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토벌이 끝난 후 (3)
이의민의 얘기를 들은 종요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칭찬을 들은 건 기분이 좋은 일이라지만, 이미 자신이 그의 휘하가 된 듯 얘기하니 좀 어처구니가 없어진 종요다.
어쨌든 이의민은 종요를 자신의 사람으로 기정사실화 하는 듯한 얘기를 계속 이어갔다.
“대사농이 뭐 황실의 물자나 재정을 관리하는 거라던데...? 그걸 하려면 아무래도 낙양에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럼 내가 청주 자사로 발령받아 간다고 해도 낙양에 자주 왔다 갔다 할 테니, 여기서 날 보조해줄 사람이 필요하잖은가? 그 역할은 원상이 딱 좋겠군.”
거기에 또 맞장구를 치는 순유.
“저는 주군을 따라 청주로 갈 계획이니 원상형이 낙양에 남아서 대사농의 속관이 되어 업무를 보조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싶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내정 부분은 원상형이 저보다 더 낫고요.”
결국 종요는 참지 못하고 굳은 어조로 둘의 말을 끊었다.
“지금 후장군께서는 너무 앞서나가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장군을 따른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종요는 호기롭게 얘기를 하면서도 자신의 얘기에 이의민이 어찌 나올지 조마조마했다. 아무래도 이의민은 자존심 강한 무인으로 보였고, 그러니 자존심이 상했다며 화를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의민은 종요의 예상과는 달리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대답했다.
“상관없어. 자네가 내 사람이 되든 아니 되든 말이야.”
“무슨 뜻입니까? 저를 겁박하시는 겁니까?”
“겁박은 무슨.... 자네야 말로 오해하나본데, 나 역시 자네에게 내 심복이 되라고 얘기한 적이 없네. 단지 대사농 속관 자리를 자네에게 주려는 것뿐이야.”
순간 종요는 이의민의 얘기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 대사농 속관 자리를 준다는 것이 심복이 되라는 뜻 아닙니까?”
“훗! 머리가 비상하긴 한데 한쪽으로만 닫혀 있군. 그냥 맡은 일만 잘 할 수 있는 사람만 있으면 되지 굳이 심복까지 필요한가?”
“그, 그런....?!”
종요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대사농 속관은 대사농의 최측근 자리였다. 그런 자리는 당연하게도 가장 충성스러운 심복으로 꾸려야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종요는 순간 이의민이 잘 몰라서 하는 얘기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 일은 황실과 국가의 재정운영이 결정되는 자리입니다. 사실 대사농보다 더 깊게 실무에 연관이 되는 자리니 어찌 보면 최종결정권자인 대사농보다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자리를 심복도 아닌 제게 준다고 하십니까?”
“자네 말대로라면 심복이기에 능력도 못 되는 자를 그 자리에 앉힌다는 게 더 말이 아니 되는 것 아닌가. 자네가 내정에 있어서만큼은 공달보다 더한 인재라며? 그러니 그 자리를 준다는 것이야. 일단 해봐. 해보고 마음에 안 들면 때려치우든가. 대신 그만 둘 거면 말이라도 해주고 가.”
그런데 지금 이의민의 말을 들어보니 종요가 지금까지 가져왔던 상식이 깨부숴지면서 머리가 트이는 느낌이었다.
“사람을 너무 믿으시는 거 아닙니까? 제가 사리를 위해 국가의 재산을 은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뭐 그러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런데 어차피 누가 됐든 그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내 심복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그리고 난 자네를 믿는 게 아냐. 공달을 믿는 거지.”
종요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남들에게는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종요 자신에겐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간 후 마침내 그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종 원상. 이 시간부로 장군을 저의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번에는 오히려 이의민이 당황했다.
“음?! 갑자기 이러니 조금 당황스럽군... 어찌됐건 잘 부탁하네. 원상. 공달을 비롯해 내 수하가 된 모두에게 한 말이지만, 나를 배신하지만 않는다면 나 역시 자네들을 내 일부라고 여길 것이야. 이만 가봐야겠군. 내일 폐하의 연회도 있어서 말이야.”
그렇게 이의민은 객잔을 나섰다.
종요는 그런 이의민의 뒷모습을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알겠군. 자네가 왜 저 분을 따르는지....”
“훗! 겪어 봐야 안다는 제 말이 틀리지 않았지요?”
“그런데 우리 주군 말일세. 정말로 얼마 전에 관직을 얻은 분이 맞는가?”
“맞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말단 보사에 불과하셨죠. 그것도 낙양 외성 경비병이셨습니다.”
“정말 그러한가? 허! 이해할 수가 없군.”
“왜 그러십니까?”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분위기, 그리고 사람을 다루는 솜씨, 이 모든 것들이 절대 평범한 범인의 것이 아닌 것 같네. 오랫동안 누군가를 부려보고 높은 곳에 있었던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모습인데.... 허허! 거 참....”
“그렇습니까? 원상 형은 그런 게 보이십니까?”
“내가 그래도 자네보다는 밥을 더 먹었으니까 말일세. 아무튼 내가 주군으로 모시기로 했지만 참으로 대단하고 알 수 없는 사람인 것 같군.”
둘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객잔에 남아 술을 더 마셨다. 단순히 놀고 즐기려고 마시는 술이 아니었다. 이제 종요도 본격적으로 이의민의 사람으로서 할 일을 찾는 중이다.
“흠... 그런데 아무래도 주군께서 청주 자사로 가시면 당분간은 계속 청주에만 계시겠지?”
“그렇지요. 아무래도 황건의 잔당 때문에 청주의 상황이 심각하긴 할 겁니다. 그곳의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 정신이 없으시겠지요. 물론 이번 토벌을 보면 그 일이 의외로 빨리 끝날 수도 있고요.”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니... 아무튼 그 말인즉슨 내가 여기 있으면 주군을 지척에서 보좌할 문사는 공달 자네 하나뿐이란 얘기로구먼.”
“아니 그래도 몇몇 생각해둔 이름이 있습니다. 일전에 본 봉효도 있을 것이고. 그 외 몇몇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연통을 넣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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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본초는 일등공신에 임명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입니다.”
승전 연회였기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분명 황제의 치하를 시작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있긴 있었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황제가 공신들을 나열하면서 단번에 깨졌다.
“후장군을 최고공신으로 임명하시는 데는 아무도 이견이 없겠지만, 왕광, 포신, 교모 같은 자들이 어찌 본초 보다 앞에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은 하진이 목소리를 높여 황제에게 불만을 표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든든한 지지자이자 모종의 관계까지 있던 원소가 이등공신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황제는 최고공신으로 이의민, 일등공신으로 왕광, 교모, 포신, 이등공신으로 조조, 원소, 원술을 명했다. 당연히 원소가 일등공신은 될 거라고 생각했던 하진은 크게 반발 할 수밖에 없었다.
“으, 음... 짐은 그러니까....”
소제 유변은 외삼촌 하진이 시뻘건 얼굴로 화를 내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을 떨었다. 이에 사도 왕윤이 황제를 보호하기라도 하듯 하진에게 소리쳤다.
“대장군은 자리에 맞는 행동을 하시오. 이 곳은 국가대사를 논하는 자리가 아닌 연회 자리요.”
하지만 왕윤의 타이름에도 하진은 자신의 뜻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계속 강하게 나간다면 황제가 어찌 거부하겠는가. 실제로 소제는 원소를 일등공신으로 바꿀 마음을 먹었기에 어찌 보면 하진의 생각대로 되는 거라고 볼 수 있다.
“음... 짐의 생각이 조금 짧았던 것 같소. 그럼 원소를 일등공신으로....”
하지만 소제는 말을 끝까지 이어나가지 못했다. 최고공신인 이의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기 때문이다.
“폐하. 소장 역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히익...! 무, 무엇이오? 후장군.”
“소장의 생각으로도 원소는 이등공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옵니다.”
“오! 후장군도 생각이 그렇다면!”
원소도 놀란 눈으로 이의민을 바라 봤다. 자신과 이의민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원수가 아닌가. 그런 이의민이 자신을 변호해주다니 놀랄 일이었다. 원소는 이내 이의민의 의도를 짐작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흐흐! 저 놈이 이제야 주제파악을 하는구나. 너도 머리가 있다면 원가와 척을 지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알겠지.’
하지만 이어진 이의민의 폭탄 발언에 원소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원소는 공신이 아니라 죄인입니다. 그는 상지곡 전투에서 우리를 보내면서 왕광과 교모, 포신 이 세 사람이 저를 암습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전장에 나간 장수의 등을 찌르라니. 이는 명백한 반역행위입니다. 다행히 충의로운 마음을 가진 세 사람이 제게 모든 것을 밝혔기에 우리는 탈 없이 백파적을 소탕할 수 있었습니다.”
이의민의 발언에 연회장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특히 하진이 이의민에게 달려와 발언을 거두라고 사정했다.
“이보게. 의민! 그게 무슨 망발인가. 어서 거짓이라고 고하게. 어서!”
“거짓이 아닌데 어찌 거짓이라고 고하리까?”
하지만 그 말을 들을 이의민이 아니다. 마음이 급해진 원소가 황제에게 읍소했다.
“이건 모함이오! 폐하. 이의민, 아니. 후장군은 저를 모함하고 있습니다.”
원소가 모함이라 소리치자마자 왕광이 나섰다.
“흥! 모함이라니! 폐하! 소신이 원소에게 직접 명을 받은 당사자입니다. 신이 모든 것을 사실대로 밝히겠습니다.”
왕광은 그 날 상지곡에 있었던 일을 모두 밝혔다. 물론 이의민과 입을 맞춰 각색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들만 아는 이야기였다.
“너희들끼리 짜고 입을 맞춘 것이 아니더냐?! 내가 너희들에게 그런 지시를 내렸다는 증좌가 있는가?”
연회에 모인 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원소의 얘기에 수긍하는 분위기가 됐다.
확실히 원소의 말대로 증좌가 없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원소와 이의민의 관계를 모르는 이들이 없다. 지금 이의민의 발언은 충분히 의심할 법 했다.
하지만 한 인물이 입을 열면서 사람들은 생각이 다시 바뀌었다.
“소신 역시 그 일을 알고 있습니다. 폐하. 자칫하면 집안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이라 고민을 했지만 원소의 가증스런 얼굴을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후장군이 했던 말은 모두 진실입니다. 추가로 원소는 내게 후장군에 대한 보급을 중지하라는 제안까지 했습니다.”
놀랍게도 입을 연 이의 정체는 원술이었다.
세 얼간이들이 말한 것과 원술이 말한 것은 파급력에서 하늘과 땅 차이였다. 게다가 원술은 이의민과는 원수지간임과 동시에 원소와는 한 집안 사람이었다. 그의 신분과 사람들의 관계를 봤을 때, 그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 물론 거짓말도 아니지만 말이다.
분노한 왕윤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성토를 했다.
“어찌 이런 일이 우리 황실에서 벌어졌단 말인가! 참으로 부끄럽도다! 폐하. 절대로 원소를 용서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를 일벌백계하여 황실의 위엄을 세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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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원소가 이런 비참한 신세가 되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낙양을 떠나는 원소의 복귀 행렬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어느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 없이 죽을상을 하며 기주로 돌아가고 있었다.
대장군 하진이 겨우 말려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다는 것은 면했지만, 기주에 있는 원소의 병력 절반을 황군에 편입시키기로 하고, 또 세금도 배로 늘어났다. 기주로 돌아간다고 해도 약해진 원소를 한복이나 공손찬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사실 상 제후로서 생명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원소의 장자 원담만이 조심스레 다가와서 물었다.
“저 아버지... 이대로 기주로 가실 겁니까?”
“....”
원소는 묵묵부답이었다.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널 때까지 원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황하를 건너자마자 원소의 입이 열렸다.
“서쪽으로 간다.”
모두 의아해했다. 누구도 감히 이유를 묻지 못하는 가운데 원담만이 원소에게 다가와 질문했다.
“아버지? 어찌 서쪽으로 가십니까? 기주로 가려면 동쪽으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원담의 질문에 원소는 굳은 음성으로 답했다.
“우리는 병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