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흑산적 (2)
이의민의 토벌군 선봉대가 올라가는 길목에 불을 성공적으로 질렀다는 보고를 받은 정원. 그는 이제 여포와 합류해서 이의민보다 먼저 흑산적을 때려잡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후후훗! 그 불을 끄려면 족히 하루 이상은 걸릴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흑산적 산채에 도착을 해봤자 이미 우리가 먼저 그들을 정리한 상태일 것이고.”
여포를 기다린다고 이곳에서 좀 더 머물러야 했지만 전혀 급한 기색이 없었다. 어차피 기다리는 시간보다 진화를 하는 시간이 더 걸릴 테니까.
마침 저편에서 여포와 고순 등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오오! 봉선. 드디어 왔느냐?”
“아버지. 저 왔습니다. 그런데 씨팔! 대체 누가 산에 불을 지른 겁니까? 어떤 새낀지 모르겠지만 잡히면 죽여 버릴 겁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여포는 흑산에 불이 났다는 걸 안 모양이다. 그리고 여포는 그 불 지른 자에 대한 욕을 실컷 하고 있었다. 뜨끔한 정원은 모른 체 한다.
“뭐, 뭐?!”
“올라오는 길에 불이 보니 크게 나 있지 않습니까? 어떤 미친 새끼인지 몰라도 알아내기만 하면 가죽을 벗겨서....”
여포는 매우 화난 채로 정원이 있는 곳까지 올라왔다. 생애 처음 만난 호적수와의 대결이었다. 이의민을 이기고 위해 잠도 안 잘 각오를 하고 왔지만 불 때문에 발이 묶이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여포의 성정이라면 불을 지른 이가 양부인 정원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도 분노를 사그라뜨리지 않을 터였다. 정원 역시 제대로 열 받은 여포를 감당할 자신도 없고, 자신과 여포가 대립하는 모습을 다른 군사들에게 보여줘서 좋을 게 없으니 잠자코 입을 닫았다.
그런데 정원은 여포의 말을 듣다 보니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어찌 불이 났다는 걸 알았지? 봉선이 반대편으로 돌아온 것인가? 시간도 엄청 오래 걸리는데 괜히 그럴 리가....’
“봉선아. 대체 어디서 불이 났다는 말이냐?”
“말도 마십시오. 산 초입부터 전체적으로 불이 다 퍼졌습니다.”
여포의 말을 들은 정원은 순간 도끼눈을 뜨고 불을 지르러 갔던 별동대를 찾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억울합니다. 자사님. 저희는 정말로 그쪽 길목에만 불을 질렀습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불이 전체적으로 번졌다는....?”
정원은 생각해보니 흑산 전체에 불이 난 이유를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설마....? 저것들이 올라가지 못하니 아예 더 크게 질러 버린 것이로구나. 후장군이란 놈도 제정신이 아니군. 미친 놈. 눈앞에 불만 끄고 오면 되는 걸 일을 이리 키워? 너 죽고 나 죽자는 건가? 아무튼 여포 저 놈도 그렇고 머릿속에 근육만 있는 놈들은....”
여포만 오면 바로 흑산적 산채로 출발하려고 했던 정원. 하지만 흑산 전체에 불이 났다는 이대로 출발할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 이곳은 괜찮다지만 이대로 올라갔다가는 불타는 산속에서 다 타죽을 수도 있었다.
여포는 답답해하며 정원에게 다가왔다.
“아버지. 어쩌면 좋습니까? 이 상태라면 진화하는데 사오일은 걸릴 것입니다. 그냥 이대로 올라가는 건 어떻습니까?”
정말 이의민의 우려대로 불타는 산 위로 그대로 올라가자고 하는 여포. 물론 그런 여포의 무식한 의견을 그대로 따를 정원이 아니다.
‘이런 미친 놈! 사방이 불타오르는데 이대로 가자고? 제 정신인가....?’
여포가 자신의 아들이지만 정말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대책이 없는 경우가 많아 골치아픈 정원이다. 그렇다고 정말 친아들처럼 막 대하기도 힘들어서 더더욱 문제다.
“진정하거라. 봉선. 이 불길 속에서 저놈들이라고 별 수 있겠느냐?”
“아! 그럼 이대로 여기서 불만 계속 끄고 있으라는 말입니까? 답답해서 원....! 문원! 좋은 방도가 없겠소?”
여포가 문원이라고 부른 사내. 그는 장료다. 현재 고순과 함께 정원의 최측근에 위치한 장수였다.
장료는 여포의 질문에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산에 병주군과 토벌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연. 그 놈이 어디로 갈지를 생각해본다면 불길을 전부 잡지 않아도 흑산적과 만날 길이 뚫릴 것입니다.”
“짐작 가는 바가 있는가? 문원?”
장료는 지도를 펼쳐 들어 한 장소를 가리켰다. 천수곡이라고 표시가 된 거대한 폭포와 이어진 계곡, 우금이 가리켰던 곳과 같은 곳이었다.
“이곳은 거대한 계곡이 흐르고 있는, 흑산에서 물이 가장 풍부한 지역입니다. 이 정도의 불길이라도 능히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흑산적들은 불을 피하기 위해 이리로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굳이 여기서 일일이 불을 끄지 않고 이쪽으로 가면 된다는 말 아니오? 어서 갑시다!”
더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 서두르는 여포. 이때 고순이 여포를 말렸다.
“그리 급하게 생각하실 게 아닙니다. 후장군에게도 지도를 주셨지 않습니까? 그들 역시 지도를 보고 천수곡으로 올 것입니다. 그들과 마주치는 경우도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여포는 고순을 말을 듣고는 더 발광했다.
“뭐?! 그럼 더 서둘러야 된다는 말 아니오?! 이럴 시간이 없다! 어서 가자! 아버지! 빨리 군사들에게 명을 내리십시오!”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쉰 정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이놈아. 그만 좀 보채거라. 보자... 이곳은 불길이 거세니 조금 돌아서 이 길로 가면 되겠군. 걱정 말거라. 봉선아. 우리는 흑산을 훈련장소로 삼고 있을 만큼 흑산에 익숙하지 않더냐? 제깟 놈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우리보다 먼저 도착할 수는 없다.”
정원 말대로 흑산적 만큼은 아니지만 흑산이 꽤나 익숙한 병주 군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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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따라 산을 거슬러 오르는 군사들이 있었다. 대략 삼천 정도 되는 그 군사들은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어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경사가 진 산길을 오르는 것 자체가 힘들 일이다. 그런데 그 길이 일반적인 산길이 아니라 물길이라면? 적어도 두 배는 더 힘들어질 터였다. 길 자체도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라 힘든데 옷이 물에 젖으면서 무게도 더 무거워 지니까.
급기야 몇몇 군사들은 선두의 장수에게 다가가 사정했다.
“서, 서 장사님! 허억! 헉! 조금만 쉬어가면 아니 되겠습니까?”
그들은 이의민의 토벌군 선봉대, 그들 중에서도 특히 산을 잘 탄다고 추려진 군사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을 이끌고 있는 장수는 바로 서황이다.
“무슨 소리냐? 후장군께서 이미 저 앞으로 가셨다. 조금도 지체할 수가 없다. 한번만 더 그딴 소리를 한다면 이 자리에서 목을 베겠다.”
군사들의 요청을 칼 같이 자른 서황은 다시 행군을 재촉했다. 서황도 마음 같아서는 군사들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생각보다 느린 산행 속도에 이의민이 서황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먼저 가버렸기 때문이다. 일단 이의민을 당장 따라가야 되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서황 입장에서는 이의민의 인정을 받고 싶었다.
‘절대로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다.’
산길에 익숙한 자를 뽑다보니 별동대 삼천 군사들 중에는 백파적 출신이 많았다. 서황 역시 얼마 전 항복한 백파적이 아닌가.
서황은 그런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지휘권을 넘겨준 이의민에게 다시 한번 큰 감동을 받게 됐다. 물론 이의민은 그냥 답답하고 귀찮아서 서황에게 지휘권을 넘겨 준 것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서황은 자신을 신뢰하는 이의민의 기대를 어떻게든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서황이 그렇게 노력을 하지만 역시 이의민의 속도와는 비교가 될 수 없다. 이의민은 이미 다른 군사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참 앞으로 올라가고 있다.
그렇게 홀로 올라가다가 장연과 흑산적을 마주친 이의민. 백파적 5채주 정팔과 마주쳤을 때와 마찬가지로 두고 볼 것도 없다. 일단 허리춤에 있는 손도끼 하나를 장연으로 보이는 놈에게 던졌다. 그리고 장연은 그 손도끼를 가까스로 피해낸 상태다.
죽을 고비를 넘긴 장연은 자신에게 손도끼를 날린 이의민을 노려보았다.
“너 뉘기야?”
“나? 난 후장군 이의민이라고 한다.”
이의민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자 장연 뒤를 따라오던 흑산적 모두가 웅성거렸다. 그들도 후장군 이의민에 대한 소문을 귀에 박히도록 들었지 않은가.
그들도 이의민에 대한 소문을 모두 다 믿는 건 아니었다. 사람이 어찌 홀로 삼천의 적을 상대하고, 굴러오는 바위를 박살낸단 말인가. 하지만 괜히 그런 소문이 날 리가 없다고 다들 생각은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의민을 보고 잔뜩 긴장한 탓이다.
무려 6만에 달하는 흑산적과 이의민이 대치하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워낙 긴장해서 깨닫지 못하던 장연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깨닫게 됐다. 지금 이의민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혼자야?”
“어. 아직 처자식이 없으니.... 혼자가 맞지.”
장연의 눈이 빛났다. 상대가 후장군이든 황제든 상관없었다. 상대는 혼자일 뿐이고 자신들은 무려 6만이나 됐다.
“크하핫! 저 멍청한 놈을 죽여라!”
뒤에 있던 흑산적들도 여태껏 겁먹은 티를 벗어던지고, 장연의 명에 따라 신나게 뛰어나갔다.
무려 6만대 일의 싸움이다. 하지만 이의민은 전혀 아랑곳없이 그들을 상대했다. 선두에 오는 흑산적 하나를 대부로 그대로 찍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흑산적이 창을 찔러왔다. 이의민은 그 창을 한 팔로 잡아서 가볍게 꺾어버리고, 그 흑산적의 머리도 대부로 쪼개버렸다.
이의민이 휘두르는 대부에 선두로 나섰던 흑산적 열댓 명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하지만 장연과 나머지 흑산적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으로 이의민을 서서히 포위했다.
“크흐흐! 고놈, 듣던 대로 재주가 있는 놈이구나.”
이의민이 보여주는 무위가 가공할만하지만 그래도 6만 중에 고작 열 몇 명이 쓰러진 것뿐이다. 여기 있는 전체 흑산적 중에서는 구우일모(九牛一毛)도 안 되는 숫자일 뿐이었다.
이의민도 살짝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라도 혼자서 6만은 너무 많은 상대였다.
‘씨팔! 곽형 말을 따를 걸 그랬나? 많아도 너무 많잖아!’
사실 이의민은 흑산적이 굉장한 혼란에 빠진 상태로 물길을 내려올 거라고 생각했다. 갑작스런 불에 놀라기도 했을 테고, 그 많은 숫자의 흑산적이 좁고 거친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장연만 빠르게 잡는다면 우왕좌왕하는 흑산적을 상대로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장연이 이끄는 흑산적들은 생각보다 정비가 굉장히 잘 된 상태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우왕좌왕하는 흑산적들을 각개격파 하는 게 아니라 정비된 6만 군사들을 그대로 상대해야 할 판이다.
‘일단 이대로 튈까? 아니다. 장연. 저 새끼의 목만 어찌 따면 될 텐데....’
이의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미타산의 경우와는 달랐다. 일단 전성기 시절로 되돌아갔다는 건 둘째 치고, 그때와는 달리 사방이 겹겹으로 포위된 상태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좁은 물길 주변으로만 포위하고 있으니 포위망의 두께가 훨씬 얇았다. 실제 싸움에서는 6만 군사들 중 아주 일부만 상대한다는 뜻이고,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의민은 어떻게든 장연의 목만 따보려고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그렇게 흑산적들을 상대하고 있는데 갑자기 흑산적 위쪽에서 어마어마한 함성이 들려왔다.
“와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