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몰려드는 사람들 (3)
고순과 장료는 이의민과 만났다. 순유가 어두운 표정을 지을 때만 해도 둘은 이의민을 만나보지도 못할 거라 여겼는데, 어쨌든 얼굴까지는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다음이 문제였다. 이제 정원에게 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의민이 알게 되면 그가 분노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사람인 이상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고순과 장료다.
“그러니까 원소 그 놈이 병주로 갔다고? 하! 골 때리는 새끼가 진짜.... 거기에 여포 그 패륜아 새끼는 양부를 살해하기까지 했다라.... 말세로군. 그럼 정원이 우리에게 약속한 건 못 받는 건가?”
고순과 장료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의민을 힐끔거렸다. 이의민의 입에서 보상 문제가 나왔다. 거기다 불타는 집에 기름을 붓듯 순유가 더 기분 나쁜 부분을 곁들여 설명했다.
“그렇습니다. 주군. 게다가 원소 그놈이 기사회생할 기회를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대로 기주로 갔다면, 이번 일로 세력이 많이 약해졌기 때문에 한복이나 공손찬과의 다툼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런데 병주로 가서 그쪽 병력에다가 여포까지 획득한 셈이니, 이전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더 큰 세력을 구축한 셈입니다.”
“허나 여포 그놈이 원소의 아래로 들어갈 놈 같지는 않던데....”
“설사 그렇다고 해도 단기적으로 보면 여포가 원소에게 협력을 할 겁니다. 여포 입장에서도 반란 이후 병주를 휘어잡기 위해서는 원소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까요.”
계속해서 부정적인 얘기만 나왔다. 고순과 장료는 이의민이 당연히 분통을 터뜨릴 것이라 생각했다. 자칫하면 쫓겨날 수도, 아니. 쫓겨나기만 하면 다행이고, 최악의 경우 화풀이 대상으로 지목되어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의민의 다음 얘기에 둘은 어리둥절했다.
“뭐 그건 아쉽게 됐지만 됐어. 그래도 따지고 보면 남는 장사 아닌가.”
지금 이의민은 얻은 게 아무것도 없고, 잃은 것만 보였다. 정원에게 받았어야 할 보상이 날아갔으니 당연했다. 그런데 대체 뭐가 남는 장사라는 얘기일까?
순유 역시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남는 장사라니, 지금 상황에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순유의 질문에 이의민은 바로 고순과 장료를 쳐다봤다.
“저 두 놈 있잖아.”
그에 고순과 장료도 깜짝 놀랐다.
“고순과 장료라고 했지? 흑산적 토벌 때도 그대들을 지켜보았지. 둘 다 무예도 제법 출중하고, 또 군사들도 꽤 잘 다루는 것이 욕심이 나는 인재였어. 솔직히 그때 난 그대들이 탐났었지. 허나 그대들이 섬기는 주인을 배신할 놈들 같지는 않아서 말을 하지 아니 했어. 그런데 어떤가? 그대들은 더 이상 주인이 없지. 그러니 새로운 주인을 섬길 생각은 없나? 그대들도 나를 찾아온 것을 보면 주인의 복수를 해줄 대상을 찾는 것 같은데, 만약 나를 섬긴다면 그 복수를 해주겠다.”
이의민의 얘기에 고순과 장료의 두 눈이 촉촉해졌다.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고 설득하는 내용이 그리 세련되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안에 진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절대로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주군!”
**
유주 북평의 한 객잔.
거기서는 세 명의 사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손님들은 그 세 사람을 보고 황급히 나갔다. 셋 다 누더기에 가까운 복장을 입었는데도 피하는 걸 보면 아마 동네 건달 같았다.
그런데 그 세 사내 중 가장 상석에 앉은 사내는 입고 있는 누더기 복장과는 달리 몹시 차분하고 온화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귀가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큰 것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의례 술을 마실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고풍스럽게도 차를 마시고 있다. 입고 있는 옷과 행색을 보면 영락없는 촌부의 모습인데, 풍기는 느낌은 어딘지 모르게 기품을 품고 있으니, 뭔지 모를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런 사내의 좌우로 앉아 있는 두 사내는 상석에 앉은 사내와는 달리 매우 위협적인 외모였다. 왼쪽에 앉은 사내는 우락부락한 고래수염에 험상궂은 얼굴이었고, 오른쪽 사내 역시 시뻘건 얼굴에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아름다운 수염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둘 다 공통적으로 덩치가 웬만한 사람들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그렇다. 외모 묘사만 봐도 바로 알 수 있듯이, 이들이 바로 삼국지의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유비, 관우, 장비다.
조용히 차를 마시던 유비와는 달리 술을 마시던 관우와 장비. 특히 장비는 벌써 술이 제법 취한 듯 홍조가 올라와 있다. 물론 관우는 홍조가 있다고 해도 원래 면상이 시뻘겋기에 티가 안 나지만.
장비는 술에 취한 것 때문인지 갑자기 탁자를 내려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쾅!
“망할! 언제까지 이리 있어야 하오? 큰 형님.”
장비의 분통에도 유비는 눈을 감고 차를 한 잔 마실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우가 장비를 말렸다.
“진정하거라. 익덕. 형님께서도 생각이 다 있으시겠지.”
“생각이 있으시면 지금이라도 허심탄회하게 말씀해주시오. 이 아우가 답답해 미치겠소.”
그래도 유비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이에 관우도 불편한 표정으로 유비에게 슬쩍 말했다. 관우 역시 장비 못지않게 답답한 모양이다.
“형님. 제가 익덕을 말리긴 했지만 사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황건과 목숨을 걸고 싸운 우리가 왜 이렇게 촌부처럼 지내야 합니까?”
관우의 질문에 유비는 마지막 한잔 남은 차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나서야 유비의 입이 열렸다.
“너희까지 이 형을 한량으로 보고 있느냐? 대붕도 날개 짓 한 번을 하기 위해 몸을 웅크려야 하는데 이 비라고 다르겠느냐?”
“저희가 어찌 형님을 한량으로 보겠습니까? 단지 이 생활이 너무 오래된 터라....”
“지금은 난세다. 하북만 해도 유우와 공손찬, 거기에 원소와 한복까지 네 마리의 용이 있다. 아래로 내려가면 이의민과 조조, 그 보다 아래에는 유표나 원술, 손견 등이 있지. 물론 나는 그들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허나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자면 그들에 비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게 사실이다. 결국 그들 아래로 들어가서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유비의 말에 장비는 더 성질을 부렸다. 장비 입장에서는 유비가 남 밑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영 못 마땅했다.
“젠장! 형님이 그 놈들보다 못한 게 대체 무엇이오? 하다못해 이의민, 그놈도 얼마 전까지는 낙양 성문이나 지키는 보사였다고 했잖소. 그런 듣도 보도 못한 놈도 자사 질을 하고 있는 판국에....”
투덜대기만 하는 장비와는 달리 관우는 유비의 뜻을 어느 정도 알아챘다. 하지만 유비가 지금 한 말과 행보가 맞지 않아 여전히 의아스러웠다.
“형님. 그렇다면 원소든 유우든 어느 누구 밑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곳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방금 얘기했듯이 우린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면 그 누군가에게 크게 휘둘릴 수밖에 없겠지. 그러니 누구를 선택할지 신중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 미래가 바뀔 테니 말이다.”
그제야 관우는 납득을 했다. 장비는 여전히 옆에서 궁시렁거리고 있었지만.
“그럼 여태껏 누구 밑으로 들어가실지 고민하고 계셨던 겁니까? 그럼 아직도 결정을 하시지 못하신 거로군요.”
납득을 하긴 했지만 관우는 여전히 불편한 표정이었다. 결국 유비도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니 미래가 불안정하다는 얘기니까.
관우는 조심스레 의견을 밝혔다.
“형님. 그럼 공손찬 밑으로 들어가는 건 어떻습니까? 공손찬은 과거, 형님과 동문수학한 사이이지 않습니까?”
관우의 의견에 말없이 탁자를 두드리며 생각에 빠졌던 유비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공손찬은 유우와 척을 지고 그와 전쟁까지 하려고 한다. 그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야. 지금 공손찬이 가진 세력으로 어찌 유우의 상대가 되겠는가? 아마 급한 마음에 그런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이네. 이의민을 포함한 신진 세력들의 이름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니 위기감이 들었겠지.”
“죄송합니다. 형님.”
유비의 대답에 관우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별 생각 없이 공손찬을 추천했는데, 듣고 보니 사지로 들어가라는 조언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음은 장비 차례다.
“그럼 형님. 유우 밑으로 들어가는 건 어떻소? 유우라면 형님과 같은 황실 종친 아니오? 차근차근 유우의 신임을 얻고 그 밑에서 우리 세력을 키웁시다.”
“익덕이 간만에 옳은 얘기를 하는 군요. 제 생각에도 유우 밑으로 들어가는 게 가장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유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관우나 장비나 전혀 예상 못한 인물을 지목했다.
“나는 공손찬에게 갈 것이다.”
“예? 방금 형님께서 공손찬에게는 아니 가실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난 공손찬에게 가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지금 얼마나 어려운 길로 향하는 것인지 얘기했지.”
관우와 장비는 멍청한 표정으로 유비를 쳐다봤다. 유비의 말대로라면 당연히 공손찬에게 가지 않는 게 옳은 것 아닌가?
‘형님께서 술을... 아니. 차를 잘못 자셨나?’
“형님. 그러게 같이 술이나 마시자니까. 술 말고 차 같은 걸 마시니까 자꾸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것 아니오?”
“하하! 내 정신을 말짱하다. 그동안 수없이 고민을 했다. 우리 형제가 어디로 가는지에 따라 공손찬과 유우 간의 전쟁이 어찌 흘러갈지.... 만약 우리가 공손찬에게 간다면? 결과는 예상대로일까?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공손찬을 이기게 할 수도 있다.”
유비의 말에 장비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제야 유비가 왜 공손찬에게 간다는 지 이해할 것 같았다.
“하핫! 역시 우릴 알아주는 건 형님밖에 없소. 암! 우리가 가는 곳이 승리하는 곳이지.”
단순하게 기뻐하는 장비와는 달리 관우는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다시 물었다. 단순한 장비와는 달리 관우는 한 단계 더 생각을 할 줄 안다.
“형님 말을 믿습니다. 허나 왜 굳이 그런 모험을 하십니까? 우리가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고는 해도 굳이 더 어렵게 시작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찬 부자에게 쌀 한 바가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반대로 굶어 죽기 직전의 거지에게 쌀 한 바가지는 어떤가? 우리가 이미 유리한 유우 진영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불리한 공손찬 밑으로 들어가 그를 이기게 하면 그만큼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도 많아질 것이다. 그리 되면 우리가 유주의 지배자가 될 가능성도 더 커지는 것이다.”
유비의 명쾌한 설명에 탄복하는 관우.
“허어! 그런 깊은 뜻이....! 역시 형님이십니다. 이 어리석은 아우가 형님의 큰 뜻을 미처 몰라 뵀습니다.”
뭔지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론이 나서 신난 장비다.
“크크! 유우든 공손찬이든, 아무나 좋소! 이 장비가 한번 장팔사모를 들면 상대가 누구든 다 짓눌러 버릴 수 있소.”
이제 공손찬에게 가는 것으로 결론이 난 유관장 삼형제.
어차피 여기가 공손찬이 있는 북평이니 멀리 갈 것도 없다.
공손찬이 있는 북평 태수 치소 쪽으로 발걸음을 하면서 유비는 생각에 빠졌다. 지금 와서 결정을 번복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단지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유우를 쓰러뜨리고 공손찬의 세력 내에서 야금야금 세력을 키운다. 그리고 단번에 공손찬까지 무너뜨린다. 그럼 유주가 통째로 내 손에 들어온다.... 하지만 그 이후가 더 문제로군. 기주의 한복, 병주의 원소까지 상대를 해야 하니....’
생각을 하면서도 유비는 뭔가 거슬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게 이의민이란 이름이 자꾸 뇌리에 남았다.
‘이의민이라... 뭐 벌써부터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청주가 이 곳과 가깝다고는 하나, 하남이고... 또 그렇게 반짝 명성이 올랐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인물이 얼마나 많았던가.’
애써 이의민에 대한 생각을 떨친 유비는 힘찬 발걸음으로 북평 태수 치소를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