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31화 (31/175)

31. 여포의 오해 (3)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고 죽이던 흑산적들과 병주군. 어느 순간 모두 병장기에 손을 떼고 넋을 놓은 채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은 두 사내, 아니. 두 야수의 무시무시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의민의 대부가 여포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여포는 방천화극을 세로로 세워 대부를 막아냈다. 여포는 대부를 막자마자 방천화극의 날을 세워 큰 원을 그리며 휘둘렀다.

이의민의 허리를 베어가는 여포의 방천화극. 이의민은 또 그걸 껑충 뛰며 피했다.

둘은 물이 흐르는 천수곡 내에서 싸우고 있다. 통상적으로 천으로 된 옷이 물에 젖으면 움직이는데 적잖은 불편을 겪는다. 천이 물을 흡수해서 무거워 지니 당연한 현상이다.

그런데 지금 이의민과 여포처럼 가죽으로 된 방호구가 물을 먹으면 천보다 훨씬 더 무거워진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럴 때 평소의 반 정도의 속도밖에 내지 못한다.

둘의 방호구가 젖은 것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지금 싸우고 있는 위치가 천수곡 한가운데라는 점이다. 그곳은 평균적으로 물의 높이가 거의 허벅지까지 차오르고, 깊은 곳은 허리 이상 들어가는 곳이었다.

일반적인 육지처럼 사람이 막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절대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지금 이의민과 여포의 움직임은 방호구에 물이 흡수된 것 같지도, 물 위에서 싸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둘은 빠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콰콰쾅!!

우르르릉!!

이의민의 대부와 여포의 방천화극이 부딪힐 때마다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소리가 천수곡에 울려 퍼졌다. 둘이 충돌을 할 때의 충격이 물의 파동으로 퍼져 나갔는데, 과장 좀 섞어서 바다에서 파도가 몰아치는 것 같았다.

이따금 서로의 무기가 목표물을 잃고 수면을 내리칠 때도 있었는데, 그때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거의 웬만한 성벽 높이의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도저히 사람 대 사람의 싸움으로 보이지 않는다. 흡사 하늘에서 신장 두 명이 내려와 싸우는듯했다.

모두가 넋을 잃고 둘의 싸움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둘의 공방이 순식간에 200합이 넘게 지나갔다. 원래 200합을 주고받을 정도의 일기토라면 시간이 꽤나 지나야 정상이다. 하지만 둘은 원체 빠르게 공수를 주고받았기에 얼마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다.

그렇게 200여 합이 넘어가는 시점에서부터 여포가 슬슬 이의민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이 공수를 교환했지만, 점점 이의민의 공격 횟수가 늘어났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서로에게 조금의 유효타도 허용하지 않았지만, 여포에게 처음으로 상처가 생겼다. 비록 살짝 스친 상처일 뿐이지만 먼저 피를 봤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점점 승기를 잡아가는 이의민. 서로 거의 비슷한 실력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의민이 우세할 수밖에 없다.

여포는 이의민과 싸우기 바로 직전까지 흑산적들을 상대하면서 체력을 소모했었다. 반면 이의민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시작부터 불리한 조건으로 싸운 여포였다.

“허억! 헉!”

“흐흐! 벌써 지친 것이냐?”

“지치긴...! 헉헉! 씨발! 누가 지쳤다고....”

“그래. 벌써 지치면 아니 되지. 날 이리 즐겁게 만들어주는 놈은 실로 오랜만이로다.”

“건방진 놈! 그 즐거움을 곧 후회로 만들어주겠다.”

이의민은 일부러 여포에게 말을 걸면서 그가 체력을 회복할 시간을 조금 주었다. 이의민의 말마따나 그는 아주 오래간만에 호적수다운 호적수를 만나서 무척 즐거웠다. 그래서 이 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겨우 이 정도 시간으로는 여포의 체력 회복이 제대로 될 리가 없지만 말이다.

다시 이어진 이의민과 여포의 일기토. 여포는 숨 고를 시간을 얻은 덕분에 방금 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수세에 몰린 상황을 뒤바꾸진 못하는 모습이다.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정원이 은밀히 장료와 고순을 불렀다.

“너희는 기회를 봐서 여포를 도와 후장군을 죽이거라.”

충격적인 명령이다. 정원도 여포가 이의민을 죽이려 할 때는 말도 안 되는 짓거리라 여기며 말리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여포를 말릴 수는 없었고, 둘의 대결을 잠자코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잠자코 지켜만 보고 있으니 정말 여포의 말처럼 이의민만 죽인다면 만사형통이었다.

‘생각해보니 여기에는 아직도 후장군의 군사가 하나도 없잖은가. 그를 죽이고 나중에 토벌군이 도착한다고 한들 우리 군사들의 입단속만 확실히 시킨다면 그들이 어찌 알 것인가? 아니 그래도 장연을 잡은 것이 후장군인데, 그만 없어진다면 여러모로 내게 이득일 것이다.’

정원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치고 이의민을 죽일 결심을 내렸다. 하지만 장료와 고순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명령이었다.

“하지만 주군.... 그건 너무 무리하신....”

“잠자코 내 말 대로 해! 여포의 같잖은 내기 때문에 내가 이러는 줄 아느냐? 후장군만 없다면 흑산적을 처단한 공이 전부 내 것이 된다. 어쩌면 토벌군에게 약속한 최고공신 자리가 내 것이 될 수도 있겠지.”

장료는 참담한 심정으로 이의민을 바라봤다.

일단 진실을 숨기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도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 대상이 후장군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장료는 이의민에게 무인으로서 존경심까지 들고 있었다. 장료는 여포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여포가 전 중원을 통틀어 최강의 무장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여포가 누군가에게 밀린다는 걸 상상이라도 해본 적이 있었나? 그런 장료의 믿음이 이의민에 의해 깨지고 있다.

이의민이 후장군으로서 얼마나 대책 없는 짓거리를 했느냐는 의문들은 집어치우고, 순수하게 무인대 무인으로서는 존경심이 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대상을 비겁하게 암습하라는 정원의 명은 장료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저리 신성한 싸움에 끼어들라고....?’

하지만 다른 누구의 명도 아닌 주군인 정원의 명이었다. 신념과 위배된다고 해서 거부할 수도 없었다.

장료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주군의 명이니 일단 받들긴 하겠지만, 이런 명을 내린 정원에 대한 회의가 느껴지는 장료다.

고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발걸음을 떼지 못하다가 마지못해 한숨을 쉬고, 이의민과 여포가 싸우는 쪽으로 다가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둘이 싸우는 여파로 발생하는 물의 파동 때문에 다가가기도 힘들 터. 하지만 역시 장료와 고순은 그 정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는 듯 꽤나 가까운 곳까지 접근했다.

이의민이나 여포나 서로 합을 주고받는 데만 정신이 팔린 듯, 장료와 고순이 근처에 온 것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마음먹기는 힘들었지만 결심을 내린 순간부터 속전속결이었다. 장료와 고순은 무기를 빼들고 바로 이의민을 암습하려고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그들의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근처에서 엄청난 함성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와아아아아!!”

“후장군! 소장이 왔습니다!”

바로 서황이 이끄는 별동대가 이제야 도착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두 야수도 싸움을 중지하고 서황의 별동대가 접근하는 걸 지켜봤다. 서황이 먼저 와서 부복하고, 뒤이어 우금과 곽봉도 도착했다.

“죄송합니다. 속하가 너무 늦었습니다.”

“아이고! 의민아! 아니. 후장군.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러게 적당히 가라니까....”

“어흠! 형님 왔소?”

“주군!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서황은 의아했다. 이의민이 흑산적과 싸우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아무리 봐도 관군으로 보이는 이와 대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명하자면 조금 긴데.... 일단 하던 건 마저 끝내고 설명해주지. 그나저나 참 아깝게 됐어. 우리 수하들이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성공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이의민은 장료와 고순을 쳐다보며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쳐다보는 이의민의 시선에 장료와 고순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고개를 떨구었다.

장료와 고순도 토벌군까지 온 것을 봤으니, 정원의 명을 수행하기 애매해졌다. 하지만 그들은 천상 무인이다.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신경 쓰지 않고 우직하게 명을 수행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여포도 잠자코 방천화극을 들었다. 여포도 사실 장료와 고순의 접근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굴욕적인 내기의 벌칙이 두려워 장료와 고순의 개입을 못 본 척 했다. 스스로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부끄러운 것보다 나중에 받게 될 굴욕을 더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장료와 고순에게 대놓고 얘기했다.

“날 도와주시오. 지금 반드시 저놈을 쓰러뜨려야 하오.”

그리하여 함께 이의민을 공격하려는 여포와 장료, 고순. 하지만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서황과 우금 등이 아니다.

“비겁하게 여럿이서 주군을 공격하려고 하는 것이냐?”

“감히 주군의 신성한 싸움에 끼어들다니!”

서황과 우금은 각각 장료와 고순을 막아섰다. 서릿발 같은 기세를 드러낸 장료였지만 쉽사리 무기를 휘두르지 못했다. 자신의 앞을 막아선 서황이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란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서황과 우금, 그리고 장료와 고순이 대치를 이어나가면서 자연스레 이의민은 여포와 일대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정원이 나섰다. 이대로 싸운다면 여포가 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정원은 짐짓 모르는 척 장료와 고순을 타박하며 화제를 흑산적 쪽으로 돌렸다.

“그대들이 아무리 봉선이를 돕고 싶어도 그렇지 후장군과의 신성한 일기토에 어찌 끼어드는가? 아무튼 이대로 우리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후장군. 일단 흑산적부터 먼저 정리하는 것이 순서 아니겠습니까?”

정원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일단 이의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도적들을 소탕하면서 공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흑산적들은 아직도 그 수가 관군에 비해 많았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 그럼 저놈들부터 먼저 정리한다.”

이의민과 여포의 대결을 보며 혹시나 저들이 자멸하지는 않을까 한껏 기대하던 손경이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잘 나가다가.... 그대로 우리가 아직 머릿수는 더 많다. 싸워! 싸우라고 이 새끼들아!”

손경의 말대로 흑산적은 아직 4만이 넘는 병력이 있었다. 현재 병주군과 토벌군 선봉대 병력을 합친 것보다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손경도 이 싸움의 승패를 알고 있었다. 흑산적들을 효과적으로 이끌던 장연은 이미 죽었다. 그리고 병력이 그리 차이 나지 않는다면 인간 같지 않은 무력을 가진 이의민과 여포를 보유한 관군 쪽이 압도적이다. 이미 많은 흑산적들이 이의민과 여포가 벌이는 천외천의 싸움을 보고 전의를 잃었다.

하나씩 줄어가는 흑산적을 보며 손경은 이대로 항복을 하는 것이 옳을지 고민했다. 그의 예상대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쓰러져가는 흑산적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천수곡의 물이 흑산적들의 피로 물들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흑산적이 유일하게 앞서던 쪽수마저 뒤집히는 일이 발생했다.

“주군! 저희가 왔습니다!”

이의민의 본대까지 도착한 것이다. 결국 버티던 손경은 백기를 들고 무릎을 꿇었다.

“항복! 흑산적은 항복하겠소! 모두 무기를 버려라!”

그 앞에 곽봉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딱 500명.... 아니지. 이놈들은 여기 있는 게 전부잖아? 딱 만 명. 만 명만 살려 준다!”

흑산적들 역시 백파적과 마찬가지로 서로 항복하겠다고 앞 다투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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