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급변하는 정세 (4)
청주 임치성. 이곳에서도 북해성의 승전보를 접했다. 그리고 순유가 보낸 전갈을 통해 이의민이 곧 서주로 갈 거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안 그래도 바쁜 임치성은 이의민이 서주로 출정하는 일 때문에 더 바빠졌다. 특히 군사들의 훈련을 담당하고 있는 서황은 눈코 뜰 새도 없다.
“거기! 똑바로 창을 들지 않고 뭣 하느냐? 그딴 식으로 창을 들고 있다가는 한번 찔러보지도 못하고 쓰러질 거다. 거기! 방패 사이로 틈이 벌어져 있잖느냐. 그 사이로 창이나 화살이 들어가면 넌 바로 죽은 목숨이다.”
군사들의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강도 높은 훈련이었다. 하지만 서황은 강도를 낮출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평시라면 적당히 군사들의 편의를 봐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의민이 임치성으로 돌아오는 즉시 전장으로 투입 돼야 했기 때문이다.
“자!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다. 주군께서 오시면 우린 곧바로 출정할 것이니, 모두 준비에 있어 조금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엄청난 훈련 양에도 서황은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군사들이 탈진할 때까지 훈련을 시킬 수 없기에 이쯤에서 마무리했다.
대신 본인은 쉬지 않고 대부를 휘두르며 개인훈련을 계속했다. 서황 혼자 연무장에 남아 훈련을 하는데 누군가가 슬쩍 다가왔다.
서황은 인기척이 들리자 바로 돌아서서 불청객을 확인했다. 그런데 불청객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서황은 굳은 표정을 풀고 반갑다는 미소를 지었다.
“왔는가? 백녕.”
서황이 백녕이라고 부른 사내, 바로 만총이다. 서황이 얼마 전 이의민에게 데리고 온다고 했던 친구가 그다.
서황이 만총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순유와 마찬가지로 서황도 자신의 친우인 만총과 함께 같은 주인을 모시고 싶은 마음이었다. 물론 만총은 아직까지 확답을 내린 상태는 아니었다.
“훈련이 끝난 지 제법 되었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니 오길래 와 봤더니 혼자 이러고 있군.”
“개인훈련도 결코 게을리 할 수 없지. 한데 자네도 같이 훈련에 참관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후훗. 난 자네의 객일 뿐, 아직 임관도 하지 않은 몸일세. 그런 내가 함부로 훈련을 참관해서야 되겠나.”
“원칙적으로는 그렇긴 하네만....”
서황은 아쉬움에 한숨을 쉬었다. 만총이 친구라서 사사로운 감정으로 데리고 올 생각은 결코 아니었다. 훈련 때의 기강을 잡고, 긴장된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만총만 한 인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쉬워 할 뿐이다.
“어쨌든 자네 생각은 어떤가? 우리 주군을 따르겠는가?”
“물론 자네가 틀린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허나 나도 사람을 직접 봐야 결정을 할 게 아닌가.”
“그렇지. 내가 너무 성급했네. 곧 주군께서 돌아오신다고 하니 그때 뵙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서황과 만총이 한창 이의민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을 무렵, 이의민이 드디어 임치성으로 돌아왔다는 전갈을 받았다.
“하하! 주군이 마치 우리의 얘기를 들으신 것 같구먼. 어서 나가서 같이 주군을 뵈러 가세나.”
“허허. 이 사람. 주군이 그리도 좋은가. 마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라니....”
만총은 서황이 기가 막히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그런데 자신도 얼마 후 같은 모습이 될 거라는 건 상상도 못하고 있다.
서황과 만총뿐만 아니라 임치성의 대부분의 관리들이 이의민을 마중하러 나갔다. 당연히 곽가도 거기에 있었다.
“주군! 돌아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 주군!”
“주군!”
만총이 이의민에게 인사하는 이들을 자세히 보니 서황만 그런 게 아니었다. 하나 같이 이의민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는 듯 인사했다. 정말 다들 둥지에서 어미 새를 기다리는 새끼 같아 보인다.
그런데 웃기게도 인사를 받는 당사자인 이의민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했다.
“어어! 그래. 왔다. 왔어. 그런데 지금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군. 어서 출정 준비를 해야 되겠다.”
그러니 더 이들의 모습이 이상해 보이는 만총이다.
‘정작 대사농은 수하들을 끔찍이 여기지도 아니 하는 것 같구나. 그런데 어찌 다들 대사농을 열렬히 따르는 것인가....?’
이때 이의민은 서황과 만총이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청주 황건적들을 가볍게 정리하셨다 들었습니다. 역시 주군이십니다.”
“별 것 아니지.”
서황의 인사 역시 건성으로 받는 듯한 이의민. 그의 시선이 만총 쪽으로 향했다. 이에 서황이 얼른 만총을 소개했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소장의 친우입니다.”
“오! 이 친구가 바로 그 친구인가? 반갑군.”
드디어 이의민과 만총의 눈이 마주쳤다. 이의민에 대한 의구심이 가득했던 만총. 이의민의 강렬한 눈빛에 빠져들었다. 머릿속으로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가슴으로는 이의민을 따르는 이들이 이해되고 있다.
만총은 자신도 모르게 이의민에게 자신을 받아달라고 하고 있었다.
“대사농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백녕이란 자를 쓰는 만총이라 합니다. 서황의 친우로서 그의 부름을 받아 이 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아직 부족한 것이 많지만 부디 소인을 받아주십시오.”
“만총이라... 그래. 공명의 친구라고? 잘 왔네. 앞으로 날 좀 도와주게.”
싫다는 사람 안 붙잡지만 오겠다는 사람을 막지도 않는 이의민은 화통하게 만총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속하 만총, 이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대사농을 주군으로 섬길 것입니다.”
아주 간단명료한 인사 하나로 만총은 이의민의 수하대열에 합류했다. 내심 긴장하고 있던 서황은 맥이 풀렸다. 곽가가 이의민에게 퇴짜를 한번 맞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려 순유가 데려온 사람인데도 말이다.
게다가 서황이 알기로는 이의민은 가식을 떠는 자를 굉장히 싫어했다. 그런데 방금 만총의 인사가 그랬다. 대놓고 아부를 하는 듯하지 않은가.
하지만 서황은 이의민에 대해 모르는 게 있었다. 이의민은 고려 시대 때부터 아첨을 일삼는 수하들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그런 오랜 경험으로 인해 자신에게 아부를 떠는 것인지 진심인지 구별해낼 수 있었다. 즉, 이의민은 만총이 지금 아부를 떠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와 하는 언행이라는 걸 간파했다.
“자네와 같은 인재를 얻게 되니 든든하군. 아무튼 준비는 다 되었는가?”
이의민이 질문에 곽가와 서황을 비롯한 수하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옛! 주군! 언제든 출병할 수 있게 대비를 해놓았습니다.”
“잘 되었군. 그럼 즉시 서주로 출병한다.”
임치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서주로 출병 명령을 내리는 이의민. 그를 따라 4만 군사들이 서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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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 낭야국의 개양현에는 때 아닌 긴 행렬이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기운이 풍겨져 나왔다.
군사들로 보이는 그들은 몸이 성한 이들이 별로 없었고, 그나마 성한 이들 역시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힘없이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바로 서주 자사 도겸의 군사들이었다.
선두에 있는 도겸은 다른 군사들과 마찬가지로 어둡고 슬픈 기운을 풀풀 풍기며 가고 있었다. 과거 황보숭, 장온 밑에서 강맹한 군인으로 숱한 활약을 펼쳤던 것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들이 이리 축 처진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최근에 벌어진 전투에서 패했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조조였다.
조조는 작은 도발로서 전쟁의 시발점을 만들었다. 물론 아무 명분 없이 무작정 쳐들어온 아니다. 처음에 조조는 연주에서 서주로 넘어 간 도적들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군사들을 조금씩 서주의 경계를 넘게 했다.
처음에는 도겸도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기고 그냥 넘어갔었다. 하지만 조조의 군사들이 서주의 경계를 넘는 일이 자꾸 반복됐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근처에 사는 서주 백성들을 도적으로 몰아 처단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당연히 언제까지 참고 있을 도겸이 아니었다. 조조의 도발에 맞서 제대로 된 응징을 하려는 도겸. 그런데 그에 휘하에 있던 진규가 도겸을 말렸다.
“주군. 조조를 결코 가벼이 보시면 아니 됩니다. 그는 이미 연주에서 큰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저들의 도발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하지만 진규의 만류는 오히려 도겸을 더 자극했다.
왕년에는 꽤나 이름을 날렸었던 도겸.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특히 도겸은 조조를 한낱 애송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진규의 발언은 그의 자존심을 더 자극했다.
“그럼 내가 언제까지 참고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조조와 그 하수인들은 이미 서주를 넘어왔네. 이러다가 여기까지 내주자는 말인가?”
“저들도 명분 없이 그렇게 까지는 하지 못할 겁니다. 제발 참으십시오. 그러면 저들도 어느 선까지만 넘고 그 이상은 오지 못할 겁니다.”
“닥치게. 나도 예전에는 군을 호령했었네. 그런데 조조와 같은 애송이 하나를 어찌하지 못할 성 싶은가?”
결국 도겸은 진규의 조언을 무시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주로 향했다. 이 모든 것은 도겸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한 순욱의 함정이었다. 과거의 영광에 빠져 현재 시류를 읽지 못한 도겸이 도발에 응할 것이라 정확히 꿰뚫어 본 셈이다. 도겸이 이 함정에 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조조는 그가 군사를 출병시켜 연주로 온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망설일 것이 바로 전군 동원령을 내리고 서주로 향했다.
연주와 서주의 작은 국지전은 결국 전면적인 전쟁으로 번졌다.
개전 초기에는 제법 비등한 싸움이 이어졌다. 하지만 조인, 조홍, 하후돈, 하후연 등을 앞세우고 순욱이 뒤에서 전략을 짜는 조조군에 점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조조를 상대로 작은 전투부터 점점 밀리더니 큰 전투에서까지 연이어 대패를 기록했다. 그나마 진규가 피와 살이 되는 조언을 올렸지만, 상대를 계속 애송이로 보던 도겸은 그마저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특히 순욱은 그런 도겸의 성격을 확실히 이용하며 차근차근 승기를 굳혔다. 개전 한달 정도 만에 비슷했던 양측의 병력은 어느새 6만대 2만이라는 차이까지 벌어졌다.
결국 도겸과 서주군은 이리 비참한 모습으로 패퇴하고 있는 것이었다.
“진규. 미안하네. 그대의 말을 들었어야 했네.”
진규는 주군이 그런 말을 했는데도 답이 없었다.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진규. 너무 그러지 말고 내가 어찌해야 할지를 알려 주게. 내 이제 자네 말이라면 무조건 따름세.”
“정말 그러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당연히 그리해야지.”
“지금 주군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조조에게 항복하십시오. 서주와 주군을 살리는 길은 그것뿐입니다.”
사실 진규의 말대로 그것밖에 답이 없었다. 지금 남은 군사들로 조조에게 맞서봐야 더욱 비참한 패배만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자존심 빼면 시체인 도겸이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었다.
“뭐, 뭣이라?! 이놈! 내 너의 재주를 아꼈거늘! 이제 보니 간악한 배신자로구나. 여봐라! 이놈을 당장 가둬라!”
도겸은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진규를 가두라 명했다. 진규는 이미 체념한 듯 저항 없이 군사들에게 끌려갔다. 홧김에 진규까지 가뒀지만 도겸 역시 방법이 있을 리 없다.
‘크윽! 천하에 이 도겸을 도와줄 이가 그리도 없단 말인가? 해 달라는 건 다 해줄 테니,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날 좀 도와다오.’
도겸의 간절한 기도에도 주변은 고요할 뿐이다. 아직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