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토벌이 끝난 후 (1)
태원군은 병주의 중심이 되는 곳인 만큼 자사 치소가 이곳에 있었다. 당연히 황궁만큼은 아니었지만 제법 크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병주 백성들이 오랑캐들에 의해 매우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과는 굉장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 병주 자사 치소에서는 평소처럼 풍악이 울려 퍼졌다. 정원이 늘 하던 대로 사치스런 잔치를 연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자사 치소에서 벌어진 이번 잔치에는 자사인 정원이 가장 상석에 앉아있지 못했다. 그럼 누가 앉아 있느냐? 바로 이의민이었다.
정원은 흑산적을 토벌한 기념으로 잔치를 연다면서 이의민을 이곳으로 초대했다. 겉보기 명분으로는 흑산적 토벌을 축하하는 자리였지만, 실은 파고들면 이번 토벌에서 정원과 여포가 한 짓을 무마하기 위한 자리였다.
정원은 이의민에게 가장 상석을 내주고 옆에서 술을 따르며 쩔쩔 매고 있다.
“후장군.... 어쨌든 경하 드립니다. 제 술을 한잔 받으시지요.”
“흐음... 술맛이 어째 썩 별로군.”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뭣들 하느냐? 어서 더 좋은 술로 가져 오너라!”
이의민이 말 한마디 할 때 마다 안절부절 못하는 정원.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원은 필살기를 썼다.
“후장군. 제가 특별히 후장군을 위해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정원은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상자를 열자 황금빛이 보였다.
“험! 험! 누가 뭐 이런 걸 달라고 했나? 난 그저 술맛이 떨어진다고 솔직히 얘기했을 뿐이야. 난 자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이의민의 말에 찜찜한 표정을 짓는 정원. 이의민은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아무래도 이대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이번 토벌에서 혹시 저희 부자에게 언짢은 일이 있으시면 이걸 받으시고....”
“언짢은 일이라니? 난 전혀 그런 게 없었는데....?”
이의민의 호쾌한 말에 정원은 그의 표정을 잘 살폈다. 아무리 봐도 거짓을 얘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이대로 넘어갈 생각인가....? 하긴 흑산적 토벌 때 보니까 저놈의 무식함이 절대 여포와 비교해서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럼 진짜 그때 일을 잊어버렸을 수도....’
정원에게 일말의 희망이 떠올랐다. 원래 계획대로 자신들이 흑산적을 토벌하면서 큰 공을 세우는 건 물 건너갔지만, 이의민이 이대로 넘어 가준다면 별 일은 없을 터였다.
“아아.... 혹시나 후장군께서 흑산적 토벌 때 저희에게 언짢은 것이 있으셨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없으시다면 이 자리에서 즐겁게 술을 드시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 여기서 난 술이나 잘 마시고 가면 그만일세. 그것 말고 뭐가 더 있단 말인가?”
정원은 자신보다 어려도 훨씬 더 어린 이의민이 대놓고 반말을 찍찍 내뱉는데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정원은 잔치 내내 마치 간신배마냥 이의민의 기분을 맞추고, 잔치가 끝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의민은 잔치가 끝나자마자 시원하게 일어섰다.
“자! 오늘 이리 대접해준 건 고맙네.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네.”
“하하! 이제 가십니까? 혹시 병주가 그리우시면 언제든지 오십시오. 제가 오늘 보다 훨씬 더 성대한 잔치를 열어 또 장군을 대접하겠습니다.”
“그래. 기대하지.”
최대한 안면 근육을 관리하며 활짝 웃은 정원은 이의민이 완전히 떠나자 십 년 감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휴우! 후장군이 이대로 넘어가준다니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가 없군.”
큰 짐을 덜었다고 생각하고는 그 자리에 철퍽 주저앉아 남은 술과 안주를 좀 더 먹었다. 이의민과 같이 있을 때는 술과 안주를 따라주기만 한다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그러고 잔치를 정리하려는데 아직 이곳을 떠나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이번 토벌에서 이의민의 심복이 된 세 얼간이들, 포신, 왕광, 교모였다.
정원은 의아함을 느끼며 그 셋에게 다가가 물었다.
“음? 세 분은 왜 아직도 여기 계시오?”
정원의 질문에 세 얼간이들은 씩 웃었다. 그리고 정원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얘기를 꺼냈다.
“자! 정 자사. 이제 우리와 본격적으로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소? 주군께서는 어제 흑산적 토벌에서 벌어졌던 불미스런 사건에 대한 모든 사후처리를 우리에게 맡기셨으니 말이오.”
“허억!”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정원의 입에서 헛바람이 터져 나왔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아까 후장군께서는 분명 어제 일에 대해 언짢은 게 없으시다고....”
“그건 맞소. 주군께서는 언짢은 기분까지 우리에게 다 위임한다고 하셨지 뭐요. 그러니 주군께서 당하신 일은 곧 우리가 당한 거요. 아니. 훨씬 더 심한 것이지.”
“그, 그게 무슨 개소리....?”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 봅시다. 일단 정 자사가 우리를 노리고 화재를 일으킨 것, 그리고 자사의 양자 여포가 흑산적과 싸우고 있는 후장군을 공격한 것, 이 두 가지만 해도 황실에 대한 반역의 의지나 다름없소.”
“아니?! 그걸 어찌 그리 비약하시는....?”
“황명을 받은 후장군을 공격한 것은 분명 사실이잖소. 이걸 어찌 비약이라 하시오?”
“그건 여포와 장료, 고순 등이 독단적으로....”
“말 같지 않은 소리하지 마시오. 아무리 수하들이 독단적으로 했다고 해도 상관으로서 그것을 단속하지 못한 것 역시 같은 죄요. 그리고 정말 수하들의 독단이었다면 토벌이 끝나자마자 그 셋을 처단했어야 되는 것 아니오? 그런데 그들은 아직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소.”
정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세 얼간이들이 얘기하는 대로 정원의 잘못은 충분히 반역죄로 몰수도 있는 명분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의민이 당장 정원을 처단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물론 지금은 법보다 힘이 지배하는 시대인 만큼 상대가 아무리 구구절절 옳은 소리를 한다고 해도 그냥 힘을 찍어 눌러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의민의 힘이 정원보다 더 컸다.
물론 병력은 아직 토벌군보다는 병주군이 더 많았다. 하지만 이의민과 여포의 대결에서 이의민이 승리하는 것을 많은 병주군들이 똑똑히 지켜봤다. 당장 이의민과 전쟁을 벌인다고 한다면 병주군의 사기는 바닥을 칠 것이고, 그건 곧 패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결정적으로 지금 이의민의 병력은 토벌군 중 일부일 뿐이었다. 황보숭의 본대도 곧 도착할 테니, 정원이 언감생심 딴 마음을 먹을 수가 없다.
결국 정원은 항복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세 얼간이에게 납작 엎드리는 정원.
“요, 용서해주십시오. 제발 용서해달라고 후장군께 좀 전해주십시오.”
“그대가 속죄의 의미로 성의를 보인다면 주군께서 용서하실 수도 있겠지.”
이에 세 얼간이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면 원하던 바를 얘기했다. 그들은 정말 정원을 반역죄로 처단할 생각은 아니다. 굳이 그렇게 해봤자 이의민에게 득 될 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병주 자사인 정원을 처단하고 병주 자사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겠지만, 이의민이 곧 청주 자사가 된다고 생각해본다면 붙어있지도 않은 큰 땅을 꿀꺽하는 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었다.
“어떤 것을....?”
“우리 주군께서 곧 청주자사가 되실 것이란 건 이제 기정사실이 되었소. 허나 청주는 황건의 잔당 때문에 피해가 극심한 곳이오. 그러니 그대가 군량과 병장기를 지원 해 줘야겠소이다.”
“예? 얼마나....?”
“3만 군사가 넉넉히 먹을 군량, 그리고 충분한 병장기를 최소 2년간 지원을 해주시오.”
날강도나 다름없는 세 얼간이의 요구였다. 정원은 말도 안 된다는 듯 펄쩍 뛰었다.
무리한 요구이긴 하지만 사실 들어주기가 아예 불가능한 요구는 아니었다. 그래도 최대한 앓는 소리를 하면서 요구조건을 줄이려는 정원.
“그, 그건 너무 무리한 요구입니다. 여긴 병주입니다. 아니 그래도 척박한 곳이라 우리 먹고 입을 것도 부족한데....”
“왜 이리 엄살이시오? 오늘 연회하는 걸 보니 그리 부족한 거 같지는 않더이다.”
하지만 이의민을 달래기 위해 성대히 잔치를 연 것이 오히려 독이 됐다.
“정 아니 되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 흑산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황실에 보고하겠소. 그럼 그대로 역적이 되시겠지.”
“아, 알겠습니다.”
결국 정원은 세 얼간이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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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황보숭이 이끄는 토벌군 본대가 태원군에 들어왔다. 그들이 태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는 상태였다.
이의민은 본대와 합류하기 전 먼저 승전 보고를 위한 전령을 보냈다. 황보숭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보고를 받았다.
“선발대만으로 아예 토벌을 완수해버리다니 참으로 대단하구나. 정말 후장군 같은 걸출한 장수가 또 있겠는가? 허허허허!”
전령의 보고에 황보숭뿐만 아니라 다른 제후들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후장군은 대단한 사람이오. 흑산적도 무려 6만이나 된다고 들었는데....”
“어쨌든 최고 공신 자리는 이미 정해졌구려.”
반면 원소를 속으로 화를 간신히 삼키며 똥 씹은 표정으로 원술을 노려보고 있는 중이다.
결국 원술은 원소의 뜻대로 해주지 않았다. 애초에 약속한대로 보급에 구멍을 내지 않았고, 선발대에도 차질 없이 보급을 해주었다. 원술이 자신의 모사인 양홍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덕분에 원소는 백파적에 이어 흑산적 토벌에 대한 모든 공을 이의민에게 거저 준 것이나 다름없어졌다. 이미 공적을 가르는 승부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이의민의 선발대와 합류하기 위해 태원군 중심부로 들어가는 토벌군 본대. 그런데 그들의 눈앞에 희한한 광경이 펼쳐졌다. 모두 그걸 보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초목으로 푸르러야 될 거대한 흑산이 그 이름처럼 시꺼맸기 때문이다.
전령이 흑산적을 토벌했다는 결과만 보고했을 뿐, 자세한 과정은 보고하지 않은 탓이다.
궁금해진 황보숭은 근처에 지나가던 백성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나는 좌장군 황보숭이다. 저 산은 흑산이 아니더냐? 근래 흑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왜 전부 불타버렸느냐?”
“예. 관군이 흑산적 토벌을 하면서 흑산에 불을 질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리 다 탄 것입니다.”
백성의 보고에 원소의 눈이 빛났다. 백성의 말을 듣고 보니 이의민을 깎아내릴 마지막 기회였다.
“좌장군. 이건 그냥 넘어가서는 아니 되는 일입니다. 물론 흑산적을 토벌한 것은 잘 한 일입니다. 허나 후장군은 그 과정에서 너무 큰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산을 통째로 홀라당 태우다니요. 저 흑산에서 살거나 흑산에서 하루 먹을 것을 얻는 많은 백성들이 자신의 터전을 잃어버린 셈 아닙니까?”
원소는 이의민이 큰 죄를 지었다고 어떻게든 몰아가기 위해 열변을 토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백성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원소에게 반박했다.
“저... 장군님. 저 불은 후장군이 낸 것이 아닙니다.”
“뭐?! 그럼 누가....?”
“병주자사 정원이 낸 불이라 합니다. 후장군께서는 오히려 저 불을 빠르게 진화하셨고, 우리에게 적절한 피해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후장군의 덕을 칭송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떻게든 이의민의 흠을 잡으려다가 오히려 더 띄워 준 꼴이 된 원소. 똥 씹은 그의 표정이 더욱 추하게 일그러졌다.
백성의 말에 황보숭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칭찬을 그치지 못했다.
“허허허허! 정말 후장군에 대해 파면 팔수록 미담만 나오는 구나. 그래. 지금 얘기한 것 외에 별 다른 일은 없느냐?”
황보숭의 질문에 백성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 높으신 분들이 신경 쓰실 일은 아닌 거 같습니다만....”
“뭐든지 말해보게.”
“저희가 이번 산불에 죽은 개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개? 아니? 사람도 아니고 개한테 제사를 지낸단 말인가?”
“실은 산불이 타오르던 날, 웬 개 짖는 소리가 산 전체에 퍼지지 않겠습니까? 근데 분명 개 소리가 맞긴 한데... 그 우렁참이 도저히 개가 짖는 소리라고 볼 수 없었습니다. 마치 범의 몸을 가진 개가 짖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원통하게 산불로 죽은 개의 영혼들이 짖는 소리라 생각해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범이 짖는 개 소리라... 흠! 그것 참....”
참으로 신기한 일이긴 하지만 백성의 말대로 황보숭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황보숭과 토벌군 본대는 곧 백성들을 지나쳐갔다.
그리고 원래 거기서 살던 백성들은 계속해서 개의 원혼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그들은 아마 대를 이어 계속 제사를 지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