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44화 (44/175)

44. 급변하는 정세 (1)

낙양에 있는 황궁을 황제도 아니면서 제집처럼 드나드는 자가 있다. 이 시대에서 황제 다음으로, 아니. 어쩌면 황제보다 더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되는 하진이었다.

그런 하진 앞에 그와 제법 닮은 듯한 외모의 한 사내가 있었다. 바로 하진의 이복형제 하묘였다.

하묘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하진에게 뭔가 보고를 하고 있었다.

“대장군. 전에 형님께서 형주의 유표와 장사의 손견에 대한 회유를 명하셨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숙달. 우리 둘만 있을 그냥 형님이라고 부르라니까.”

“사실 저도 대장군을 형님으로 부르고 싶지만 황궁 내에서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대장군. 대신 밖에 좋은 곳에서 따로 뵌다면 그리 불러드리겠습니다.”

“허! 거 사람 참.... 그래. 그럼 보고를 해 보게.”

원래 하진과 하묘는 형제지간이었지만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당연히 친형제가 아니라 피가 절반 밖에 섞이지 않은 이복형제인 만큼 사실상 남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둘 다 황실의 친인척으로 나라의 권력을 서로 나눠가지려는 입장이니 설사 친형제라고 해도 사이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랬던 둘 사이가 어느새 매우 가까워졌다. 지금 보이는 둘의 모습은 어린 시절부터 사이가 좋았던 친형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둘이 가까워지게 된 배경은 웃기게도 이의민 때문이었다. 하진은 논공행상 이후로 누구보다 듬직하다 여겼던 이의민이 배신을 때려버리니 큰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수하라고 여겼던 이가 순식간에 정적이 된 셈이다.

그 이후 이의민을 골탕 먹이려는 동시에 자신의 사람을 얻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평소에 친했던 친하지 않았던 상관없이 손을 내밀었다. 창칼이 난무하는 실제 싸움이든 정치 싸움이든 싸움은 결국 쪽수가 많은 쪽이 유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복동생 하묘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묘는 하진이 내미는 손을 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묘 입장에서는 그간 하진과 사이가 나빴던 이유는 그가 일방적으로 자신을 싫어하고 멀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진은 현재 대장군으로서 한나라 최고 실권자였다. 그런 하진이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 거부할 수도 없고, 거부할 생각도 없었다.

지금 하진이 하묘에게 보고 받는 일 역시 그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예. 대장군. 둘 다 회유에 성공했습니다. 둘은 적극적으로 대장군을 지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감축 드립니다.”

하북에서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원소가 하진을 지지하고 있고, 형주의 유표, 장사의 손견까지 하진을 지지한다고 밝혀왔다. 이쯤 되면 한나라 조정의 실권뿐만 아니라 전체를 통틀어도 그 누구 하나 범접하지 못할 세력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했다.

“그런가? 잘 되었군. 그럼 가장 중요한 놈은 어찌 되었나?”

그럼에도 하진은 표정이 그다지 밝지 못했다. 지금 얘기하는 가장 중요한 놈이 어찌 되었는가가 가장 큰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하진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짓누르는 존재, 바로 이의민이다.

하진의 재촉에 하묘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유표와 손견은 하진의 뜻대로 순조롭게 회유했지만, 이의민은 그러지 못했다.

“그것이... 명하신 대로 청주의 관리들을 전부 낙양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응하지 아니 한 관리들이 몇몇 있는데, 그들 역시 대부분 그냥 하야를 했으니 상관없을 겁니다. 그리고 낙양으로 불러들인 이들이 청주 관에 남은 물자를 모조리 가지고 왔습니다.”

여태껏 하묘에게 인자하게만 대했던 하진의 태도가 처음으로 달라졌다. 날카로운 태도로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내가 궁금한 건 과정 따위가 아니야. 그래서 이의민 그놈이 어찌 됐냐는 얘기야.”

하묘는 쩔쩔 매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처, 처음에는 이의민도 곤란을 겪었다고 합니다. 관에 사람도 없고, 창고에 아무런 물자도 없으니 거기에 눌러 앉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2만에 가까운 이들이 청주 관군으로 편입되고, 이후 그들을 이용해 둔전제까지 실행한 모양입니다.”

하묘의 보고에 하진은 아무 말 없이 이를 악물었다.

빠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하묘에게도 똑똑히 들릴 정도다.

“말 잘 듣는 개새낀 줄 알았더니...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어.”

하진은 누구 때문에 아직까지 목이 붙어 있는지 모르고 이의민에게 나직한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하묘는 그런 하진의 눈치를 조심스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형님. 형님께서 그 자의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아니 합니다. 형님은 대장군이자 이미 모든 실권을 다 쥐고 있는 분입니다. 반면 그 놈은 단순히 힘만 쌘 무부일 뿐이지 않습니까?”

“그가 단순한 무부라면 날 이리 배신할 리가 없었겠지. 난 그놈을 반드시 파멸시켜야 하네. 그놈과 같은 하늘 아래에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하묘는 어떻게든 하진을 달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겨우 하진과 사이가 좋아졌는데 이의민 때문에 또 틀어질 위기였다.

하묘는 한동안 고민을 하다가 좋은 수가 떠올랐다는 듯 하진에게 말했다.

“형님. 둔전제로 식량 걱정은 덜었다지만, 여전히 물자는 부족할 것 아닙니까? 황제가 약속했던 청주에 대한 지원을 모른 척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물론 그걸 처리하는 건 어디까지나 대사농이긴 하지만, 형님께서 손을 대신다고 해도 조정 내에서 감히 반발할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건 폐하의 황명인데....?”

일전에 연회자리에서 순유는 청주의 어려운 상황을 말하며 황제에게 지원을 요청했었다. 당시 이의민 때문에 분위기가 살벌하기도 했기에 황제는 총 세 번에 걸쳐 물자를 지원하기로 승낙을 했다.

황제가 직접 내린 명, 그것도 많은 제후들이 보는 앞에서 내린 명을 하진이 뒤엎는다는 건 아무리 대장군인 그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하묘는 문제가 생기지 않을 만한 묘책을 냈다.

“황명을 어기시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폐하께서 지원을 하라고 했지 언제까지 하라는 말씀은 한 적이 없으십니다.”

그제야 하진의 눈빛이 빛나고 입가에 미소가 나타났다.

“옳거니! 흐흐! 그래. 듣자하니 그 놈, 청주 황건적과 싸우고 있다던데,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없겠지. 그런데 낙양의 지원마저 없다면 더 어려울 수도 있겠군?”

“바로 그겁니다. 게다가 청주 황건적들이 어디 보통 놈들입니까? 그런 악조건에서 황건이랑 싸우다 콱 뒤져 버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죠.”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당장 사도에게 가야겠어.”

하진이 아무리 대장군이라도 황실 물자 운용에 관한 모든 사항을 독단으로 처리할 수는 없었다. 일단 사도 왕윤의 협조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 그를 찾아가려는 하진이다.

물론 사도 왕윤은 아직까지 하진의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 사도라는 신분은 그에게도 껄끄러운 존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표와 손견을 설득한 직후라 그런지 충분히 왕윤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하진의 시도는 시작부터 틀어졌다.

“각 지방에 대한 지원? 그건 대사농이 하는 일 아니오?”

“그, 그렇지만 사도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지 않소?”

“그야 그렇지만.... 그럴 거면 미리 말을 하시지. 폐하의 황명까지 있는데 제가 어찌 그걸 막겠소이까. 낙양에 대사농의 속관이 있으니 그 자에게 가 보시지요. 어쩌면 아직 아니 보냈을 수도 있소.”

하진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하며 곧바로 대사농 속관으로 일하는 종요에게 찾아 갔다.

‘그러고 보니 그 놈도 이의민의 사람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뭐 까짓 거 수틀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리지.’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종요는 매우 정중한 태도로 하진을 맞이했다. 그리고 하진의 뜻을 전혀 거스르지 않겠다는 듯 협조했다.

“예. 대장군. 미리 말씀해주셨으면 절대 보내지 아니 하였을 것인데.... 이미 보낸 지 닷새가 넘었습니다.”

“뭐야! 내게 보고도 없이 그리 급하게 처리를 했다는 말인가?!”

대사농이 처리하는 일을 대장군에게 보고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한마디로 하진이 억지를 쓰는 셈인데도 종요는 오히려 죄송하다는 어투로 답했다.

“황명을 지체 없이 시행하려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송구합니다.”

그런 종요의 태도 덕분에 목적을 이루지 못했지만 화가 제법 풀린 하진이다.

‘빌어먹을....! 그런데 이놈 왠지 내 말을 아주 잘 들을 것 같은 놈이군. 완전 샌님이잖아? 이번 첫 번째는 실패했지만 남은 두 번이 있으니....’

“흠흠! 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다음엔 내게 보고를 먼저 하게. 다른 뜻은 없고 그저 대사농에 대한 걱정이 커서 말일세.”

“어느 분의 분부라고 소인이 거부를 하겠습니까? 다음부터는 반드시 대장군께 먼저 알려드리겠습니다.”

종요에게 확답을 받은 하진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대사농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래. 어차피 한 번의 물자 지원으로는 청주의 상황을 완전히 감당하기 힘들다. 군량이야 군둔전으로 어찌 할 수 있다고 쳐도 무기나 기타 물품은 도저히 보급할 수 없겠지. 남은 두 번만 막는다면 틀림없이 큰 곤란을 겪을 거다.’

하진은 그리 생각하며 이의민을 파멸시키려는 계획이 차근차근 진행된다고 믿고 있다.

종요는 하진이 나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허리를 세우고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때 집무실 한쪽 구석에서 중년의 사내가 슬쩍 튀어나왔다. 8척이 넘는 큰 키에 꼬장꼬장한 외모를 가진 사내였다. 아무래도 하진과 같이 있을 때 숨어있었던 것 같다.

“원상도 이제 능구렁이가 다 되었구먼.... 황제의 외숙이자 대장군인 하진을 완전히 가지고 놀다니 말이야.”

“후훗. 역시 중덕 선생은 속일 수 없군요.”

종요와 대화를 나누는 중년 사내의 정체는 바로 정욱이었다.

“나를 뭐로 보는 겐가. 하진이니 속지 내가 그런 뻔한 속셈에 넘어가겠는가? 자네가 거기에서 하진을 적대했다가는 다음 물자는커녕 그 전에 쫓겨날 것 같으니 그런 거 아닌가.”

“맞습니다. 그러니 아부와 정에 약한 하진에게 이리 살갑게 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옆에서 적당히 구슬려주면 적어도 다음 물자를 보내는 건 문제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어찌 할 작정인가? 하진이 속은 걸 알면 가만히 있을 성 싶은가?”

“남은 두 번째, 세 번째 물자는 연이어 보낼 겁니다. 하진은 저를 믿고 안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는 거지요. 그리고 그때쯤이면 하진은 더 이상 여기에 신경 쓸 여력도 없을 겁니다.”

종요의 얘기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정욱.

갑자기 종요가 처리하던 서류 뭉치 몇 장을 집어 들었다.

“많이 바빠 보이는군. 괜찮다면 내가 좀 거들어주겠네. 어떤가?”

그에 종요가 크게 기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정욱이 여기 있는 이유는 종요가 그를 이의민의 사람으로 영입하기 위해 불렀기 때문이다.

“오오! 드디어 마음을 정하신 것입니까? 조조에게도 등용제안이 왔다 들었는데....”

정욱은 씩 웃으며 답했다.

“아무래도 이 쪽이 더 재밌을 거 같아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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