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여포의 오해 (2)
“캬! 물 맛 한번 좋다. 역시 싸움 구경만큼 재밌는 게 없지. 쩝! 이런 진귀한 구경거리에 술이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아쉽구먼.”
이의민은 자신에게 들러붙던 흑산적 몇 놈을 가볍게 처리한 후, 으슥한 곳에 아예 자리까지 잡고 싸움 구경을 시작했다.
지금 당장 장연을 찾지는 못했지만 이의민은 여유롭게 쉴 틈을 벌었다. 여포를 보니 자신에게 다가오려고만 할 뿐 장연을 잡을 생각은 전혀 없는듯했다. 덕분에 이의민 입장에서는 물을 마시며 체력을 비축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번 셈이다.
물을 술이라 생각하고 마시면서 느긋하게 싸움 구경을 하는 이의민. 어느새 흑산적과 싸우면서 빠졌던 체력을 거의 다 회복했다.
가볍게 몸을 푼 이의민은 다시 매의 눈으로 흑산적 사이를 탐색했다. 흑산적들 사이로 숨어들어간 장연을 찾기 위해서다. 여포가 당장 장연에게 관심이 없다고는 해도 흑산적들을 하나씩 처리하다보면 결국 장연도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여포보다 먼저 장연을 잡아야 하는 이의민으로서는 아직 방심할 단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장연은 흑산적들 사이로 꽁꽁 숨었는지,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 이 천수곡에는 흑산적의 군세가 우세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갑작스런 병주 관군의 등장으로 흑산적들이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쪽수에서 워낙 압도적이었다. 여포가 이끌고 온 군사들은 기껏해야 1만 정도였고, 흑산적은 무려 6만이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흑산적이 쉽게 압살해야 정상인 병력 차이였다.
“후후! 그래도 여포가 대단하긴 하군. 이리 전황을 유지시키다니...”
그럼에도 여포가 이끄는 병주 관군과 흑산적은 비등비등한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선두에서 흑산적들을 초전박살내고 있는 여포의 존재 때문이다.
확실히 여포는 대단했다. 병주 관군들과 같이 싸우지 않고 홀로 흑산적 사이로 들어갔음에도 전혀 밀리는 기색이 없다. 방천화극을 사방으로 휘두르니 단번에 수십의 흑산적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감히 누가 나의 앞을 막느냐?!”
온 몸에 피 칠갑을 하고 포효하는 모습은 야차라고 평가 받는 이의민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이의민은 여포를 보면 볼수록 호적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맞붙는다면 쉽게 이기지는 못하겠군. 지지도 않겠지만...’
여포의 활약 덕분에 비등하던 전황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흑산적 쪽으로 기울었다. 애초에 병력 차이가 너무도 났고, 여포도 사람인만큼 점점 지쳐갔다.
이의민은 잠자코 장연을 찾으면서 전투를 지켜만 보다가 슬슬 몸을 풀었다. 아무리 여포와의 내기가 걸려있다지만 병주 관군이 아예 전멸하는 걸 두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대부를 들고 눈앞에 있는 흑산적들을 하나둘씩 베어나가며 여포를 도와주려 할 때였다. 다시 병주 관군 뒤편으로 군사들의 함성 소리가 들렸다.
“와아아아아!!”
정원이 이끄는 병주 관군 본대가 도착한 것이었다. 정원도 여포와 흑산적이 싸우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 더 망설일 것이 없었다. 바로 전투 명령을 내리는 정원.
“전군! 저 도적놈들을 싹 쓸어버려라!”
갑작스런 병주군 본대의 난입에 전장의 분위기가 다시 한번 바뀌었다. 흑산적들은 크게 당황하며 절로 뒤로 물러났다.
장료가 병주군 본대를 전체적으로 통솔하며 명을 내린다.
“궁병들은 활을 들어라!”
장료의 명령에 따라 병주 관군 궁병들이 천수곡을 향해 일제히 활을 쏘았다. 흑산적과 뒤엉켜 싸우고 있는 병주군 선발대 군사들도 휘말릴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궁병들의 사격 솜씨가 좋은 것인지 흑산적들만 족족 쓰러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방패병들은 앞으로 가서 흑산적들을 막고 여 장군의 쪽으로 가는 길을 터라!”
이어진 장료의 명에 보병들이 방패를 들고 와서 벽을 쌓는다. 경사가 심하고 물이 가득한 계곡에서 쉽게 유지할 수 없는 대형인데도 일사분란 한 움직임으로 진영을 유지했다.
평상시 장료가 얼마나 군사들의 훈련을 철저히 시킨 것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군사들을 완벽히 통솔하는 장료를 보며 이의민은 절로 감탄을 내뱉었다.
“호오! 이런 곳에 저 정도의 장수가 다 있다니... 하긴 여포 같은 놈도 있으니 저런 놈도 있겠지.”
장료와 병주 관군들의 활약 덕분에 여포는 한결 수월해진 움직임으로 본대에 복귀했다.
“아버지? 이제 오셨습니까?”
“그러게 좀 천천히 가라니까. 괜히 빨리 갔다가 큰일 날 뻔 했지 않느냐? 처음부터 함께 싸웠다면 너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고 군사들의 피해도 더 줄었을 터인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글쎄 후장군과 흑산적이 모종의 밀약을 맺고 저를 담그려고 했습니다. 빨리 후장군부터 잡아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좀 알아듣게 얘기를 해라.”
“아니?! 이 쉬운 얘기를 왜 못 알아듣습니까? 후장군과 흑산적이 한패란 말입니다!”
갑자기 흑산적과 후장군이 한패라니, 정원 입장에서는 황당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마냥 여포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평소에 여포가 워낙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많이 해댔지만, 적어도 전장에서 내뱉는 얘기는 그냥 넘기기 힘든 경우들이 많았다.
“그게 정말이냐? 흑산적과 후장군이 한패라는 게? 그럼 지금 후장군은 어디 있느냐?”
“저쪽에.... 응? 아까 분명 저기에 있었는데....”
어느새 여포의 시야에 이의민이 사라져 있었다. 그렇다고 계속 이의민을 찾기만 할 수는 없으니, 방천화극을 들고 흑산적들을 향해 돌격하는 여포.
“이리 한 놈씩 베다 보면 나오겠지!”
정원도 바로 여포를 지원했다.
“무슨 상황인지 아직 이해가 아니 되지만... 일단 여포를 도와 흑산적들을 처단하라!”
어쨌든 본대의 합류로 순식간에 전황은 역전이 됐다. 아직 흑산적들의 숫자가 더 많기는 했지만, 본대가 기습적으로 뒤를 치는 모양새였고 어쨌거나 여포의 무위는 여전했다.
그래도 장연은 역시 흑산적 두령답게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최선의 방책을 내놓았다.
“젠장! 원군까지 오다니.... 그래도 저놈들은 아직 우리보다 병력이 적다. 우리 진영이 흐트러져서 그렇지 제대로 진영을 잡으면 다시 우리가 압도할 수 있을 거다. 모두 진영을 갖춰 조금씩 후퇴하라! 후방에서 식구들을 정비한 후 다시 싸우는 거다.”
장연은 흑산적들에게 산에서 내려가는 방향으로 후퇴를 명했다. 지금 병주 관군은 산 위쪽에서 내려오면서 기습을 가했으니 현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조치였다.
그런데 흑산적들은 후퇴하면서 아래쪽 저 멀리에 있는 정체불명의 무리들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선두에 있던 손경은 그 무리를 보며 긴가민가 하는 표정으로 장연에게 보고했다. 그 무리가 무엇인지 육안으로 식별하기에는 아직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저 두목....”
“급해 죽겠는데 무슨 일이냐?”
“저기 아래에서 어떤 놈들이 올라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헛소리냐? 여기에 토벌군과 우리 말고 이곳에 올 놈들이 어디 있다고....?”
장연은 직접 확인을 하러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장연도 곧 저 멀리서 올라오고 있는 정체불명의 무리를 볼 수 있었다.
“대체 저놈들이 누구....?”
장연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하늘에서 하나의 인영이 번개처럼 떨어졌다. 그리고 그 인영이 지나간 후 장연의 가슴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장연은 그 인영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그 인영의 정체는 바로 이의민이었다. 그는 숨어서 병주군과 흑산적의 전투를 지켜보다가 도망치는 장연을 드디어 발견했다. 그래도 장연은 많은 수의 흑산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에 바로 노리기 힘들었다. 그런데 바로 기회가 왔다.
장연이 갑자기 선두로 나온 것이었다. 이의민은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원숭이 마냥 나무를 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간 이의민은 장연이 지나가는 시간에 맞춰 뛰어내렸다. 그리고 낙하하는 힘을 그대로 이용하여 단번에 장연의 가슴에 대부를 박아 넣었다.
“크어억! 이, 이 새끼가 왜 아직 살아 있....”
가슴에 대부가 박힌 상황에서도 끝까지 입을 여는 장연. 이의민은 그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대부를 다시 휘둘렀다.
털썩!
장연의 머리가 떨어졌다.
“으아악! 두목!!”
장연을 잃은 흑산적들은 혼란에 빠졌다.
덕분에 이의민은 별 제지도 받지 않고 장연의 시체를 확보했다. 그리고 그의 목을 들고 사방으로 외쳤다.
“나 후장군 이의민이 흑산적 두령 장연의 목을 베었다!!”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전투를 벌이던 병주군과 흑산적들이 모두 멈추고 이의민 쪽을 돌아보았다. 모두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는데, 그 중 여포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너...! 너....! 후장군!”
옆에 있던 정원도 혼란스럽다는 듯 여포에게 물었다.
“봉선아.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네가 분명 후장군과 흑산적은 한패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 그럴 리가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결국 자신의 추측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여포는 이의민에게 직접 묻기로 했다.
“후장군! 장연과 한 패가 아니었소?!”
“대체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됐다. 너처럼 무식한 놈이랑 무슨 대화를 하겠냐? 그 쪽이 병주 자사 정원이오?”
“그, 그렇소만.... 후장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설명을 해 주시겠습니까?”
“별로 설명할 것도 없소. 나랑 흑산적들이랑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저놈이 와서 나와 흑산적이 한패라고 우기는 거요.”
이의민이 헛소리라고 하니 발끈하는 여포.
“아니?! 저 흑산적들 중에서 변장한 토벌군이 있는 거 아닙니까?”
“무슨 개소리냐?”
“아니면 후장군이 흑산적들 사이에서 혼자 있을 리가 없잖소.”
“다른 군사들 놔두고 나 혼자 왔으니 그런 거지.”
이의민과 여포의 대화에 정원의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의민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리 대책이 없을 수가 없다. 여포와 같은, 아니. 여포보다 더 대책 없는 놈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에 두통이 몰려오는 정원이다.
“일단 알겠소. 후장군. 봉선. 넌 흥분을 가라 앉혀라. 확실히 알아보지도 않고 후장군을 흑산적과 한패라고 모함한 것 아니더냐?”
“아! 아버지! 내 말이 맞소!”
“그만해라. 후장군이 이미 장연의 목을 벤 마당에 네 말이 어찌 맞는다는 것이냐? 그러지 말고 후장군께 용서를 빌어라.”
“설사 후장군이 흑산적과 한패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난 후장군과 내기를 했소. 그러니 용서를 빌 생각 따위는 없소!”
“어린 아이 같은 소리 그만 하거라. 내기는 무슨 놈의 내기냐? 내기도 이미 져 놓고 말이다.”
하지만 여포는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패했다고? 그걸 누가 증명한단 말이오? 이 자리에 저 놈 군사는 없소. 저 놈만 죽는다면....!”
여포는 눈에 핏발이 선 채 이의민에게 달려들었다. 정말 내기 때문에 후장군을 죽이기라도 할 기세였다.
“이런 미친....!”
정원은 여포를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여포의 방천화극은 이의민의 대부와 맞닿아 있었다.
챙!!
“흐흐! 제법 괜찮은 일격이구나.”
“날 원망 말거라. 이 여포님에게 그런 굴욕적인 역사가 있어서는 아니 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