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토벌이 끝난 후 (2)
황하를 건너는 수십 척의 배가 있다. 토벌군이 처음 황하 이남에서 이북인 하내로 향했던 방향과 정반대로 가는 배들이다. 그 배에 타고 있는 수만의 군사들은 당연히 토벌을 마치고 낙양으로 복귀하는 토벌군들이었다.
황보숭의 본대는 태원에서 이의민의 선발대와 합류한 후 바로 복귀했다. 원래 목적이었던 백파적과 흑산적 토벌을 완수했으니 더 있을 필요가 없었다.
돌아오는 내내 황보숭은 이의민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큼 황보숭 입장에서는 이의민이 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허허허! 자네와 같은 젊고 총명한 인재가 앞으로 우리 군을 이끌 거라고 생각하니 내 기쁘지 아니할 수가 없네.”
“후후. 과찬이십니다. 전부 좌장군께서 잘 가르쳐주신 덕이지요.”
이의민은 황보숭의 칭찬에 어울리지 않게 겸양 넘치는 태도를 보인다. 다른 제후들 앞에서는 한껏 시건방을 떨어도 황보숭 앞에서 만큼은 나름 예의와 격식을 차렸다.
단순히 황보숭이 이곳에서 유일하게 후장군보다 더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어서일까? 아니다. 이의민은 다른 제후들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직위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이의민이 황보숭한테만 이런 태도를 취하는 이유가 있다. 다른 제후들은 처음에는 이의민을 무시했다. 현재 수하가 된 세 얼간이들조차 이의민을 무시했었다.
그런데 황보숭만큼은 이의민을 무시하지 않고, 후장군으로 대해줬었다. 그리고 이의민이 뭔가를 해내면 그 공을 충분히 인정해주었다. 그러니 이의민도 황보숭에게는 예의를 차렸다. 그만큼 이의민은 자신이 받은 만큼 되돌려주는,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성격이라는 얘기다.
덕분에 현재 이의민 옆에는 황보숭만 있을 뿐, 다른 제후들은 좀처럼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들 이의민에게 지은 죄가 하나씩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됐든 그 덕에 이의민은 혼자 조용히 강바람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든 돌출 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있는 법이다.
이의민은 슬그머니 다가오는 이의 얼굴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약간 날선 어투로 말을 걸었다.
“오호? 누군가 했더니 자네였군. 그런데 왜 도둑고양이처럼 슬금슬금 오는가? 밀어서 강에 빠트리기라도 하려고?”
대놓고 시비를 거는 이의민.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바로 원술이었다.
평소였다면 분명 노발대발했을 그였겠지만 그저 눈썹을 한번 꿈틀거리는 것 외에는 별 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진즉 그리 했겠지.”
“후후! 주제 파악을 잘 하니 다행이군. 그럼 대체 내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온 거냐?”
“한 가지 알려줄 것이 있어 왔소. 실은 후장군이 흑산으로 가기 전 원소가 내게 은밀한 부탁을 해왔소. 바로 우리 토벌군의 보급을 일부러 끊으라는 부탁이었소.”
“오호라! 그래서 나보고 먼저 가라고 한 것이었군. 만약 보급이 아니 됐으면 당연히 선발대인 내가 더 큰 타격을 입었을 테고.... 헌데 보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었는데....?”
“그렇소. 나는 원소의 부탁을 거부하고 후장군에게 제대로 보급을 했소. 형제의 정과 사사로운 원한을 잊고서 대의를 위해 후장군께 협력을 했다는 말이오.”
“형제가 아니라 원수 같던데.... 그래. 이런 얘기를 굳이 내게 하는 이유가 뭐지? 잘 했다고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건가?”
이제는 익숙해진 건지 눈썹도 꿈틀거리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받는 원술.
“내가 원하는 것은 간단하오. 나 원술은 후장군과 동맹을 맺길 원하오.”
원술의 말에 이의민은 코웃음을 쳤다.
“동맹이라? 웃기지 마라. 자네와 내가 원수지간이란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이렇게 구린내가 풀풀 나는 제안을 내가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는가? 혹여 보급을 했다는 공을 내세울 생각이면 그만둬라. 보급을 하는 것은 네 의무였을 뿐이다.”
“당연히 나는 지금도 후장군께 감정이 좋지 않소. 허나 난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감정 따윈 묻어둘 수도 있는 자요. 동맹을 맺는 것이 후장군께 좋으면 좋았지 결코 나쁜 게 아니오. 아무리 후장군이 대단하다지만 앞뒤로 적을 맞이할 수는 없지 않소.”
‘듣다 보니 꽤 그럴싸한데? 뭐 낙양까지 돌아가는 판국에 이제 와서 내가 고민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의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허나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릴 일도 아닌 것 같군. 일단 낙양에 도착하면 공달과 상의를 해보도록하지.”
이의민의 대답에 원술은 적잖이 놀랐다. 이의민이 긍정적으로 답해서가 아니다.
“공달? 황문시랑 순유를 아시오?”
“당연히 알다마다. 단순히 아는 정도가 아니지. 그와 이런 중요한 얘기를 나눌 거라는 걸 듣고도 모르겠나?”
이의민의 대답에 원술은 표정이 굳었다. 사실 원술은 순유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눈독 들였었다. 이미 그에게 수차례나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순유가 이미 이의민의 사람인 것으로 보이니, 원술로서는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이의민은 원술이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할 이야기가 끝났다며 선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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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를 건너 낙양에 도착한 토벌군. 낙양 외성 앞에는 대장군 하진이 직접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하하하! 다들 수고가 많았네. 황제폐하께서도 자네들의 공적에 크게 기뻐하셨네. 만찬을 여신다고 하니 저녁에 모두들 참석하도록 하게.”
이의민은 하진이 하는 덕담에 별로 관심 없었다. 그의 눈은 오직 하진 옆에 있는 인물에만 고정이 되어 있다. 하진 옆에 있던 인물은 이의민을 보고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주군.”
“흐흐. 오랜만이군. 공달.”
그는 바로 순유였다. 오자마자 주군이라고 부르며 자신이 이의민의 사람이라는 걸 인증했다.
순유는 곧 이의민의 또 다른 심복, 세 얼간이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인사들 하지. 자네와 마찬가지로 이번에 내 사람이 된 이들일세. 자네도 이름은 다 알겠지?”
순유는 적잖이 놀랐다. 자신의 조언 그대로 백파적과 흑산적을 자신의 세력에 흡수한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세 제후까지 수하로 만들었다. 순유의 예상을 뛰어넘은 일이었다.
“하하. 황문시랑. 주군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아아... 네. 포 기도위. 왕 태수, 교 태수.... 반갑습니다.”
얼떨떨한 순유는 그답지 않게 이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지도 못했다. 그만큼 이의민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공달. 그런데 내 한 가지 그대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군.”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이의민은 황하를 건널 때 원술과 했던 밀담을 순유에게 얘기했다. 순유는 더 놀랄 지경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행보만 해도 상상 이상인데, 또 원술과도 밀담을 나눈 사이가 됐다니.
‘어쩌면 내 예상보다 훨씬 더 큰 사람일 지도 모르겠군.’
언제까지 놀라고만 있을 순유가 아니다. 얼른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제는 주군이 된 이의민이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머리를 굴렸다.
“흐음. 그가 그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사실 뻔해 보입니다. 원술은 주군과 원소의 싸움을 구경하면서 힘을 키울 생각이겠지요. 즉, 이호경식(二虎競食)의 계를 쓴 것입니다.”
“그렇지? 나도 영 내키지 않더라고. 딱 봐도 꿍꿍이가 있어보여서....”
그런데 순유는 이후 앞서 설명한 것과는 반대되는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냥 원술의 제안을 받아들이시지요.”
“뭐? 방금 원술은 꿍꿍이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원술과의 동맹은 주군께도 나쁘지 않습니다. 사방에 적을 두는 것은 피할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우리가 이미 원술의 속내를 뻔히 아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원술의 꿍꿍이대로 절대 쉽게 흘러가진 않을 것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필요도 없었다. 확신에 찬 순유의 눈빛을 본 이의민은 그거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 역시 머리 쓰는 사람이 하나 있어야 돼. 공달. 그럼 난 자네만 믿고 있겠네. 내 이름 대고 하고 싶은 건 다 해 봐.”
말을 마친 이의민은 순유의 어깨에 팔을 턱 걸치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자자! 오랜만에 봤는데 딱딱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술이나 한 잔 하지. 형님 집으로 갑시다.”
“우리 집이 무슨 술집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흐흐! 형님의 술상 차리는 솜씨는 천하제일 아니오? 다들 듣거라! 중랑장이 직접 차리는 술 맛이 궁금한 사람은 모두 날 따라와라.”
곽봉은 여전히 투덜투덜 대면서도 자연스럽게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 이의민과 곽봉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던 순유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주군. 그러지 마시고 제가 안내하는 객잔으로 가시지요. 그 곳의 요리가 천하일미 입니다.”
“오! 그거 좋군.”
순유의 안내를 받은 객잔에서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 수 있었다. 회포를 풀 때는 역시 술만 한 게 없었다. 그리고 이의민은 술이라면 절대 마다하지 않는 인물이다.
한창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순유가 은근한 어투로 이곳에 온 본 목적을 꺼냈다.
“주군. 이 자리에 같이 술을 마실 사람을 한명 더 초대해도 되겠습니까?”
“술친구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지. 그런데 누구인가?”
“후후. 주군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실 인물입니다. 통성명은 데려오면 하시지요.”
“그래. 일단 데려와 봐.”
기분이 좋은 이의민은 순유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고, 얼마 후 순유는 한 사내와 같이 돌아왔다. 그 사내는 다름 아닌 종요였다.
“확실히 이 집이 맛이 있더군. 그럼 얼른 자리를....”
그런데 종요는 이의민을 보자마자 크게 놀랐다. 그리고는 난감한 어조로 순유를 힐책했다.
“공달! 후장군이 있단 얘기는 전혀 없지 않았나? 우리 둘이서만 마시자고 한 줄 알았는데....”
아마 순유가 종요에게 이의민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하! 원상형. 원래 만남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는 법이지요.”
“그건 대체 어느 나라 법인가?”
“아무튼 인사 나누시지요. 원상형. 이미 아시겠지만 제 주군이신 후장군 이의민님이십니다.”
순유는 이어 이의민에게도 종요를 소개했다.
“주군. 저와 친한 종요 형님입니다.”
종요는 이의민에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공달과 같은 영천 출신으로 종요, 자는 원상이라 합니다.”
순유가 종요를 소개하려는 이유는 당연히 그를 이의민의 사람으로 만들고자함이다.
“아! 아까 술친구를 데려온다는 게 이 친구였구먼.... 아무튼 공달, 자네의 친구라면 보통내기가 아니겠지?”
“바로 보셨습니다. 저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모자라진 않은 사람입니다. 주군께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순유의 치사에 종요는 부담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절대 아닙니다. 공달이 지나친 겸양을 떠는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공달도 모두 할 수 있습니다. 허나 반대로 공달이 할 수 있는 것 중 제가 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특히 공달은 군략에 능통한 인재입니다. 그 부분에서 저는 공달의 발끝도 미치지 못할 겁니다.”
종요의 얘기에 순유는 슬쩍 웃기만 할뿐 별다른 반박은 하지 않았다. 아마 그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의민은 종요를 얕보지 않았다. 종요의 말대로라면 그가 순유보다 군략은 모자랄지언정 내정만큼은 순유보다 높거나 비슷한 수준이라는 얘기 아닌가.
순유가 얼마나 능력이 좋은 관인인지 아는 이의민으로서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종요를 인정해줄 만한 사람으로 봤다.
“흐흐. 반갑네. 자네와 같은 사람이 내게 힘을 보태준다니 참으로 든든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