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급변하는 정세 (3)
이의민은 관해를 보내놓은 후 다시 북해성으로 돌아왔다. 순유의 말대로라면 더 이상 전투를 할 필요도 없다.
이제 다시 자사 치소가 있는 임치성으로 돌아가도 되지만, 군사들도 강행군을 이어왔고, 북해상 공융에게 받아낼 것, 책임을 물을 것도 있으니 겸사겸사 북해성으로 갔다.
이의민과 청주군이 북해성으로 돌아가자 그간 보이지 않았던 공융이 성 밖으로 마중 나와 있었다. 하지만 이의민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 한창 전투를 할 때는 코빼기도 내비치치 않다가 이제 와서 극진히 대접하는 척을 해봐야 이미 늦은 셈이다.
“북해 상 공융이 대사농을 뵙습니다.”
“그래. 그대는 공자의 후손이라고 들었다. 맞는가?”
이의민은 현재 청주 자사이고, 그 외 대사농까지 겸임하고 있다. 직위로만 보자면 북해상인 공융에게 반말을 해도 할 말이 없는 위치다.
하지만 보통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자들끼리 반말은 좀처럼 하지 않는 법이다. 게다가 나이로 보면 아무리 봐도 공융이 한참 연장자였다. 그런데도 거리낌 없이 반말을 내뱉는 이의민을 보며 공융은 눈썹을 꿈틀했다.
하지만 공융은 언제 그랬냐는 듯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표정관리를 했다. 어쨌거나 이의민은 그의 은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의민과 청주 원군에게 지은 죄가 있었다.
“송구합니다. 대사농. 성 내의 백성들이 걱정되어 원군을 돕지 못했습니다.”
“하! 그러니까 우리가 질 것 같아서 성 안에만 숨어 있었다? 그 말이냐?”
“그렇습니다. 수적으로 너무 차이가 났으니까요. 그대로 황건적들에게 당하실 줄 알았습니다. 거기서 제가 군사들을 이끌고 대사농을 도우러 간다고 해도 무의미한 희생만 더 추가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물론 대사농께서 싸우시는 걸 보니 얼마나 큰 착각인지 알겠더군요. 변명을 대긴 했지만 전부 제 잘못입니다. 마땅히 벌을 받겠습니다.”
공융의 변명 아닌 변명을 들은 이의민은 기가 차다는 표정이다.
“하! 거 참.... 스스로의 잘못을 마치 제 3자처럼 그리 객관적으로 밝히는 놈은 처음이구나. 그래도 이리저리 변명하는 새끼들 보단 낫긴 한데....”
이의민은 자신과 원군이 전투를 할 때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는 공융이 전형적으로 자기만 아는 인물일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나 공자의 후손이라는 명성도 있을 테니 케케묵은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하겠나.
그리 예상을 했으니 처음부터 그에게 반말을 내뱉으며 자극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그와 직접 대면해보니 예상과 다른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공융은 확고한 신념이 있고, 그 신념대로 움직이는 자였다.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말을 바꾸며 변명을 일삼지 않는다. 자신의 잘못을 분명히 인지하여 숨기지 않고 벌을 청했다. 그리고 비굴한 느낌 또한 없었다.
그래서 공융을 만나면 제대로 참교육을 시켜주려 했던 이의민이지만 지금은 조금 떨떠름한 상태다.
“음... 공달. 북해상이 벌을 청하는데 어떤 벌을 내려야 하겠는가?”
이때 장료 등이 안타깝다는 듯 의견을 청해왔다.
“주군. 그래도 국상께서 저리 잘못을 뉘우치고 있고, 또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니 너그럽게 용서해주심이 어떠하신지요.”
어쨌거나 이의민은 이들에게 의견을 묻지 않았다. 질문을 받은 순유는 공융을 자세히 관찰하더니 슬쩍 입을 열었다. 다른 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다소 냉랭한 의견이었다.
“그건 아니 될 말씀입니다. 어쨌든 북해상께서는 북해를 도우러 온 원군에 호응을 하지 아니 하셨습니다. 이건 분명 넘어갈 수 없는 죄입니다. 그에 따른 벌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훈훈하던 분위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건 이의민 역시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긴 했다. 하지만 이의민은 순유의 말이라면 철썩 같이 믿고 있다.
“공달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정작 당사자인 공융은 시종일관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상을 받든 벌을 받든 개의치 않고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다.
“북해 상께선 앞으로도 백성들을 독려하여 북해와 동래, 장광의 생산량을 최대로 늘리도록 하시오. 땅이 비옥하진 않으나 바다를 끼고 있으니 그 점을 최대한 활용하시오.”
순유의 처분에 모두가 의아해했다. 지금 순유의 발언을 들어보면 벌이라고 할 만한 게 딱히 없었다. 그저 휘하에 있는 자에게 어떤 지침을 내려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역시 순유도 그나마 북해성을 지키며 끝까지 황건적에게 맞선 공융에게 벌을 내릴 생각은 딱히 없었다. 단지 순유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공융을 한번 시험해본 것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백성을 생각하는지, 지금 보이는 모습이 이의민을 기만하기 위해 꾸며진 모습인지 살펴본 것이었다.
만약 그가 이의민을 기만하려고 했다면 순유가 끝내 벌을 내린다고 결정했을 때, 조금이라도 감정의 변화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순유는 그걸 누구보다 잘 읽을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순유가 벌을 내려야 한다고 했을 때도 공융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즉, 공융은 진심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공융의 본성을 확인한 순유는 벌이 아닌 당부를 했다. 앞으로 청주를 잘 이끌어가기 위한 당부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황건적 때문에 뜸해졌던 백제와의 교역도 속히 재개 하시오. 혹시 이 모든 것들을 처리하기 위한 인력이 부족하다면 언제든지 요청을 하시오.”
순유의 말대로 4만의 군사들이 급속하게 충원이 됐고, 추가로 청주 황건적들까지 모두 청주군에 편입이 될 예정이었다. 인력이 부족하기는커녕 남아돌아서 문제니, 남는 인력은 공융을 돕는 게 제격이었다.
공융은 순유의 첫 번째 당부에는 두말하지 않고 수긍을 했다. 하지만 두 번째 당부에 대해서는 곤란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저.... 군사. 백제와의 교역은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요?”
“원래 백제와의 교역을 진행하던 인재들이 제법 있었습니다만, 최근 황건적들로 인해 대부분 죽거나 도망쳤습니다. 즉, 현재는 백제와 교역을 담당할 인물이 없습니다.”
“흠! 그럼 백제와의 교역이 사실상 힘들겠군요.”
순유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번에 데려온 청주 황건적들을 향해 물었다.
“혹시 너희들 중에 백제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순유의 질문에 한 사내가 황급히 손을 들었다.
“예! 소인 길태라 합니다. 소인이 백제 말을 아주 유창하게 잘 합니다.”
길태는 이제 관해에게 제대로 찍혔으니 이렇게라도 출세를 하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이 선택을 나중에 얼마나 후회할 지는 그도 아직 모르고 있다.
“오! 그래. 일전의 전투에 학익진을 이용해서 그럴 듯한 계책을 내놓았던 이가 바로 그대였지. 백제 말까지 잘 한다니 참으로 잘 되었군.”
처음으로 순유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길태는 순간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출세에 대한 욕망이 그 느낌을 지워버렸다.
“예. 헤헤헤. 맡겨만 주십시오. 단순히 백제 말만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저보다 똑똑한 사람은 몇 없다고 자부합니다. 어떤 일이든 맡겨주시면 전부 확실하고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럼 앞으로 내 노예, 아니. 부관이 되어 백제와의 교역을 책임지게.”
“예? 방금 노예라고 하신 거 같은데....?”
“내가 언제? 벌써 귀가 먹은 겐가?”
그제야 길태는 뭔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며 애타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부, 분명 노예라고....?”
모두 길태의 시선을 피했다. 여태껏 꿋꿋한 모습을 보여 왔던 공융도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 이의민과 눈이 딱 마주쳤다. 길태는 멋도 모르고 이의민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내려다 바지에 오줌을 지릴 뻔했다. 마주보는 이의민의 시선에서 살기를 느낀 길태다.
“히이익! 마, 맞습니다! 군사께선 노예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헤헤. 소인이 귀까지 먹었나 봅니다. 이런 쓸모없는 놈!”
찰싹!
길태가 스스로 뺨을 때리며 자학까지 하고 나서야 이의민은 시선을 거뒀다. 그는 스스로의 처지가 서글펐지만 그래도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교역을 책임지는 관원으로서 출세를 한 것이 아닌가. 물론 얼마 후 정말로 말이 안 나오는 과도한 업무에 노예처럼 부림을 당한다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만 말이다.
공융에 대한 처벌(?)이 확정됐다. 실질적으로는 처벌이 아니라지만 어찌 됐든 자사에게 바칠 세금이 높아졌고, 공융 스스로도 해야 할 일이 늘어났다. 처벌이라고 보면 처벌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융도 바라던 일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은 그가 스스로 밝혔다시피 백성들의 안정과 동시에 유학을 퍼뜨리는 일이다. 이제 청주가 안정됐으니 둘 다 이룰 수 있다.
모든 걸 마무리한 이의민은 한동안 북해에 머물렀다. 북해도 청주에 속한 지역이니 자신의 치세를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시찰이다. 군사들도 모처럼 북해에서 편히 쉬면서 평화로움을 만끽했다.
그러던 중 곽가가 보낸 전령이 급보를 가지고 왔다.
“부군사께서 서신을 올리셨습니다. 급히 전하라 하셨습니다.”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결코 간단하게 넘길 수 없는 내용이었다.
“공달. 조조가 움직인 모양이야. 서주에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다는군.”
이의민이 내용을 읊어주자 공융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조라는 자에 대해서는 소문을 들어봤습니다. 최근 연주 지역을 휩쓸며 큰 세력을 키웠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도겸을 직접 공격하다니... 도겸은 군무경험이 풍부한 자입니다. 조조가 아무리 조숭의 손자라지만 아직 그 세력이 부족할 터인데, 어찌 도겸의 상대가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앞뒤 가리지 아니 하고 도겸을 치는 걸 보니, 소문과 달리 사리분별이 분명하지 않은 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순유의 생각은 달랐다.
“이건 결코 우발적인 침공이 아닐 겁니다. 조조의 곁엔 순욱이 있습니다. 문약이 승산 없는 싸움을 걸지는 않았을 거고, 조조 역시 그런 순욱의 조언을 무시할 인물이 아닙니다. 제 짐작이 맞는다면, 이미 자신이 승리할 것이라는 계산을 마치고 전쟁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그냥 강냉이나 뜯으며 조조와 도겸의 전쟁을 구경을 하면 되는가?”
“서주가 조조에게 그대로 떨어지는 꼴을 그냥 두고 보시면 아니 됩니다. 주군께서 서주로 가시지요. 어쩌면 이것은 우리에게도 큰 기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청주의 상황이 아직 정리가 아니 되지 않았는가? 관해 놈의 보고도 기다려야 하고.... 특히 내가 신선이라고 공갈을 치고 애들을 불러 모았는데, 내가 없어도 되겠느냐 말이야.”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가 여기에 남을 테니 주군께선 병사들을 이끌고 서주로 가셔서 도겸을 도우십시오. 황건적들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신선을 볼 수 있다며 주군이 계신 서주로 보내면 됩니다. 그럼 서주에서 병력 충원도 되는 셈입니다.”
“그럼 바로 출정준비를 하지. 지금 바로 서주로 간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의민은 그길로 출정 준비를 했다. 군사들에게는 다소 고달픈 일이지만 이의민에게는 전투는 하면 할수록 기대되고 흥분되는 일이다.
이에 순유는 기겁을 하며 지금 여기서 바로 서주로 갈 것 같은 이의민을 말렸다. 이의민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를 제어해 줄 사람이 분명 필요했다. 만약 자신이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를 붙여야 했다.
“주군. 임치성으로 돌아가셔서 봉효와 같이 가시지요.”
“왜? 말 나왔는데 바로 가면 되지 않겠나? 봉효를 부를 거면 늦게라도 합류하라고 전갈을 넣지.”
“일전에 원상형에게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낙양에서 보낸 물자가 슬슬 도착했을 겁니다. 그럼 임치성에 있는 2만의 예비 전력을 그대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조는 결코 경시하면 아니 되는 인물입니다. 거기다 순욱까지 곁에 있으니 더더욱 그렇지요. 저나 봉효 둘 다 없는 상태에서 그와 맞붙는 상황을 만들지 마십시오.”
이의민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모두 들어라! 우린 임치성으로 복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