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몰려드는 사람들 (5)
한참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중얼거리던 곽가. 갑자기 어디론가 쏜살같이 뛰어갔다. 바로 이의민이 나갔던 방향으로 말이다.
“주군! 주군!”
놀랍게도 곽가의 입에서는 주군이란 단어가 나왔다. 그 누구도 주군으로 부를 것 같지 않던 그의 입에서.
순유 역시 놀라 곽가를 따라갔다. 그도 일이 이렇게 전개될 거라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봉효? 설마....? 같이 가세!”
과연 누구를 향해 주군이라고 외치는 것일까? 볼 것도 없었다. 그 대상은 당연하게도 이의민이다.
어느덧 이의민이 있는 곳까지 달려간 곽가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선언했다.
“이 곽봉효. 이제부터 후장군을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곽가는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이의민을 바라봤다. 따라왔던 순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쁜 듯 입 꼬리를 씰룩거리긴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표정이었다. 까다로울 것 같던 곽가를 설득하는 건 성공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의민을 설득하는 게 문제였다. 이미 곽가와의 대면에서 기분이 상한 이의민이 순순히 곽가를 받아 줄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주군. 물론 방금 전 봉효의 태도에 기분이 나쁘실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이의민은 놀랍게도 너무 쉽게 곽가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래? 그럼 내일부터 일해라.”
“예?!”
워낙 예상외였는지 순유가 오히려 반박했다.
“주군? 봉효를 이대로 받아주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봉효가 건방지긴 해도 능력은 최고라며? 내 밑에서 일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리 일하고 싶다는데 받지 않는 것도 웃기지 않는가. 단, 앞으로도 계속 건방진 태도를 보인다면 목을 벨 것이다.”
당연히 한 번은 거절할 줄 알았던 이의민의 아주 흔쾌히 수락을 해버렸다. 바로 직전에 곽가에게 완전히 마음이 돌아섰던 것 같았던 그 이의민이 말이다.
곽가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의민을 바라봤다. 아까 전보다 더 표정이 몽롱해진 것 같았다. 순유 역시 다시 한번 이의민에 대한 감탄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뛰어난 인재등용에 있어서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다. 쉬워 보이지만 군주로서 매우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은 덕목이었다.
그 어려운 덕목을 이제 20대인 이의민이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그 속에 알맹이는 그보다 훨씬 나이 많지만 순유는 그걸 알 수가 없다.
이의민이 다시 자리를 뜬 후 넋이 나가버린 듯한 곽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공달 형. 형님이 왜 주군을 따르는지 이제 확실히 알겠소.”
“그래. 하하. 주군은 저런 분이셨지. 그런데 사실 나도 아직 주군을 완전히 알지는 못하는 것 같네. 정말 특이하신 분이야.”
어쨌든 순유는 기분이 좋다. 아니. 좋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째질 것 같았다. 그렇게 원하던 곽가의 등용을 이뤘고, 이의민의 새로운 면모도 확인했다.
이제 곽가는 순유에 이어 부군사로서 청주에서 일하게 됐다. 곽가가 합류한 이후 밀렸던 청주의 각종 업무들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만큼 곽가의 능력이 출중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의 성격이 더 큰 역할을 했다.
최근 청주군으로 입영된 병사 하나가 곽가에게 군둔전에 대한 보고를 하러 왔다.
“부군사! 배정 받은 보리를 다 심었습니다.”
“뭐? 아이씨! 뭐 그런 걸 나한테 보고해? 앞으로 농사일은 곽 장군에게 보고 해.”
“예? 원래 군사께 보고를 드리던 일이었는데요?”
“그러니까 지금 바꿀 거라고. 이제 곽 장군이 알아서 일 처리를 할 거니까 모두에게 그리 전해.”
“그, 그런.... 곽 형님이 가만히 아니 계실 텐데....”
“나도 곽씨인데, 나 역시 곽 형님 아니냐? 그러니까 이 곽 형님의 말대로 하라고!”
“예?! 예... 예!”
가볍게 일을 떠넘긴다.
다시 하급관리 하나가 곽가를 찾았다.
“부군사! 농민들이 채무를 탕감해 달라고....”
“꺼지라고 해! 우리는 뭐 땅 파먹고 사는 줄 아나? 이것들이 호의를 베풀면 그게 권리인줄 알아요.”
“부군사! 청주 지역 호족들이 창국현에서 회담을 갖자고 합니다.”
“지랄하네. 우리를 졸로 보나. 지들보고 임치현까지 오라고 해.”
곽가는 자기 성격대로 모든 일들을 처리해버렸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처리 방식에 많은 이들이 불만을 토해냈다.
“어디서 저런 또라이가 부군사라고....”
“그동안 사정을 봐주다가 갑자기 이러면 어쩌라고....”
하지만 곽가가 막무가내로 처리한다고 생각되던 모든 일들에는 정확한 규칙과 기준이 있었다. 모든 항의를 이 규칙과 기준을 들어 반박하니 모두 꿀 먹은 벙어리였다.
즉, 인간미는 없되 확실한 선을 두고 일을 처리하니,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고, 덕분에 마비 됐던 각종 업무들이 순식간에 처리됐다.
천재라고 일컫는 곽가에게 너무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곽가도 방금 들어온 보고는 가볍게 처리하기 힘들었다. 그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군께 갈 것이다. 총군사도 오셔야 할 것 같으니 연통을 넣도록.”
곽가는 임치성 밖에서 왔다는 보고 하나에 이의민을 만나러 가고, 그 자리에 순유까지 불렀다.
“주군. 북해 상 공융에게서 지원 요청이 들어 왔습니다.”
북해라면 청주에 있는 국(國) 중 하나로 청주 내에서도 제법 규모가 큰 지역이었다. 그런 곳에서 지원 요청이 왔으니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의민은 청주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당연히 중요도를 잘 알지 못했다.
“북해가 침략을 받고 있다는 뜻인가? 심각한가?”
이의민의 질문에 이번에는 순유가 답했다.
“북해국은 청주에서 제법 중요한 곳입니다. 게다가 그곳의 국상인 공융은 청주에서 그나마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몇 안 되는 제후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이대로 청주 황건적들에게 쓰러지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황건? 백파적이나 흑산적 뭐 그런 도적놈들이 아닌가? 쯧쯧! 그런 놈들 하나 처리 못해서야.... 어쨌든 도적놈들이라면 저번처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면 되는 건가?”
이의민은 이미 백파적과 흑산적들을 어렵지 않게 상대했었다. 그런 만큼 같은 도적 집단인 청주 황건적 역시 쉽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순유는 청주 황건적도 백파적, 흑산적과 마찬가지로 쉽게 무너뜨릴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있다.
“백파적과 흑산적 역시 황건적이 뿌리인 도적이라 청주 황건적과 같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특히 그들의 병력 역시 비슷한 수준이니 더 그리 생각하실 수 있겠지요. 허나 병주 황건과 청주 황건은 조금, 아니. 많이 다릅니다. 병주 황건들은 단순 도적으로 변질된 자들입니다. 그러니 서로 구심점도 약하고 욕심도 많기에 끌어 들이기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 반해 청주 황건은 종교적 신념으로 똘똘 뭉친 놈들입니다. 순교를 택하면 택했지 절대 위협에 굴복하지는 않을 놈들입니다.”
한마디로 병력 자체는 비슷할지 몰라도 회유하기도 어렵고 정신적인 측면에서 상대하기도 훨씬 더 까다로운 적들이란 얘기였다.
그렇지만 그런 얘기에 쫄거나 곤란함을 느낄 이의민이 아니다.
“그래? 공달이 그리 말하니 확실히 더 까다롭긴 하겠군. 그렇다고 그놈들을 피할 것도 아니고, 내가 이 청주를 다스리려면 어차피 그놈들과 맞서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일단 북해로 가 보지. 가서 상대해보면 얼마나 대단한 놈들인지 알 테고.... 그리고 공융에게는 도와준 것에 대해 생색을 낸다면 여러 가지를 뜯어낼 수도 있겠군.”
“그럼 당장 북해로 출병을 시키실 겁니까?”
“당연하지. 지금 우리가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은 얼마인가?”
이의민의 질문에 곽가가 바로 답했다. 이미 이런 상황을 대비해 계산을 마쳐놨다.
“대략 2만정도입니다. 군사들은 총 4만이지만 무기가 너무 부족하여 실질적으로 쓸 수 있는 병력은 2만 정도입니다.”
“그런가? 공달은 나를 따라오고, 봉효 그대는 이곳에 남거라. 출정은 이틀 뒤로 할 것이다. 아! 그리고 공명이 친구를 데리고 온다고 했으니 돌아오면 셋이서 임치성을 잘 지키고 있어야 한다.”
이의민은 바로 출정 명령을 내렸다. 어쨌든 북해도 청주 땅인 만큼 결코 도적떼들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다.
이의민의 얼굴에 간만에 생기가 돌았다. 현재 청주에서 제일 한가한 사람이 그였다. 수하들은 농사니 훈련이니 내정이니 바빠 죽을 지경이지만, 그는 웬만한 일은 전부 순유, 곽가, 곽봉 등에게 맡기고 서황과 비무에만 열중했다. 그것도 최근 서황이 친구를 만나러 가버린 탓에 하지 못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 차에 몸을 풀 기회가 생겼으니 이의민은 북해로 가는 일이 더 즐겁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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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보면 볼수록 아주 마음에 드는 말이야.”
“히히힝!”
이의민은 자신이 탄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말도 기분이 좋은 듯한 울음소리를 냈다. 딱 봐도 명마의 기운을 풍기는 이 말은 이의민이 대사농에 임명된 이후 하진에게 받은 한혈마였다.
이의민과 하진의 사이는 토벌에 대한 논공행상 이후 최악으로 치달았다. 하진은 원소를 비호하려고 이의민을 말렸지만, 이의민은 그런 하진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의민이 자신의 수하일 것이라 착각하고 있던 하진으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하진은 이의민에게 한혈마를 선물했다.
하진으로서는 당연하게도 이의민에게 좋은 마음으로 이 한혈마를 선물했을 리가 없었다. 하진이 한혈마를 이의민에게 준 이유는 바로 이 말의 성격 때문이었다.
한혈마는 뛰어난 혈통으로 다른 그 어떤 말들보다 더 월등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힘, 속도, 지구력 어느 것 하나 뛰어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한혈마를 탐냈지만 그 누구도 한혈마를 길들이지 못했다. 한혈마는 자신의 등 위에 그 누구도 태우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올라타려 하면 거칠게 몸부림을 치며 떨어뜨렸다. 결국 아무도 올라타지 못한 말이 바로 한혈마였다.
그래서 하진은 이의민에게 골탕을 먹이려는 속셈으로 한혈마를 주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 사납던 한혈마가 이의민과 눈 한번 마주친 뒤엔 아주 순한 말처럼 행동했다.
덕분에 하진은 이의민이 떠난 후 땅을 치고 후회했다고 한다.
순조롭게 북해로 진군하는 이의민의 청주군. 그런데 이상한 건 청주 전역에 득실거린다는 황건을 이곳까지 오면서 한 번도 못 만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달. 황건적이 많다고 하지 않았나? 황건이라고는 전혀 아니 보이는데?”
“그래서 생각보다 공융이 더 위험한 상황입니다. 황건이 아니 보이는 이유는 이들이 죄다 북해성으로 몰려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 서둘러야겠군.”
순유의 예상대로였다. 북해성이 어렴풋이 보이는 곳까지 왔는데 이미 성은 황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멀리서 봐도 당장 황건들에게 성이 함락당할 것 같았다.
“보자. 동서남북 사문이 모두 놈들이군. 수는 대략 6만이라....”
이의민은 오랜 전장의 경험으로 한눈에 전황을 파악했다.
“동문 쪽으로는 공융군이 항전을 하고 있으니 우리는 반대쪽인 서문 쪽을 뚫어야겠군. 아무래도 적들의 주력이 동문에 몰려있을 터이니 그 길이 쉬울 것이야.”
순유도 전장을 보면서 같은 조언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사실 무력이야 알고 있었지만, 군략도 이정도로 능통할 줄은 몰랐다.
“시간이 없다. 전군 돌격! 내가 선두에 서겠다. 장료와 우금은 뒤에서 보필하라. 고순은 군사를 보호하라.”
이의민은 명을 내리자마자 선두로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다른 기마 군사들 역시 뒤처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이의민을 따라갔지만 그 차이는 더욱 벌어졌다. 한혈마의 우월한 속도는 그 어떤 말도 따라잡을 수가 없는 것 같다.
뒤따르는 장료와 우금 역시 이의민을 따라가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나라 역사상 대사농이 저렇게 선두에 선 적이 있을까? 어떻게 생각하나? 문원.”
“있을 리가 없지. 그나저나 주군께선 분명 보사출신이라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말을 탈 기회가 거의 없었을 것인데, 어찌 말과 한 몸인 것처럼 저리 타실 수가 있는지.... 하여간 대단하신 분이야. 우금. 서두르세. 자칫하다간 따라잡을 수도 없을 거 같군.”
아직까지 이의민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은 장료와 우금이다. 하지만 그 뒤를 따르는 둘의 발걸음은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