서주군을 위한 조언이 아닌 이의민을 위한 조언이다.
“대사농. 적진에는 하후돈과 조홍이라는 용맹한 장수가 있습니다. 가히 일당백이라 불릴 만한 무적의 장수들입니다. 그들 손에 우리 장수들이 몇 명이나 죽었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물론 병력적으로 밀리지 않는다고 하나 굳이 수성의 이점을 포기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의민에게는 콧방귀도 나오지 않을 조언이었다. 이의민이 상대가 누구든 간에 겁을 먹을 인물인가.
“하후돈인가 조홍인가 하는 놈이 무서우니 지금 나보고 피하라는 말인가? 웃기는 군. 나에 대한 소문도 들어보지 못했느냐?”
미축은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자 옆에 있던 곽가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그래도 곽가가 문사로 보이니 자신의 말을 알아듣고 이의민을 말려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미축의 기대는 산산이 깨졌다. 오히려 곽가는 미축이 내놓은 주장의 허점을 짚었다.
“서주의 별가종사께서는 수성의 이점을 주장하시는데, 그건 한 면만 보신 겁니다. 수성을 하는 건 적은 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지만, 비슷하거나 더 강한 전력으로는 수성이 오히려 비효율적입니다. 게다가 지금 적들을 자세히 보니 조조가 이곳에 없는 것 같더군요.”
미축은 날카로운 관찰력을 보여주는 곽가에게 놀랐다.
“그걸 어찌.... 맞습니다. 조조는 이곳에서는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해, 치소가 있는 담현으로 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담현은 이곳 개양성의 바로 아래에 위치한 곳이라 언제든 합류가 가능합니다.”
“어쨌든 바로 아래에 있다 하더라도 합류하려면 시간이 조금이라도 걸릴 것입니다. 오히려 하후돈 쪽에서 먼저 본대와 합류하려 들 수도 있는 만큼, 그 전에 먼저 공격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여전히 불안한 미축. 이의민으로서는 당연히 곽가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미축에 대한 첫인상이 좋았지만, 그래도 곽가랑 비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 답이 나왔군. 성 밖으로 나가 적들을 요격할 것이다. 자중이라 했나? 도 자사에게 서주를 선물 받은 기념으로 이번에는 내가 자네들에게 선물을 주지. 승리했을 때의 그 짜릿함과 쾌감, 그것을 느끼게 해주겠다.”
미축은 멍한 표정으로 이의민을 쳐다봤다. 이미 승리한 것처럼 자신감을 보이는 이의민을 아직 믿기 힘든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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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군을 이끌고 있는 하후돈과 조홍도 개양성에 나오는 이의민과 휘하 군사들을 보고 있었다. 이에 하후돈은 당장이라도 그들과 맞붙으려 전의를 불태웠다. 반면 조홍은 그런 하후돈을 만류했다.
“형님. 적군의 병력이 결코 우리보다 적지 않습니다. 적의 원군과 서주군이 합치면 현재 우리보다 많습니다. 지금 싸우지 말고 맹덕 형님의 본대와 합류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조조군을 이끄는 총대장은 하후돈이었다. 그는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는 여태 그 어떤 전투에서도 패한 적이 없었다. 적들의 원군이 왔다고 달라질 것 같은가? 우리 군은 그 어떤 적들도 물리칠 수 있다.”
결국 하후돈은 조홍의 조언을 무시하고 적군을 상대하기 위해 개양성 성문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조조군의 하후돈이라고 한다! 여태껏 서주의 많은 이들이 나를 막으려 나왔지만, 그들 모두 저세상으로 떠났다. 너희들은 과연 나를 막을 수 있겠느냐?!”
하후돈은 원군 역시 기존의 서주군과 별로 다를 바 없을 거라 믿고, 자신 있게 나섰다. 상대가 이의민이라는 걸 아직 모르고 있는 만큼 그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물론 설사 알았다고 하더라도 하후돈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니 결코 물러서지 않았을 테지만.
그런 하후돈 앞으로 이의민이 한혈마를 타고 나아갔다. 하후돈은 이의민이 타고 있는 한혈마를 보더니 입맛을 다셨다.
“호오! 네놈. 제법 좋은 말을 타고 있구나. 네놈을 쓰러뜨리고 네 말을 차지해야겠다.”
이의민은 그런 하후돈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의민도 하후돈을 처음 대면하고 있지만, 지금 창을 들고 서 있는 자세만 봐도 대충 견적이 나왔다.
“흐흐흐! 그 동안 피라미들만 상대해서 그런지 패기 하나는 대단하구나. 허나 잘 알아둬라. 난 네놈이 그간 상대했던 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하후돈은 이의민의 말을 그저 허세라고만 생각했다. 무인들이 자신의 실력을 과신해서 허세를 부리는 건 흔한 일이니까 말이다.
‘저런 엉성한 자세로 허풍은... 명마만 믿고 까부는 놈이로구나.’
싸우기도 전에 이미 승리에 도취된 하후돈. 상대가 누군지 제대로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이의민을 향해 달려가며 창을 뻗었다. 그에 뒤질세라 이의민 역시 무서운 기세로 하후돈을 향해 돌격해 들어가며 대부를 휘둘렀다.
순식간에 서로가 서로를 지나쳐갔다. 하후돈은 그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뭐지....? 왜 갑자기 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 것인가? 조홍? 난 뒤돌아본 적이 없는데 왜 홍이의 얼굴이 보이는가....’
둘이 서로를 지나쳤을 때 이미 승부가 끝이 났다. 단지 하후돈은 그걸 느끼지도 못할 뿐이었다. 이의민은 하후돈을 확인도 하지 않고 대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는 한혈마를 타고 유유히 다시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왔다.
따라 나온 미축은 입을 벌린 채 전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의민은 그런 미축 옆을 지나면서 나지막이 얘기했다.
“아까 네가 말한 그 하후돈이란 놈이 저놈이냐? 일당백이 뭐 어떻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