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35화 (35/175)

35. 몰려드는 사람들 (1)

이의민은 백파적과 흑산적 토벌을 통해 무려 2만이나 달하는 군사를 휘하에 넣었다. 그리고 예정대로 토벌의 최고 공신이 되어 대사농과 청주자사를 겸임하게 됐다. 원래 제후였던 왕광과 교모도 일등 공신에 임명되어 적절한 포상을 받았고, 기도위의 직위만 있었던 포신은 제북 상으로 임명됐다. 특히 포신의 경우 제북 상이 되면서 제후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덕분에 포신이 받은 감동은 왕광과 교모에 비해 훨씬 더 컸다. 포신은 각자의 근거지로 돌아가기 전 이의민을 찾아왔다.

“이 모든 것이 주군 덕분입니다.”

“그래. 앞으로 거기, 제북이라고 했나? 잘 다스려보라고. 차후 내게 힘이 될 수 있도록. 물론 내가 자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언제든지 도와줄 것이야.”

감동의 눈빛을 계속 쏘아대던 포신은 큰 결심을 내렸다.

“우금. 앞으로 나오게.”

“옛. 주군.”

우금은 포신의 부름에 이의민 앞에 섰다. 이의민은 포신과 우금이 대체 왜 그러는 것인지 전혀 몰랐다.

“우금 장군. 그대는 여태껏 나를 따라왔다. 하지만 내가 그대를 품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았지.”

“아닙니다. 주군....”

“물론 내 수하가 곧 주군의 수하이지만.... 그래도 좀 더 큰 사람 곁에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주군. 우금을 데려가 쓰십시오.”

수하인 우금을 이의민에게 내주려는 포신이다. 어찌 보면 전 재산을 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마음을 먹고 내린 결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의민도 적잖이 놀랐지만 굳이 사양하지는 않았다. 이번 토벌로 우금과 같은 수하가 곁에 있으면 좋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우금 못지않은 서황도 있지만 인재는 다다익선 아닌가.

더군다나 우금도 포신에게 미안해하면서도 이의민을 따르는 것에 대한 기대가 큰 듯 보였다. 포신도 그런 우금의 마음을 알기에 그를 이의민에게 보내주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주군.”

“아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나를 주군이라 불러서는 아니 되지.”

그렇게 우금과 함께 청주로 가게 됐다.

자사가 된 이후 처음으로 발령지에 발을 내딛은 이의민.

“주군. 저 곳이 자사치소입니다.”

이의민은 청주 임치현에 있는 청주 자사 치소로 들어갔다. 막상 자사 치소로 온 이의민과 일행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대적인 환영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자사가 부임해 왔다는데 코빼기 하나 내비치는 인간이 없었다.

백성들은 관군 복장을 한 이의민을 보고 오히려 도망쳤고, 나름 큰 성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활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아무도 없는 저주받은 성에 들어온 것 같았다. 실제로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리 느껴질 만큼 이곳의 상황이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이의민도 순유나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청주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심지어는 이의민에게 청주의 소식을 알려주었던 순유조차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전해 듣기만 했을 뿐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는데, 실제로 보니 상상 이상이라는 표정이다.

“허어! 이 정도라면 관과 군이 아무런 역할을 못하고 있는 듯하군요.”

그래도 이의민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치소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치소를 지키는 관리도 군사의 숫자도 일반적인 자사 치소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적었다. 이 정도 규모라면 일반적인 태수 치소 수준도 한참 못 되고, 기껏해야 작은 현의 현령 치소 정도나 될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

숫자만 적은 게 아니다. 자사 치소를 지키고 있는 관리나 군사들의 수준 역시 낮았다. 자사 치소에 있을 법한 고급 관리나 장수는 하나도 없고 말단 수준의 하급 관리, 장수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의민이 치소 안으로 들어가니 그들은 그제야 굽신거리며 이의민이 온 것을 눈치 챘다.

“자, 자사님? 오셨습니까?”

“그래. 내가 바로 청주 자사로 발령받은 이의민이다. 헌데 여기 상태는 어찌 이런가? 여기뿐만 아니라 청주의 전반적인 꼴이 개판이더구나.”

이의민은 하급 관리인 영추로부터 청주의 대략적인 상황을 듣게 됐다. 역시 낙양에서 듣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영추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청주는 청주병으로 유명한 황건적들이 다스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황건적들은 관군마냥 청주 여기저기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들의 말이 곧 법이었다.

원래 있었던 청주의 관리들은 황건적들이 두려워 다른 곳으로 도망치거나 숨어버렸다. 아니면 아예 황건적들과 결탁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먹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그래도 몇몇 관리들은 청주의 상황을 해결하고자 군사들을 증원하고, 낙양에 도움을 청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백성들의 민심은 이미 다 떠나가 오히려 황건적을 도와주었다. 낙양에 요청한 도움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니 그들도 결국 포기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암울한 청주의 상황을 들은 순유의 표정이 굳었다.

“허어! 그렇다면 남은 관군들은 없느냐?”

“예. 전부 다 흩어지고 이곳에 남은 이들이 전부입니다.”

영추의 설명대로라면 청주 안정화고 나발이고 안위마저 위험할 정도다.

이의민이 2만이라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구하긴 했지만 황건적들을 상대하고 청주를 안정화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면 징병을 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아니 되겠군. 주군. 청주 전역에 징병 방문을 내걸어 조금이라도 더 군사를 모아야합니다.”

순유의 말에 영추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으리. 이전에 있던 관리들도 징병을 하려고 했었습니다. 허나 현재 청주 백성들 대부분 관군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황건적이 되고 싶어 합니다. 효과는 없을 겁니다.”

“그래도 그 수밖에 없지 않느냐.”

순유의 말대로 당장 병력을 늘일 방법은 징병 밖에 없었다. 일단 시도는 해보기로 했다.

영추는 백성들이 관의 징병에 절대 응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고관으로 온 순유가 명을 내리니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이래봤자 어차피 군사로 자원할 이는 아무도 없을 텐데....”

하지만 영추는 얼마 후 믿기지 않는 광경을 목격했다. 징병 방문을 보고 찾아온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려 2만에 가까운 숫자다.

“이, 이럴 리가....?”

황당해하는 영추. 그런데 정작 명령을 내린 순유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유뿐만 아니다. 모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2만에 가까운 징병 지원자들을 바라봤다.

곽봉은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징병 지원자들을 향해 물었다.

“너희들! 정말 관군에 입영하기 위해 온 것이 맞느냐?”

상상 밖의 지원자 숫자라서 의심을 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행색 때문이다. 2만에 가까운 그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백성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디서 도적질이나 해먹고 산 이들 같았다. 이 청주에서 2만이나 되는 징병 지원자가 있을 리도 없고, 지원하러 온 이들의 행색 역시 황건적의 그것과 비슷해 보이니 의심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그들로부터 뜻밖의 외침이 들려왔다.

“곽봉 형님!”

“서 장사! 우리 좀 거둬 주시오!”

지원자들이 외치는 소리에 더 황당한 표정을 짓는 서황과 곽봉들. 언제 봤다고 이름까지 부르며 친한 척인가.

그런데 지원자들을 자세히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들이었다.

“이 새끼들이 지금 무슨 수작질을....?! 이놈들! 나와 내 아우의 이름은 어찌 알았느냐? 우리 뒷조사라도 한 것이....? 응?! 너희들은....?”

자세히 보니 그들의 정체는 백파적과 흑산적 잔당들이었다. 백파적, 흑산적 토벌 때 딱 정해진 수만 포로로 받고 나머지는 방생했었다. 나머지 이들까지 함께 데려가기에는 재정적인 문제도 그렇고,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방생했던 이들이 청주까지 따라온 것이었다.

때마침 이의민이 대부를 들고 이들 앞에 나타났다.

“다시 도적질을 하게 된다면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했을 텐데?”

“히익! 장군님. 그게 아닙니다. 감히 어느 분의 협박, 아니. 명이라고 저희가 거역하겠습니까? 저희는 도적질을 하려고 다시 뭉친 게 아닙니다.”

이들은 그간 있었던 구구절절 사연을 이의민에게 고했다. 이들의 행보는 다음과 같았다.

처음에는 그들도 각자의 고향에서 잘 살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배운 게 도적질이랑 싸움질뿐이니 먹고 살기가 막막했다고 한다. 결국 먹고 살 길을 찾지 못하고 이의민을 따르기 위해 낙양까지 왔단다. 그런데 낙양 경비병들에게 막혀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다가, 이의민이 청주로 간다는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따라왔다는 얘기였다.

덕분에 병력 부족문제는 해결이 된 듯했다. 하지만 막상 징병을 하려고 했던 순유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곽봉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순유에게 물었다.

“공달 선생. 좋지 아니 하시오? 이제 병력 문제는 해결이 됐잖소.”

“그게...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저도 징병을 하면서도 이리 많은 숫자의 지원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리 많은 수의 군사를 받을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준비라 함은....?”

“이들을 먹일 군량도 없고, 병장기, 보급물자도 없습니다. 즉, 이 많은 이들을 먹여 살릴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청주의 창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래도 이의민이 가져온 물자가 제법 있었으니 어느 정도의 군사들은 감당할 수 있었지만, 갑자기 2만이나 늘어나면 감당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소? 이런.... 어이! 너희들! 안 됐지만 너희들을 다 받을 수는 없다. 너희들을 다 먹여 살릴 식량도 없고, 무장을 시킬 장비도 없단 말이다.”

곽봉은 태행산과 흑산에서 했던 것처럼 몇 명까지만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의민이 잠시 고민하더니 곽봉을 막았다.

“형님. 가만히 좀 계시오.”

“뭐? 그럼 이들을 다 받을 생각이냐?”

“공달. 저들의 먹일 식량이 아예 없는가?”

“아예 없진 않습니다. 허나 기껏해야 올해를 넘기기가 힘들 겁니다.”

“올해라.... 우리가 땅은 많지?”

“공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대부분 황건적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문제지만.”

“음. 그럼 간단하네. 얘들을 이용해서 일단 황건적부터 친다.”

“예? 설마 이후에 군량이 떨어지면 군사들을 내보내시려고....?”

“아니. 황건적만 없으면 땅은 많고, 사람도 많겠다. 얘네들 놀려서 뭐해?”

이의민이 여기까지 말하니 바로 무슨 뜻인지 눈치 채는 순유.

“아! 둔전을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과거 무제께서 비슷한 일을 하셨다 들었습니다. 저도 생각 못 한 일인데.... 주군!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의민이 하려는 건 군둔전이었다. 둔전제는 병사들이 훈련도 하면서 농사일까지 하는 일종의 자급자족 체제였다. 한나라에서는 무제가 시행했다가 곧 사라진 제도였다.

“흠. 흠. 뭐 그런 걸 가지고....”

순유의 감탄에 이의민은 헛기침을 하며 얼버무렸다. 콧대가 높아질 만한데도 어색해 하는 이유는 이의민이 스스로 생각해낸 게 아니기 때문이다. 둔전제는 고려 시대에 이미 몇몇 지역에서 시행되고 있던 제도라 이의민이 쉽게 생각해냈다.

순유는 희망이 생겼다면 좋아하다가 다시 표정을 굳혔다. 결정적인 문제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들이 쉽게 받아들이겠습니까?”

설명만 들으면 마냥 좋아 보이기만 하는 군둔전이지만, 아주 단순하면서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군사들은 보통 훈련에 매진한다. 그런데 군둔전을 하게 되면 훈련에 농사일까지 추가되는 셈이다. 고되기 때문에 군사들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이다. 괜히 중단된 제도가 아니다.

“뭐 물어보면 알겠지.”

이의민이 군둔전을 하게 될 거라고 지원자들에게 말하자 아니나 다를까 심한 반발이 나왔다.

“우리는 이의민 장군을 존경해 그 분의 검이 되기 위해 왔지 농사 따위를 지으러 온 게 아니오!”

“옳소! 힘든 훈련을 하고 거기다가 또 농사까지 지으란 말이오?”

“조용!”

여기저기서 반발이 튀어나오자 이의민은 사자후로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리고는 아쉬운 게 없다는 듯 지원자들에게 통보했다.

“뭐 나도 너희들한테 억지로 나를 따르라고 할 생각 없다. 다 떠나도 좋아.”

“흥! 그리 말하면 우리가 안 갈 줄 알고? 자! 형제들 짐 쌉시다.”

다들 시위라도 하듯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런데 이의민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단! 둔전을 경작할 자들에겐 충분한 휴식시간을 보장하겠다.”

“그, 그렇다고 우리가 넘어갈 줄....”

“그리고 확실한 포상을 약속하지. 둔전에서 성과를 보인다면 그 중 일부를 개인의 재산으로 인정한다.”

“그, 그럼 열심히 하면 수확물 일부가 우리 것이 된다는 말...”

수군거림이 커졌다. 그런데 이의민의 공약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군적과 농적을 구분하지 않겠다. 즉 농사일만 잘해도 제법 그럴싸한 작위를 얻을 수도 있단 말이지.”

2만의 지원자들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조, 좋은데....?”

그래도 의심의 목소리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어떻게 믿고? 우리 같이 천한 놈들에게 작위를 준다고?”

이의민은 그들에게 쐐기를 박듯 의문을 해결했다.

“나! 이의민! 후장군이 되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소문도 듣지 못했나? 난 얼마 전까지 보사였다. 능력이 중요하지 출신이 중요하진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란 말이다!”

이제 다들 떠날 마음이 싹 사라져 있었다. 전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이의민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지원자들 중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장군! 저는 이락이라고 합니다. 정말 말씀해주신 것들을 다 지켜주실 겁니까?”

“물론이지. 그래도 내키지 않는가? 그럼 얼마든지 떠나도 좋다.”

이락은 이의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실 예전부터 꼭 한번 농사를 지어 보고 싶었습니다. 부디 제게 농사짓는 법을 알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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