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미친놈들은 매가 약이다 (3)
청주 황건적들은 그들이 스스로 신앙심을 가지기 전까지는 지어본 적이 없던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주둔지로 돌아왔다.
그들이라고 패배를 해본 적이 없는 게 아니다. 정신력은 남달랐지만 전투력은 다른 일반 군사들에 비해 딱히 나을 것도 없는 그들이 어찌 여러 관군을 상대로 패배한 적이 없었겠나.
하지만 그들은 그동안 겪었던 무수한 패배에도 좌절했던 적이 없었다. 오히려 패하면 패할수록 그들의 정신력은 더 강해졌고, 서로 단단히 결속했다. 그것이 청주 황건적들이 수많은 관군들을 물리치고 청주를 거의 장악하다시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그랬던 청주 황건적들이 처음으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절대 무너지지 않았던 정신력이 흔들리고 있다는 말이다.
주둔지에서는 여러 단주들 중 하나인 관해가 심각한 표정으로 복귀하는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이미 전령을 통해 전황을 보고 받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물론 그는 단순 보고를 받은 것뿐이라 청주 황건적들의 뿌리를 뒤흔들만한 문제가 발생했는지 아닌지 아직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인자한 표정을 지으면서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는 청주 황건적 패잔병들을 맞이했다.
“허허허. 형제들.... 어찌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겐가? 우리가 전투에서 졌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최근에는 없던 일이라서 걱정이 되는 건 이해하지만, 그간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게.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네,”
“죄, 죄송합니다. 단주... 하지만 두렵습니다. 새로 온 청주 자사, 그는...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가 과연 그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요?”
“쯧쯧쯧... 신선이 되겠다는 자들이 그리 심약해서야 되겠는가. 우리의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패배를 한 것이야. 믿음을 키워서 다시 전투에서 승리할 생각을 해야지. 먼저 간 형제들을 생각해서 힘들 내게. 그리고 앞으로 전투에는 나와 내 친위대가 직접 참여를 할 걸세.”
표정 하나, 목소리 높낮이 하나 바뀌지 않는 평온한 관해의 말에 풀 죽어 있던 황건적들의 얼굴에도 생기가 돋았다.
관해가 해주는 위로도 효과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다음 전투부터 관해와 그 친위대가 직접 참여를 한다는 말에 그들은 큰 안심이 됐다. 관해와 친위대의 전투력은 그동안 수없이 전투를 치르면서 확실히 증명이 됐다. 그들이 참여하는 전투는 절대 지지 않는다. 이것이 황건적들 사이에서는 절대 명제나 마찬가지였다.
“역시 관 단주님이시다! 알겠습니다. 말씀대로 다음 전투에선 저희들의 믿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오오! 관 단주님의 전투를 또 볼 수 있겠구나!”
“후후. 그래. 다들 나만 믿게. 그리고 각자 스스로 믿음을 더 굳건히 하게.”
패잔병들을 위로하고 자신의 막사로 돌아온 관해. 그들 앞에서 인자한 표정으로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미륵과도 같던 표정은 오간 데 없고 웬 건달이 하나 나타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건달의 얼굴에서는 딱 그 얼굴에 어울리는 상스러운 말투가 튀어나왔다.
“에라이! 씨팔 것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들....!”
관해는 분통을 터트리며 탁자를 걷어찼다.
이것이 그의 본 모습이었다. 청주의 뒷골목 건달로 살다가 때마침 황건의 난이 불었고, 항상 세상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그는 자연스레 황건적이 되었다. 남다른 신력을 자랑했던 그였기에 관군과의 전투 마다 큰 활약을 하고 태평도 내에서 명성과 입지를 높였다. 많은 황건적 동료들에게 인정받은 그는 마침내 한 교단의 단주까지 오를 수 있었다. 단주가 된 이후에 제법 태평도 신자답게 연기를 하고 있지만 그의 본성은 어디로 가지 않았다. 뒷골목 건달 시절의 모습 그대로다.
그에 친위대 측근 중 한 명이 와서 관해의 심중을 살폈다. 관해의 친위대원들 대부분은 그가 건달이던 시절 데리고 다니던 동생들이었다.
“형님. 왜 그리 흥분하십니까?”
“잘 왔다. 길태. 대체 북해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애새끼들이 이의민인가 뭔가 하는 놈한테 다 쫄아서 저리 벌벌 떠는 거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음도 불사하던 미친놈들이 갑자기 왜 저러느냔 말이다.”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방금 전에 형님께서 신앙심을 북돋아 주신 덕분에 다시 정신을 차렸지 않습니까?”
“저놈들의 눈을 못 봤냐? 내가 살아오면서 수많은 군상들을 봐 왔었다. 그런데 저놈들은 진정 미친놈들이야. 그 어떤 것을 봐도, 설사 지옥을 눈앞에서 본다고 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아니 할 놈들이지. 그런 미친놈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지금 당장은 내 말빨 덕분에 다시 용기를 찾았다지만, 이의민 그놈이 다시 나타난다면, 그놈 앞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울고불고 난리를 칠거다.”
관해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 그만큼 굳건한 믿음을 가졌던 청주 황건적들을 이렇게 만든 이의민이 심상찮았다. 물론 그 이의민과 일대일로 맞붙는다면 얼마든지 이길 자신은 있다. 하지만 전쟁은 일대일 일기토로 승부가 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이때 길태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관해를 안심시켰다.
“걱정마십시오. 어차피 형님께서 이의민이고 나발이고, 다 쓸어버리신다면 문제가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럼 저들의 두려움도 곧 없어질 겁니다.”
“하지만 이의민을 그리 쉽게 꺾을 수 있겠느냐? 그는 백파적과 흑산적도 손쉽게 물리치고 이곳에 온 것 아니냐?”
“형님. 제가 누굽니까? 바로 형님의 오른팔인 길태입니다.”
길태의 자신만만한 얘기에 관해도 눈을 빛냈다.
“뭐? 무슨 수가 있느냐?”
길태는 대답 대신 돌돌 말린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양피지에는 그림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진법을 표시한 것으로 보였다.
“이의민이 소제의 예상보다 빨리 오긴 했지만, 저들이 올 것이란 걸 알고 대비한 것이 있습니다. 헤헤. 바로 이것이 그 대비입니다.”
관해도 큰 기대가 됐다. 현재 관해의 친위대는 무력 하나만큼은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부 관해와 같은 건달 출신이라 그런지 하나 같이 멍청했다. 그런데 길태는 아니었다.
적어도 청주 황건적 내에서는 길태의 머리를 따라갈 자가 없었다. 길태의 무력은 친위대 내에서 제법 딸리는 편이었지만, 관해는 그를 가장 총애했다.
“오오! 역시 내 아우 길태로다. 흐음. 그런데 이건 진법 같아 보이는데? 대체 무슨 진법이냐?”
진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관해였지만, 일단 물어봤다.
“흐흐. 이건 학익진이란 것입니다. 중앙으로 유인한 후 양 날개가 그대로 쌈 싸 먹는 진법입니다. 이 학익진은 병력이 많은 쪽에서 적은 쪽에게 사용하면 아주 효과가 좋은 진법입니다.”
“오! 그럼 지금 우리 상황에 딱 맞는 진법이구먼. 한데 적들이 이 진법에 그대로 걸려주지 아니하면 어쩌느냐?”
“쯧쯧! 어찌 그리 단순하십니까?”
“뭐 이 새끼야?”
순간 열 받는 관해. 머리가 좋아서 오냐 오냐 해주고는 있었지만, 한 번씩 도가 지나칠 때가 있다.
“적진에는 순유가 있습니다. 소제가 그에 대해 좀 알지요. 그는 황실에 있을 때부터 황제와 고관들에게 신임을 받은 천재 중에 천재라고 합니다.”
“그래봤자 책상머리에 앉아 글이나 쓸 줄 아는 선비 아니냐?”
관해의 대답에 길태는 때리고 싶은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휙휙 내저었다.
“이런, 이런... 이러니 형님께서 아직 무식하시다는 겁니다. 그가 단순히 글만 잘 쓸 줄 아는 자였다면, 오늘 같은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군략에도 뛰어난 인재입니다. 그런 자가 학익진을 모르겠습니까? 당연히 우리가 학익진을 쓰면 보자마자 척 알아볼 겁니다.”
“뭐야? 그럼 대체 뭐 하러 학익진을 쓰자는 말이냐?”
“쯧쯧! 아직도 머리가 아니 돌아가시는군요.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황건적입니다. 황건적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습니까? 가난하고 더럽고 못 생기고 못 배운 놈들이 떼거지로 우르르 몰려다닌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뭐라?! 감히 누가 본좌에게 못생겼다고 했느냐?!”
“그게 가장 열 받는 겁니까? 아무튼 은연중 우리에 대한 경시가 깔려 있습니다. 이건 순유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학익진을 펼쳤다? 아마 순유는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말할 겁니다. 주군. 저들이 제법 근사한 전략을 들고 왔습니다. 어디서 학익진을 주워들은 것 같군요. 하지만 제가 있으니 걱정마십시오. 이 순유가 저들의 학익진을 파훼할 것입니다. 주군께선 저만 믿으십시오. 이러지 아니 하겠습니까?”
척하고 막대기를 들어 올리며 순유에 빙의한 길태를 보며 관해가 고개를 저었다.
“어째 이놈도 점점 미쳐가는 것 같군. 아! 그래서 어쩌자고?”
“여기까지 얘기했는데도 여전히 못 알아들으시는군요. 뭐 어쩔 수 없죠. 밥상을 차려줘도 못 드시니 밥숟갈을 목구멍까지 들이밀어 드리는 수밖에. 순유가 당연히 학익진을 알 것이고, 그에 대한 파훼법도 잘 알 겁니다. 이걸 역이용하는 겁니다. 학익진의 약점은 중군보다 양 날개가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순유는 이 점을 노리고 양 날개부터 공략을 할 것입니다.”
그제야 관해가 무릎을 탁 쳤다.
“옳거니! 그럼 양 날개 쪽에 함정을 파놓으면 되겠구나.”
“역시 제가 설명을 잘하니, 형님 같은 머리로도 이해가 되시는 군요.”
“크크크! 하여간 이 똑똑한 새끼. 전에 훔쳐 온 기름 좀 남았지? 좋다. 함정이 준비되는 대로 곧바로 출격한다.”
관해와 길태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군사들을 정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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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땡땡!
“적이다!”
요란한 타종 소리와 함께 청주 관군은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음? 애들을 좀 덜 팼나? 한동안 웅크리고 있을 줄 알았건만, 오히려 선제 공격을 해 오다니....”
이의민은 뜻밖이었지만, 전혀 곤란한 표정이 아니다. 또 한바탕할 때가 되니 신난 표정이다.
이의민을 따라 나온 순유는 조심스럽게 전장을 바라봤다.
“그래도 너무 방심하지 마십시오. 주군. 저리 자신만만하게 나온다는 건 아무래도 뭔가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온 것 같습니다.”
“후후. 그건 공달이 알아서 잘 봐주면 되는 것이지.”
순유까지 있으니 별 걱정이 없는 이의민. 망설일 것도 없었다. 바로 전군에 출병 명령을 내려 황건적들을 상대하러 나왔다.
황건적 주둔지 앞 거대한 벌판에서 맞붙는 두 군대. 확실히 병력 자체는 청주 황건적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직전 전투에서 제법 많은 병력의 피해가 있었지만, 어느새 그만큼을 보충해서 다시 온 그들이었다.
순유는 황건적들을 바라보다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의민에게 조언했다.
“주군. 적들이 학익진을 쓰고 있습니다.”
이의민도 학익진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다.
“호오?! 저놈들이 진법도 쓸 줄 아는가? 아무튼 학익진이라면 날개부터 썰어나가면 되겠군. 형님, 문원, 자의. 모두 적들의 양 측면 부분부터 공략을 한다!”
파훼법도 잘 아는 만큼 바로 학익진의 약점을 공략하려고 하는 이의민. 그때 순유가 다급하게 이의민을 제지했다.
“주군. 장군들. 모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순유는 황건적들의 진영을 자세히 보더니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주군. 그냥 중앙을 돌파하십시오. 그리고 태사자, 자네는 궁병을 이끌고 양 날개에 불화살을 퍼붓게.”
뜬금없는 순유의 얘기에 모두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이의민과 곽봉은 바로 순유의 말대로 할 준비를 했다. 그들 역시 순유가 왜 이런 조언을 하는지 이유는 몰랐지만, 순유의 말이니 무조건 따를 생각이다.
반면 장료와 태사자는 반문했다.
“군사.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저건 그냥 학익진이 아닐세. 학익진처럼 꾸며 놓고 양 날개에 함정을 파놓은 거야. 양 날개 쪽을 자세히 보면 저들 사이에 아무도 없는 선 하나가 보이지 않는가?”
순유의 말대로 자세히 보니 황건적들의 측면 쪽에는 군사들의 진영 사이 구덩이가 보였다. 그 구덩이를 멀리서 보니 하나의 선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순유는 황건적들의 진영을 보자마자 길태의 함정을 간파했다.
“왜 저기만 저리 구덩이를 파 놓았겠나? 저들도 정규 관군인 우리가 학익진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걸세. 즉 우리가 학익진을 파훼하러 양 측면으로 가는 것을 역이용한 함정이 틀림없지. 아마 저곳엔 기름이 발라져 있을 걸세. 우릴 유인한 다음 불 질러 버릴 모양이야.”
순유의 통찰력에 모두 감탄을 터뜨렸다. 이의민도 일단 순유의 말대로 할 참이었지만, 이유를 듣고 보니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확실히 사람 하나는 잘 뽑은 것 같았다.
“크흐흐! 그럼 답 나왔군. 모두 가운데로 돌격한다! 전군 진격하라!”
이의민의 명과 함께 군사들은 일제히 한 점을 향해 돌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