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몰려드는 사람들 (2)
“저기 도망친다! 잡아라! 잡지 못할 것 같으면 그냥 죽여도 상관없다!”
화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흑산. 거기서는 때 아닌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략 십여 명의 무리들을 수백의 군사들이 쫓고 있었다. 쫓기는 무리의 선두에 있는 사내, 아마 쫓기는 무리를 이끄는 자일 터였다. 그는 놀랍게도 병주 자사 정원의 오른팔인 고순이었다.
그가 다른 곳도 아닌 병주 한 가운데서 왜 이리 쫓기고 있는 것일까? 병주 자사 정원에게 큰 잘못이라도 한 것일까?
고순의 무리들은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있었지만 하나둘씩 쓰러졌다. 고순의 상태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한쪽 팔에는 화살이 박혀 있었고, 헐떡거리는 숨소리로 보아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아보였다.
“어떻게든 하내로 가야 한다.... 모두 힘을... 큭! 제길!”
그럼에도 고순은 포기하지 않고 퇴각로를 찾아 수하들을 이끌었다. 그로서는 절대 이대로 죽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닌 것일까? 앞쪽에 한 무리의 군사들이 다가 오고 있었다. 고순은 그 군사들을 보며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앞뒤 퇴로가 다 막힌 것이었다.
‘이제 끝인가... 주군! 죄송합니다.’
그런데 앞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군! 고순 장군! 저 장료입니다. 괜찮으십니까?”
“오오! 천지신명이시여! 문원 아닌가? 살아 있었군....”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소장이 탈출로를 봐두었습니다. 이리로.”
고순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앞쪽에서 오는 군사들은 적이 아니었다. 바로 장료와 그 수하들이었다. 장료 덕분에 고순과 수하들은 가까스로 적을 따돌리고 흑산을 탈출할 수 있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고순이나 장료나 지금 모습은 비참했다. 둘을 따르는 군사들은 천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둘 다 얼마 전까지 정원의 측근으로서 위풍당당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고순은 태원군 쪽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주군....! 크흑!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고순이 말하는 주군이란 당연히 병주 자사 정원이었다. 놀랍게도 이의민이 떠난 후 병주에서는 반란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반란의 주인공은 충격적이게도 정원의 양자인 여포였다.
사실 여포는 양자로 들어오긴 했지만 정원에게 특별한 부정을 느끼지도 않았다. 정원도 여포의 무력이 필요했고, 여포는 정원의 권력이 필요했으니 서로가 필요에 의해 부자지간이 됐을 뿐이다.
그래도 그동안은 여포가 순순히 정원의 양자노릇을 하면서 잘 지내왔었다. 하지만 그 둘의 관계는 흑산적 토벌전 이후로 점점 금이 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포가 일방적으로 정원에게 불만을 품게 됐다. 다른 것도 아니고 바로 흑산적 토벌 때문이었다.
여포는 이의민과의 흑산적 토벌 내기에서 결국 패배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굴욕적인 행위를 해야만 했다. 여포에게는 매우 치욕적인 일이었다.
그것 때문에 분노하고 있던 여포는 토벌에 관한 한가지 진실을 듣게 됐다. 바로 흑산에 일어난 산불이 이의민이 아니라 정원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여포는 그 산불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이의민을 이겼을 것이라는 망상에 빠졌고, 그건 곧 정원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여포는 정원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이런 굴욕을 겪지 않았을 거라며 악감정을 품게 됐다.
그래도 그거 가지고 반란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둘의 사이가 나빠진 정도였는데, 이후 갑자기 원소가 방문을 하면서부터 문제가 커졌다.
본거지인 기주로 가지 않고 갑자기 병주로 온 원소는 객으로 있으면서 여포와 자주 어울렸다. 그러면서 은근히 여포를 부추겼다.
“그대와 같은 큰 인물이 정원 같은 작은 사람 밑에 있을 필요가 있겠소?”
“험! 험! 부자지간이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소?”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정 자사가 그대를 진심으로 아들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대가 이의민 그 개자식에게 굴욕을 당할 때 보고만 있었겠소? 그것만 봐도 정 자사는 그저 필요에 의해 그대를 이용만하고 있을 뿐, 진정 아들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잖소.”
결국 여포는 원소의 꼬드김에 넘어갔다. 그리고 원소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여포는 철저한 것과 거리가 멀지만, 그 뒤를 지원하고 있는 원소는 철저한 사람이었다. 여포가 사전에 들키지 않고 반란을 할 수 있도록 철저히 계획을 세웠고, 결국 반란은 완벽한 성공으로 이어졌다.
눈치 챌 틈도 없이 일어난 반란에 정원은 어찌 대처해보지도 못한 채 당하고 말았다. 고순과 장료도 정원의 목이 떨어지고 난 이후에야 그 사실을 알았으니 말이다.
어쨌든 고순과 장료는 겨우겨우 탈출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크흑! 여 공자.... 아니지. 여포. 그 개자식이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송구합니다. 소장이 미리 낌새를 눈치 챘어야 했는데....”
“그것이 어찌 자네의 잘못이겠나? 오히려 주군과 가장 가까이 있던 내가 알아차려도 알아차렸어야 했지. 내 잘못이네.”
둘과 도망친 천여 기의 군사들은 드디어 목적지인 하내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목표로 하던 하내까지 왔지만 둘의 표정에는 여전히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이 이후의 계획은 전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병주로 돌아가서 여포와 원소의 목을 베고 싶었지만, 현실성이 너무 떨어지는 생각일 뿐이다. 고작 천여 기의 군사로 어찌 여포와 원소를 이길 수 있겠는가.
결국 남은 건 다른 제후를 찾아가 몸을 의탁하거나 도적들처럼 유랑하며 떠도는 것밖에 없었다. 고순은 나름 결심을 내린 듯 장료에게 말했다.
“고마웠네. 문원. 자네는 알아서 살 길을 모색해보게.”
“예? 그럼 장군께서는 어찌하시려고....?”
“나는 주군의 원수를 갚기 전까지는 눈 감을 수 없네.”
“당랑거철입니다. 장군 혼자 어떻게 주군의 복수를 한단 말입니까?”
“나 혼자 가서 그들에게 죽겠다는 게 아닐세. 그건 복수라고 할 수도 없지. 지금 그들에게 개죽음을 당한다는 건 주군께서도 원치 않는 일일 게야. 복수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힘이 있는 자를 찾아 가는 것일세.”
“그런 자가 있습니까?”
“있지. 여포와 원소를 박살내고 주군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자가 하나 있지 않은가. 나는 그에게 가겠네.”
“그런 자가 도대체....?”
장료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천하무식인 여포 혼자만이라면 모를까 거대한 원가의 힘을 가진 원소도 함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둘을 이겨낼 만한 이가 없었다.
“바로 후장군일세.”
고순의 말에 장료의 눈이 크게 떠졌다. 확실히 다른 이라면 몰라도 이의민이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군요. 그럼 소장도 같이 가겠습니다.”
결국 고순의 행보에 장료도 함께 했다. 둘과 일천 기의 군사들은 다시 하내를 떠나 청주로 향했다.
**
“아! 멍청한 놈아! 진짜 이 쉬운 거 하나를 못하느냐? 딱 한번만 더 보여준다. 퉤.”
“역시 곽 형님의 괭이질은 천하제일이오.”
“이 새끼가? 곽 형님이 아니라 곽 장군이라니까.”
곽봉은 많은 군사들 앞에서 으스대면서 괭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낙양 경비병이었던 곽봉은 놀랍게도 농사 경험까지 제법 있었다. 덕분에 청주군이 된 백파적과 흑산적 잔당들에게 농사일을 가르치는 건 곽봉이 전담했다.
그리고 곽봉은 남들에게 뭔가를 가르치는 것까지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가르치는 방법이 약간 상스럽기도 하면서 거칠었지만 농사를 처음 해본 이들도 알기 쉽고 따라 하기 쉽게 가르치고 있다.
덕분에 청주의 군둔전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순유는 감탄을 하며 곽봉과 청주군을 바라봤다. 사실 처음에는 곽봉을 우습게 봤다. 이의민 같은 인물이 왜 곽봉을 형님으로 모시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물론 실제로는 곽봉이 수하나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그런데 곽봉을 보면 볼수록 이의민에게 크고 작게 도움이 되고 있었다. 농사일을 군사들에게 가르치는 것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다. 곽봉은 이번 토벌전의 공으로 비장군까지 오르게 됐다.
그런데도 곽봉은 유세를 떨지도 않고 말단 보사들과 시시껄렁한 농을 주고받으며 가깝게 지냈다. 특히 청주군에 편입된 지 얼마 안 된 이들, 관리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던 도적출신인 자들도 곽봉의 그런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열고 소속감을 가지고 있었다. 군사들이 하나의 청주군으로 뭉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저 운 좋게 주군의 곁에 있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나도 감이 떨어졌군. 저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군에서 곽 장군뿐이다. 군사들이나 백성들 사이에서 괜히 청주의 2인자라고 불리는 게 아니로군. 주군 곁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할 이가 나뿐이라 여겼는데, 참으로 오만한 생각이었다. 나도 분발을 해야겠어.’
삼국지에서 조조의 3대 책사라고 불렸던 순유가 곽봉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열심히 내정 업무를 보는 순유. 뜻밖의 보고를 받게 됐다.
“뭣이? 대략 천기의 군사들이 성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순유는 순간 황건적이라도 쳐들어온 것인지 걱정했지만, 이내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건적이라면 고작 천 명만 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대체 어떤 자들이지?’
순유는 직접 성문 쪽으로 나가보았다. 성문 쪽에서는 농사일을 하다 말고 달려온 곽봉과 군사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부분 아직 병장기 보급을 받지 못해 괭이라도 잡고 있다.
곽봉은 살짝 떨리는 음성으로 순유에게 물었다.
“군사. 저들이 혹시 황건적입니까?”
또 전쟁을 치러야 하는 줄 알고 살짝 쫄은 모습이다.
“저들의 정체가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황건적은 아닐 겁니다.”
순유의 대답에 자신감이 생긴 곽봉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성문 위에서 천여 명의 무리들에게 외쳤다. 이럴 때보면 허당 같은 면도 많다.
“네놈들은 누구냐?! 응?”
그런데 곽봉은 선두에 있는 자들의 얼굴이 낯익다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 보니 이미 구면인 자들이었다.
“당신들은 분명 병주의... 군사! 저들은 정원의 수하들이오.”
곽봉의 설명이 없어도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먼저 정체를 밝혔기 때문이다.
“병주자사 정원님의 아래에 있던 고순이라고 합니다. 청주자사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순유는 의아함을 느끼고 고순에게 물었다.
“병주에서 어찌 이리 먼 곳으로 오셨습니까? 병주자사께 무슨 변고가 생긴 겁니까?”
순유의 질문에 고순은 처음부터 사실대로 얘기할 생각은 없었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자신들을 이의민이 순순히 받아줄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소. 우리는 그저 청주자사께 전할 얘기가 있어서 이리 온 것뿐이오.”
하지만 순유가 날카롭게 상황을 파악했다.
“말이 아직까지도 헐떡이고 있고 뒤에 있는 병사들 역시 넝마덩이군요. 딱 봐도 누군가에게 쫓기던 모양새입니다. 그리고 전할 얘기가 있으면 전령을 보내면 될 것을 장수가 직접, 그것도 군사들까지 천 명을 몰고 올 이유가 무에 있습니까?”
순유의 추측에 장료는 고개를 저으며 사실대로 얘기하자고 한다.
“고 장군. 숨겨봐야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하나를 보고 열을 아는 자 같습니다. 여기서 더 거짓을 말해봐야 의심만 살 것 같습니다.”
결국 고순은 솔직히 얘기하기로 했다.
“군사라고 하셨습니까? 방금 소개한대로 나는 고순이라고 하고, 여기 이 자 역시 정원님을 모셨던 장료입니다. 짐작대로 제 주군은 원소와 여포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희는 복수를 위해 청주자사께 의탁을 하고자 합니다.”
순유의 얼굴이 굳었다. 아들에게 살해당한 정원이 안타까워서? 당연히 아니다.
‘그럼 정원이 약속한 물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정원에게 받아낼 물자가 없어졌다. 게다가 정원의 수하였던 자들이 별 도움도 안 되는 병력을 데리고 와서 받아달라고 하는 것도 모자라 복수까지 해달라고 하고 있다.
당연히 이들이 곱게 보이지 않는 순유다.
고순은 순유의 표정을 보며 앞이 깜깜해지는 걸 느꼈다. 상대가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게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니 자신이 이의민이라도 자신을 받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순유는 당장 축객령을 내리지 않았다. 결국 결정은 이의민이 해야 된다.
“일단은 주군을 만나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