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미친놈들은 매가 약이다 (4)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청주 관군을 바라보고 있던 관해와 그 무리들. 그런데 이의민과 군사들이 일직선으로 자신들의 가운데를 향해 오는 것을 보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응? 뭐지? 길태. 저놈들이 분명 우리 가운데가 아니라 측면부터 공략할 거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왜 저리 가운데로만 오고 있는 것이냐?”
“음... 이의민이 무력은 대단한데 머리에 든 건 없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익진인지 뭔지 파악도 못하고 무작정 이리 들어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순유가 있다면 분명 알아볼 터인데.... 이상하군요.”
“뭐? 그럼 네 계획이 초장부터 틀어졌다는 말 아니냐?”
하지만 길태는 전혀 걱정 없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얘기했다.
“크흐흐! 적들이 제가 야심차게 준비한 함정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상관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 진영이 어떤 진영입니까? 바로 학익진입니다. 저들이 저렇게 일직선으로 가늘게 온다면 우리가 벌린 아가리에 스스로 들어오는 모양새입니다. 역시 형님은 언제 봐도 한결 같으십니다. 그리 가르쳐 드렸는데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밖에 모르니 말입니다.”
“흐흐! 그렇다면 계획이 좀 틀어졌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유리하다는 말이지? 좋다! 멍청한 적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라!”
관해는 다시 걱정을 거두고 이의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양 측면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악!”
자세히 보니 적 후방에서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바로 태사자와 그 휘하 궁병부대가 날리는 화살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날리는 화살촉 끝에 뭔가 뻘건 게 넘실거렸다. 바로 불화살이었다.
보통 불화살은 공성을 하거나 협소한 지형에서 많이 쓰는 법이다. 그 이유는 불화살로 상대를 직접 맞추는 것은 일반적인 화살보다 훨씬 어렵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전투에서 만들기도 더 번거로운 불화살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말인즉슨 불화살은 대부분 일정 지역에 화계를 쓰기 위해 날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어떤 굴곡진 지형도 없는 평야였다. 불화살을 쓸 이유가 조금도 없는 곳이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태사자와 궁병들은 불화살을 쏘고 있었다. 바로 길태가 준비한 화계 함정을 파훼하기 위함이다.
태사자가 날린 화살은 정확히 황건적들이 파 놓은 구덩이 위에 떨어졌다. 다른 궁병들이 쏜 불화살도 반절 정도는 구덩이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나머지 반절은 구덩이 안에 들어갔다. 기름이 가득한 그 구덩이에 불씨가 떨어졌으니 그 이후의 상황은 안 봐도 뻔했다.
화르르륵!!
엄청난 불길이 순식간에 청주 황건적의 양 측면에서 일어났다. 그에 그 주변에 있던 황건적들은 불에 그대로 휩쓸려버렸다.
“크아아악!”
“살려줘! 뜨거워!”
관해와 길태도 그제야 측면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여태껏 관해가 어떤 질문을 해도 명쾌하게 답을 했었던 길태. 그랬던 그가 지금은 아무런 답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어찌해야 되느냐? 대답 좀 해봐라!”
재촉에도 두 눈을 부릅뜰 뿐 여전히 아무 답도 없는 길태를 보며 관해는 분을 참지 못하고 결국 손찌검을 했다.
“야이! 개새끼야! 뭐라도 좀 해보라고!”
“커억! 그, 그만 좀 때리십쇼. 형님도 제 계략이 좋다고 했지 않습니까? 결국 결정은 형님이 한 거면서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거요?”
“이 새끼가 그래도...? 오냐!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관해는 평소 그래도 부하들 앞에서는 나름 도인 같은 면모를 보였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런 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양 옆에 위치한 황건적들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불에 타 죽어가고 있는데 어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겠나.
단순히 황건적의 병력 손실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끄어어억!”
“키에엑!”
지옥에서나 들릴 법한 비명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그 소리 때문에 황건적들은 다시 공포를 떠올렸다.
온몸이 불에 탄다면 그 고통이 얼마나 크겠는가. 적어도 이의민의 구타보다 크면 컸지, 작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 만큼 황건적들은 이전처럼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통과 공포의 비명을 질렀고, 그 공포감은 일전에 이의민을 상대했던 것처럼 황건적 전체로 전염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관해가 있는 중군은 무사한가? 그렇지 않다. 이의민과 장료, 고순, 우금 등이 그대로 들어와 황건적들을 박살내고 있다. 이제 학익진이고 뭐고 유지할 상황도 아니고 그럴 정신도 없다. 관군의 일직선 공격에 처참히 쓸려나가는 황건적이었다.
망연자실하게 전장을 바라보던 길태는 굳은 표정을 하고는 관해에게 말했다.
“크윽! 형님. 내 지금 전황을 바꿀 만한 한 가지 방법이 생각났소.”
“뭐?! 아직도 그런 게 있느냐? 뭔지 어서 말해 보거라. 통하기만 한다면 내가 널 형님으로 모시마.”
“형님의 유일하게 내세울 만한 게 뭐요? 머리에 든 것도 없고 인품도 썩어 문드러지는 형님의 유일한 장점이 바로 무지막지한 신력 아니오? 이의민에게 일기토를 신청하시오.”
“뭐? 이의민이 일기토를 받아들이겠느냐? 전황이 이리 유리한 데 굳이 일기토를 해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잖느냐.”
“아! 그냥 내가 알려준 대로 하시오. 내가 알기로는 이의민 역시 형님 못지않게 무식하고 대책 없는 놈이라 절대 일기토를 거절하지 않을 거요.”
“오오! 그렇다면....!”
절망에 휩싸여 있던 관해의 눈빛에 희망의 빛이 스며들었다. 확실히 길태의 말대로 일기토를 하여 이의민에게 승리를 거둔다면 이 전장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일기토의 결과에 따라 군의 사기가 바뀔 터였다. 아직까지도 병력 자체는 황건적들이 더 많았으니, 사기만 충천 된다면 승패를 뒤집는 건 일도 아니었다.
관해는 청주 황건적 사이에서 무쌍 난무를 펼치는 이의민을 관찰했다. 확실히 보통은 넘어 보였다. 지금 보이는 것 외에도 이의민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생겼다. 어차피 소문이란 건 과장되어 부풀어지는 게 보통이다. 지금 여기서 싸우는 모습을 봐도 관해의 눈에는 그리 특별난 게 없어 보였다.
‘생각보다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저 정도라면 내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놈인 것 같다.’
이상할 정도로 자신감이 충만해진 관해는 이의민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대사농! 단주 관해가 대사농과 일대일 승부를 보길 원하오. 그대가 진정 사내대장부라면 이 승부를 피하지 아니 하겠지!”
관해의 외침에 이의민도 그를 쳐다봤다.
“크흐흐! 듣던 중 참으로 반가운 소리군.”
그리고 당연하게도 관해와의 일기토를 받아들였다. 이의민은 이런 싸움을 피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일기토를 받아들인다는 말과는 조금 다른 행동을 했다. 들고 있던 대부를 오히려 집어넣는 이의민이었다.
분명 일기토를 받아들인다고 해놓고 무기를 왜 집어넣는 것인가? 놀랍게도 이의민은 대부를 집어넣고는 주먹을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수박의 자세였다. 즉, 무기 없이 맨손으로 싸우겠다는 뜻이다.
무인으로서 자부심이 있는 자라면, 아니. 그냥 일반 무인이라 해도 충분히 기분 나쁜 상황이었다. 관해 입장에서는 자신을 모욕하는 것에 대해 큰 수치심을 느끼고, 똑같이 무기를 버리고 상대하겠다고 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관해는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기뻤다. 그는 건달이지 무인이 아니다. 상대가 스스로 불리함을 안고 가겠다니 큰 기회라 생각했다. 오히려 이의민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운 관해다.
‘크흐흐! 저 미친놈. 무슨 자신감인진 모르겠지만 덕분에 쉽게 이기겠군.’
“크흐흐! 후회하지 마라! 우뢰아아압!!”
괴성을 지르며 이의민에게 달려드는 관해. 맨손의 이의민에게 창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의민은 가볍게 창을 피하며 관해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꾸엑!!”
“흐흐. 거 참 생긴 것 답게 노는 구나. 그래도 단주면 비명이라도 좀 우아하게 지를 순 없느냐?”
“이, 이...! 씨팔! 생긴 거 가지고 뭐라 놀리는 놈이 제일 싫다!”
관해는 분을 참지 못하고 창을 연달아 찔러갔다. 하지만 이의민은 관해를 농락하기라도 하듯 요리조리 피하며 그때마다 관해의 뚝배기를 두들겼다.
“컥! 크악! 케엑!”
딱 봐도 이의민이 관해를 농락하고 있었다. 관해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똥물에 튀겨 죽일 새끼가! 감히 이 관해 님을.... 씨팔! 딱 한 번, 한 번만 찌르면 되는데....’
하지만 그 한번을 찌를 수가 없었다. 기습적으로 공격을 해보기도 하고 변칙적인 연속공격을 해봤지만, 이의민의 옷깃 하나 스칠 수가 없다.
“이 씨팔 놈아! 쥐새끼처럼 피하지만 말고 제대로 하라고!”
“그래? 정말 제대로 상대해주길 바란다는 말이지? 좋다. 제대로 시작해주마.”
관해는 곧 자신의 발언을 후회해야 했다. 여태껏 관해의 공격을 피하다가 한번씩 역습으로 뚝배기만 툭툭 치던 이의민. 처음으로 선제공격했다.
순식간에 관해의 앞으로 다가왔다. 관해는 놀라 창으로 막으려 했지만, 아주 근접한 거리에서는 오히려 창이 불리하다. 당연히 창보다 이의민의 주먹이 훨씬 빨랐다.
퍼어억!!
“끄아아악!!”
관해는 여태껏 내본 적 없던 비명소리를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여태껏 수많은 싸움을 해왔던 관해. 그런데 지금 이의민의 주먹은 경험해본 적이 없는 고통이었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의민은 바로 추가 공격을 이어가지 않고 관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관해는 단 한 대만 맞았을 뿐인데 자신의 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
‘어디서 이런 미친놈이....!’
그래도 관해는 아직 기회가 있다고 여겼다. 어쨌든 상대도 인간일 테니, 단 한번만 찌르기를 성공시킨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다.
회심의 찌르기를 날린 관해. 하지만 이번에는 창을 피하지도 않고 잡아버리는 이의민이다. 그리고 그 창을 손아귀 힘을 이용해 그대로 부러뜨려버렸다. 팔 힘으로 부러뜨린 것도 아니고 손아귀 악력으로 창대를 부러뜨리는 모습을 보며 관해는 전의를 상실했다.
“무, 무슨 인간이....? 사람이 아니다! 길태! 애들 데리고 나 좀 도....”
그런데 길태는 이미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의민이 가만히 있지도 않았다. 어느새 그의 주먹이 관해의 복부에 꽂혔다.
“끄어억! 자, 잠시만! 거긴 뼈요. 뼈 맞았다고!”
“좀 닥치고 그냥 처 맞는 게 어떠냐. 흐흐! 네 놈들은 목을 베는 거 보단 이게 효과가 더 크더라고....”
그제야 관해는 이의민이 왜 무기를 안 들었는지 알게 되었다. 관해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일반 황건적들이 그랬으니 관해 역시 구타가 더 효과적일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대사농! 오, 오해요! 오해! 나는 저들과 다르오! 바로 항.... 크아악!”
하지만 이의민은 관해의 얘기를 들을 생각이 없다. 무지막지한 구타는 계속 이어졌다.
“쯧쯧, 그래도 단주라서 좀 버틸 줄 알았더니 어째 다른 조무래기들보다 못하느냐?”
“흐어엉! 그러니까 난 다르다니까!”
이대로라면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의민의 날아오는 주먹을 보며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던 관해. 확실히 목숨이 경각에 달리니 머리가 더 잘 돌아간다. 그럴듯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관해는 바닥에 바짝 엎드리며 이의민을 향해 외쳤다. 여기 있는 모두가 다 들을 수 있도록.
“신선님이시여!”
“뭔 지랄이야? 신선? 내가...?”
“오! 당신을 이제야 뵙게 되었습니다. 모두 뭣들 하는가? 신선님께 예를 표하지 않고!”
갑자기 신선이라니? 아무리 단주의 말이라도 황건적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눈치 빠른 길태가 재빨리 엎드리며 같이 외쳤다.
“신선님이다!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마음 아파하시며 회초리를 들고 나타나셨다! 오! 신선님이시여!”
그제야 황건적들은 수군대며 관해와 길태의 얘기에 넘어가고 있다.
“그, 그런가? 대사농이 정말 신선님이신가?”
“그러고 보면 우리를 때리기만 하셨지 죽이진 않으셨잖아? 적이라면 그렇게 번거로운 짓을 왜 해?”
“맞구나! 나도 사실 이해가 가지 아니 했는데 이제 알겠군. 신선님께서 우리를 깨우치려고 그리 하신 거야.”
모든 황건적들이 이의민 앞에 부복했다.
“뭐야? 얘들 전부 왜 이래?”
정작 이의민은 당혹스러웠다. 그때 순유가 다가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이의민에게 권했다.
“푸흡. 주군. 그냥 신선인 척하시지요.”
“공달.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내가 야차 소리는 많이 들어도 신선 소리는 처음 듣는데....”
“지금 상황에 나쁠 건 없습니다. 주군께서 저들의 신선이 되신다면 저들은 주군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청주병이 될 것입니다.”
결국 순유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이의민. 청주병이라 불리게 될 이들을 향해 어색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야 본 신... 선의 뜻을 알다니 이 어리석고 멍청한 놈들.... 그래도 늦게나마 알았으니 됐다. 모두 함께 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자.”
“와아아아아!! 신선님 만세!”
모든 청주 황건적들이 이의민 앞에서 환호성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