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몰려드는 사람들 (4)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살지 않는 폐성과도 같았던 임치성. 어느새 많은 이들이 오고 가며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 활기의 선봉장은 역시 곽봉이다. 그는 1만이 넘는 군사들을 직접 통솔하며 군둔전 운영을 전반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장수라는 자가 고작 그런 일이나 하느냐고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곽봉은 그런 세간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임치성 주변의 논과 밭은 나날이 늘었고, 곧 수확기가 되면 엄청난 수확량을 보일 것으로 예상됐다.
곽봉은 이 많은 군사들에게 먹일 군량이 충분해질 것을 생각하며 오늘도 열심히 농사일에 매진했다.
“야이 놈들아! 농땡이 피우지 말고 열심히 해라! 다 너희들 입으로 들어갈 건데, 농땡이 피우면 피울수록 너희들 손해다.”
“예! 곽봉 형님!”
“이놈들이! 형님이 아니라고 장군이라니까!”
곽봉은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순유를 찾아갔다. 그가 순유를 찾는 이유는 당연히 군둔전에 대한 중간보고를 하기 위함이었다.
“흐흐! 순 군사도 이번 예상 수확량을 보면 눈이 휘둥그레지겠지?”
하지만 곽봉은 순유를 만나지 못했다. 순유의 집무실 앞에는 수많은 이들이 줄을 서 있었다. 전부 곽봉처럼 순유에게 볼 일이 있는 자들이었다.
“다음 들어오시오!”
“에휴! 이제야 군사를 만날 수 있소? 1시진이나 기다렸네.”
1시진이나 기다렸다는 말에 기겁하는 곽봉. 하지만 그건 순한 맛이었다.
“워메! 뭔 놈의 인간들이....”
“응? 곽 형님 아니슈?”
“네놈이 여긴 왜 있어. 빨랑 가서 보리 심어야지.”
“아! 말도 마슈. 형님. 보리심은 거 순 군사께 보고하러 왔는데, 이거 오늘 안에 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소.”
“뭐? 얼마나 기다렸는데?”
“난 3시진 전에 와서 기다렸는데도 아직도 내 앞에 저 만큼이나 있소. 뭔 청주의 일은 순 군사가 다 하는 것 같소.”
곽봉은 눈이 뒤집어질 정도다. 방금 얘기한 이의 말에 따르면 곽봉은 이 줄을 기다렸다가는 오늘 안에 순유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순간 순유가 안타까워지는 곽봉.
‘군사에게 일이 원래 이리 많았던가? 쉴 틈은커녕 밥 먹을 시간도 없겠군.’
하지만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것이고, 곽봉은 순유와 함께 고통을 분담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순유를 좀 더 빨리 만나기 위해 꼼수를 쓰기로 했다. 헛기침을 하며 슬쩍 앞으로 나아가는 곽봉.
“커험! 내 아주 급한 일이 있어가지고....”
“어?! 형님! 지금 뭐 하는 거요?! 3시진 기다린 나도 있는데!”
“어허! 일의 경중이 다르지 않나. 난 매우 급한 일이니 이해해주게.”
“어어?! 칼만 아니 들었지 완전 날강도네! 이러는 법이 어디 있소?!”
얼굴에 철판을 깐 곽봉은 뒤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욕들을 무시하면서 겨우 안으로 들어갔다.
“야이! 개새끼야! 미쳤냐?”
“뭐 저딴 새끼가 다 있냐? 저 새끼 막아!”
“저놈 저거 죽여 버려!”
그런데 뒤에서 들려오는 욕설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욕의 수위가 점점 더 세졌다.
곽봉은 그래도 자신이 비장군인데 너무 심한 게 아닌가 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이것들이! 그래도 내가 비장군인데, 개새끼에 죽인다는 너무....?”
아무리 평소에 격의 없이 지낸다고 해도 새치기 좀 하는 걸로 장군직까지 지내는 상관에게 대놓고 쌍욕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물론 지금 상황이 일반적인 새치기라고 볼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곽봉의 예상과는 달리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이리 욕을 하는 건 아니었다.
곽봉 바로 뒤로 웬 젊은 서생 하나가 줄을 무시하고 따라 들어오는 것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전부 그 서생을 보고 욕을 하는 것이었다.
곽봉도 그 서생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자신이야 비장군 빨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먼저 갔다지만, 이 서생은 뭔가? 차림새나 뭐로 보나 그냥 시골 샌님으로 보였다.
“어이! 넌 뭔데 줄도 아니 서는 거냐?”
“그러는 형씨가 먼저 새치기를 한 것 아니오? 저 뒤에 있는 자들이라면 모를까, 형씨는 내게 뭐라 할 자격이 없소.”
너무도 당당한 그 서생의 말에 곽봉은 말문이 막혔다. 결국 어안이 벙벙한 채로 굳어져 있는 곽봉까지 제치고 먼저 들어가는 서생이다.
곽봉은 멍한 표정으로 그 뒤를 처다 보고 있다가 얼마 후 정신을 차렸다. 생각해보니 저 서생은 큰일이 난 것 같았다. 자신처럼 이의민의 측근도 아닌 자가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을 벌였으니 순유의 성격에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지 않았다.
“헐! 원래 일하던 관리도 아니고... 딱 봐도 시골 샌님 하나가 작은 명성을 믿고 군사를 만나러 온 모양인데....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놈. 아무리 우리가 급하더라도 순 군사가 저런 애송이를 쓸 리가 없지. 순 군사가 가장 싫어하는 게 저런 짓인데.... 보나마나 군사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치도곤을 당하겠지.”
곽봉은 서생을 한껏 비웃었다. 그러나 직후 곽봉은 다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순유는 치도곤은커녕 버선발로 마중 나와 그 서생을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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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유의 얼굴은 피로와 졸림으로 찌들어 있었다. 벌써 며칠째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업무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일은 많은데, 그 많은 일들을 할 사람은 순유밖에 없었다. 청주의 모든 일들을, 큰일부터 각종 잡무까지 순유가 도맡아 하는 중이었다. 기존의 관리들도 얼마 없었지만, 그나마 있는 관리들 역시 수준미달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순유는 오늘도 수백 장의 서신을 검토하고 수십 명의 사람과 면담을 해야 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다.
“저... 군사님. 웬 서생 하나가 군사님을 뵙겠다고 왔습니다.”
순유는 짜증이 난다는 듯 부관의 말에 손을 저었다. 얼마 전부터 임관을 하겠다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그런데 막상 순유의 마음에 드는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보나마나 임관이 목적이겠지. 시험을 보라고 하게.”
“그, 그것이....”
갑자기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달형. 나 봉효요. 봉효. 언제까지 세워둘 참입니까?”
순유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버선발로 뛰쳐나갔다.
“하하! 이 사람아! 이제야 오면 어떡하나? 자자! 안으로 드세.”
찾아온 이는 일전에 종요와 함께 만났던 곽가다.
“이게 뭐요? 일일 경작 보고? 하!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천하의 공달형이 고작 이런 잡무나 보고 있다니....”
“지금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자네가 날 좀 도와줘야 하지 않겠는가?”
순유는 은근하게 곽가를 영입하려 했다. 하지만 곽가는 당연히 거기에 쉽게 넘어갈 리가 없다. 천연덕스럽게 화제를 돌려버렸다.
“사실 오늘 길에 문약을 만났습니다.”
“오오! 문약은 뭐라고 하던가?”
“이미 주인을 정했더군요. 지금 그는 조조의 모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순유의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휴우! 내가 연통까지 넣었건만....”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보다는, 매일 찾아오는 조조를 돕는 게 맞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순유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단순히 이의민을 도울 사람이 하나 줄어서 그런 게 아니다. 순욱이란 인물은 그만큼 대단한 인물이고 놓치면 아까운 인물이었다.
더군다나 그런 인물이 아군이 아닌 적이 된다면 매우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다. 그리고 순유는 내심 조조를 원소나 원술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 조조에게 순욱까지 가세한다면, 차후 이의민에게 큰 위협이 될지도 몰랐다.
“하필이면 가도 조조에게 가다니....”
“하하! 최악의 상대를 적으로 두게 생겼습니다.”
“너무 크게 웃는 것 아닌가? 아무튼 말 돌리지 말고 아까 내가 말한 건 어찌 생각하는가?”
“말한 게 뭐요?”
“또! 또 모르는 척! 나를 돕는 것이 어떠하냐고.”
“훗! 저는 이미 문약과 마찬가지로 조조의 제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공달형과의 의리를 생각해서 대사농도 한 번 만나보려고 온 것입니다.”
곽가의 말에 순유는 섬뜩함을 느꼈다. 어쩌면 곽가도 조조에게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절로 오한이 돋지 않을 수가 없다.
“하하하.... 참으로 고맙네. 자! 이러지 말고 지금 뵈러 가지.”
순유는 혹시라도 곽가의 마음이 바뀔까봐 얼른 그를 이의민에게 데리고 갔다. 당연히 이후 면담 업무는 일단 정지가 되었고, 곽봉 등은 볼멘소리를 했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업무보고 따위가 아니었다.
순유는 곽가와 함께 이의민 앞으로 갔다. 순유가 죽어라 고생을 하고 있는 마당에 이의민은 한가롭게 서황과 대련을 하는 중이었다.
“주군.”
“오! 공달. 어서 오라. 그런데 옆에는....?”
“곽가라고 합니다. 영입을 한다면 주군께 아주 큰 도움이 될 문사입니다. 아직 젊긴 해도 어떤 면에서는 저보다 더 뛰어난 인재입니다.”
“오호라! 공달보다 뛰어난 면이 있다라.... 그럼 이 어린놈을 내가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것인가?”
이의민의 거친 언행에 불안해진 순유가 쩔쩔 맸다.
“노, 놈이라니요. 주군. 봉효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총기와 혜안이 있는 자인만큼 주군께서도 예를 갖춰 맞이하신다면....”
하지만 이의민은 순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막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넌 왜 아무 말도 없는가? 벙어리냐? 아니면 계집마냥 부끄럼을 너무 많이 타는 것이냐? 왜 말은 공달이 다 하고 넌 스스로 한마디도 하지 않지?”
결국 참고 있던 곽가가 폭발했다.
“뭐요? 대사농은 말을 가려 하시오. 난 원소와 조조의 부름까지 받았지만 공달형의 면을 봐서 여기까지 온 사람이오. 아무리 대사농이라도 내게 이런 대접을 할 수는 없소.”
“뭐? 그러면 내가 어찌 해주면 되는데? 벼슬이라도 줘?”
“하! 벼슬이라도 준다고? 지금 대사농의 무례한 언행에 내 마음은 이미 떠났소. 하지만 기회를 한번 드리겠소. 혹시나 원상형 같은 대우를 해준다면 내 마음이 바뀔지도....”
곽가는 계속 고압적인 자세로 나왔다. 이미 청주의 사정을 다 알고 있었다. 천하의 순유가 모든 잡무를 다 봐야 할 정도로 문사가 부족하지 않은가.
‘관심 없는 척 하지만 똥줄 타는 건 너다. 이제 슬슬 제발 와달라고 빌어야지?’
하지만 이의민의 반응은 곽가의 예상과 달랐다.
“그러니까 뭔가를 주면 날 따르겠다는 말인데... 이상하군. 정말로 이상해.”
“뭐, 뭐가 말이오?”
“그걸 왜 네가 정하지?”
“뭐, 뭐라....?”
황당함에 입을 쩍 벌리는 곽가.
“잘 들어라. 누구를 따를지 말지 그건 네가 정하는 게 아니다. 널 받을지 말지를 내가 정하는 것이야. 어이! 공달. 다음부턴 내 밑에서 일하고 싶다는 놈들만 데리고 오게. 그 중에서 내가 마음에 드는 놈을 뽑을 거니까.”
이의민은 자기 할 말만 끝내고 바로 그 자리를 떠버렸다. 그런 이의민을 보며 순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곽가는 꼭 얻어야 할 인재였지만, 아무래도 이의민의 태도 때문에 물 건너 간 것 같았다.
“봉효.... 미안하네. 아쉽지만 우리 주군과는 인연이 없나보... 응?”
순유가 보니 곽가는 충격을 받은 듯 자리에 서서 앵무새처럼 계속 같은 말을 중얼 거리고 있었다.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결정한다고? 이 천하의 곽봉효를 상대로...?”
곽가로서는 정말 충격이었다. 내로라하는 모든 제후들이 서로 자신을 모셔가려고 높은 자리를 약속하고 갖은 선물을 보냈다. 그런데 이의민은 그들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보여 주었다.
혼돈에 빠져있던 곽가가 갑자기 흥분된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이리 대한 자는 대사농이 처음이야.”
상황을 따져보면 지금 곽가의 말은 분명 이의민에 대한 악감정으로 나온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표정과 말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