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호적수 (2)
사내의 외침에 따라 몇 명의 패거리들이 객잔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들의 복장을 보아하니 그들도 어느 지역의 군사들인 것 같았다.
“옛! 여 장군!”
처음 들어왔던 사내는 군사들로부터 여 장군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여 장군만 건들거릴 뿐, 이후 들어온 자들은 하나 같이 절도 있는 동작을 보였다. 그들도 이의민 패거리를 보고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의민 패거리의 복장을 보며 고위 장수들이라는 추측을 한 모양이다.
하지만 여 장군이 어서 자리에 앉으라고 재촉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모두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고위 장수들로 보이는 이의민 패거리보다는 같이 온 여 장군의 눈치를 더 보는 듯했다. 여 장군이 아마 군사들의 지휘관이리라.
그래도 일반적인 군사들이라면 고위급 장수로 보이는 이의민을 더 두려워 할 텐데, 이례적인 모습이었다.
이의민 패거리들의 목소리만 들렸던 객잔이 더 시끄러워졌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한 패거리가 더 늘어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새로 들어온 패거리들은 의외로 대부분 조용했다. 더 시끄러워 진 건 오직 여 장군 한 명 때문이었다.
“아! 빨리 술을 내오거라! 왜 이리 늦는 것이야?!”
“조,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손님. 오늘 술이 다 떨어지는 바람에 급히 구해야 해서....”
“뭐 한다고 술집에 술이 없는가?! 에잉! 그럼 기다리게 한 대신 안주라도 맛있어야 하네. 맛있지 않으면 돈 받을 생각 말라고!”
조용히 흑산 토벌에 대한 얘기를 나누려고 했던 이의민 패거리는 곧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참지 못한 왕광이 먼저 나섰다.
“저놈들이....!”
자신들이 누구인지 밝히고 저들을 쫓아내려 했던 왕광은 곧 자신을 제지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제는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다.
“뭘 일어서? 그냥 냅둬.”
당연히 이의민이다.
“하지만 주군....”
“그냥 앉으라니까. 우리가 전세 낸 것도 아니고.... 살면서 제일 열 받는 일이 뭔지 아나? 등 뒤에서 칼을 맞았을 때? 집에 불이 났을 때? 아니야. 술 먹으려고 하는데 술집에서 쫓겨났을 때, 그것만큼 열 받는 일이 없어. 그러니까 앉아. 난 원술이랑 똑같은 놈이 되기 싫어.”
이의민의 마지막 말에 왕광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이의민이 낙양 외성의 객잔에서 원술과 시비가 붙어 그의 코뼈를 날릴 때, 왕광 역시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의민의 자비(?) 덕분에 별일 없이 한 객잔에서 술을 마시게 된 두 패거리. 하지만 언제나 그 놈의 술이 문제였다.
여 장군은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벌써 술 한통을 다 비워버렸다. 그리고는 술기운에 큰 목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크하하! 뭐 듣자하니 이의민...? 별 듣도 보도 못한 놈이 혼자서 뭐 백파적을 다 쓸어버렸다는데,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왜 별 거도 아닌 거 가지고 그 놈을 그리 띄워주는 거냐?”
여 장군은 어디서 들었는지 이의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의민이 했던 건 전부 자신도 할 수 있다는 둥 허풍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그걸 들은 이의민은 잠자코 술을 마셨지만, 참지 못한 자도 당연히 있었다. 곽봉은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급히 일어나 여 장군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갔다.
“이 놈! 술자리라서 좋게 넘어가주려고 했더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구나!”
곽봉의 서릿발 같은 외침에 혼자 떠들던 그는 그제야 힐끔 뒤를 돌아봤다.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단 말인가? 네놈은 못하나보지?”
“네, 네놈이라고?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나는 우림중랑장 곽봉이니라!”
곽봉이 자신의 직위를 밝혔다. 하지만 그는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중랑장이라는 관직명을 듣고 코웃음을 칠뿐이다.
“우림중랑장? 네놈이 중랑장이란 말이냐? 크하하하! 개소리도 정도껏 하거라. 너 같은 놈이 무슨 중랑장. 네가 중랑장이면 나는 대장군이다!”
여 장군은 곽봉이 중랑장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이의민이 그 소문의 후장군이란 것도 모르고 있다.
“뭐라고?! 이 건방진 자식이!”
곽봉이 지금 착용하고 있는 갑옷만 봐도 보통의 장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충분히 중랑장으로 생각할 법도 한데 상대는 무슨 생각인지 거짓말로 치부했다.
곽봉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로 품에 차고 있던 검을 빼들려고 했다. 하지만 곽봉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검을 빼려는 자신의 팔을 잡은 강한 힘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힘이 어찌 강한지 곽봉은 팔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 힘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이의민이다.
“형님. 일단 자리로 돌아가 앉으쇼.”
“하지만 저놈은....?!”
“괜찮소. 내가 처리하겠소.”
곽봉을 앉힌 이의민은 흥미가 가득한 눈으로 여 장군을 쳐다봤다. 상대가 보통이 아님을 한눈에 알아챘다.
전체적으로 보면 호리호리해 보이지만 그건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어서 그리 보이는 것이었다. 그의 몸을 구석구석 살펴보면 목과 허리, 팔뚝과 허벅지가 굵직한 것이 타고난 힘이 예사롭지 않아보였다.
무엇보다 다른 이들은 잘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의민은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여 장군의 몸에서 스멀스멀 풍겨져 나오는 기운은 그가 매우 위험한 인물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의민은 마치 자신의 유일한 호적수, 두경승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의민은 곽봉이 만약 검을 뽑았다면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이는 바로 곽봉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나선 것이었다.
“그래. 믿지 못하겠다고? 의심을 하는 버릇이 나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앞뒤 없이 함부로 의심하다가는 어찌 되는지 배우지 못했나?”
“크흐흐! 넌 또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넌 그럼 후장군이라도 되....?”
여 장군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이의민의 몸에서 풍기는 강한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그 살기는 여 장군뿐만 아니라 그의 수하들로 보이는 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됐다. 여 장군 다음으로 높아 보이는 장수가 이의민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후장군 되십니까?”
“호오! 그래. 내가 바로 후장군이다. 그런데 여기 있는 놈들은 예의란 걸 모르는 놈들인가? 고관을 봤으니 정체를 밝혀야 할 것 아닌가.”
“죄송합니다. 후장군. 소인 병주자사 정원을 따르는 고순이라 하옵니다. 여기 계신 분은 그분의 양자인 여포님이십니다.”
여 장군이라 불렸던 사내의 정체는 바로 여포, 그리고 그 옆의 사내는 고순이었다.
그 이름을 들은 이의민도 속으로 살짝 놀랐다. 여포라는 이름은 이의민도 잘 알고 있었다.
삼국지에서 그 어떤 이도 범접할 수 없는 무력을 가진 이, 항우와도 비견되는 이가 바로 여포 아닌가. 삼국지 최고 무장인 관우와 장비, 거기에 유비까지 더한 대결에서도 버틴 것으로 유명했다.
그만큼 여포가 유명한 인물이니 이의민도 모를 수가 없다. 그러니 처음 여포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이의민도 남다른 감흥을 느꼈다.
‘이 자가 그 여포라.... 과연 명불허전이구나. 지금 당장 맞붙는다면....’
이의민은 당장 승부를 벌인다고 하더라도 여포를 반드시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삼국지 시대로 넘어온 이후 처음으로 드는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이의민은 전혀 언짢은 기분이 아니다. 오히려 온 몸이 흥분되는 걸 느꼈다. 이의민이 가진 무인의 피는 항상 더 강한 상대를 갈구 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만족할만한 적이 나타났으니 오히려 더 기뻐 날뛰고 싶은 심정이다.
한편 여포 역시 시종일관 이의민을 무시하던 태도를 지웠다.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정도 살기를 뿌릴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없다. 있다면 자신과 소문의 그 후장군뿐일 것이다. 즉, 눈앞의 상대는 이의민이 확실하다.
“여포가 후장군을 뵙습니다.”
“후후! 이제야 태도가 조금 바뀌는군.”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당장 무릎을 꿇고 빌었을 터. 하지만 여포는 여포였다. 분명 태도는 정중하게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몸을 굽히지는 않았다.
“그래. 이제 어쩔 텐가? 고관의 모욕한 죄를 물어 그대를 참해도 되겠는가? 아니면 양부인 정원에게 그 책임을 물을까?”
“소장의 실수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는 무인입니다. 장군 역시 마찬가지 인 것으로 압니다. 무인의 잘못을 벌하시려거든 무(武)로서 벌하셔야지 않겠습니까.”
사실 여포의 말은 억지였다. 말이 좋아서 무로 벌을 하라는 것이지 결국 자기가 이기면 벌을 안 받겠다는 뜻 아닌가. 이의민이 그렇게 해 줄 필요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자신의 피를 끓게 만든 여포를 허무하게 죽일 생각은 없었다. 이의민은 객잔에 구석에 있는 돌 장식 하나를 들었다.
“좋다. 그럼 내가 던지는 이 돌을 네가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받아낸다면, 네놈의 처벌은 없던 일로 하지.”
제법 큰 장식이라 보통 사람이라면 온 몸에 힘을 주어도 제대로 들기 힘들어보였는데, 이의민은 그걸 한 손으로 가볍게 들었다. 모두가 입을 벌리고 이의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의민이 그 돌 장식을 던진다면 그 누구도 제대로 받아내기 힘들어보였다.
하지만 여포는 별 고민도 없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 정도는 얼마든지 받아낼 수 있다는 듯 말이다.
“남아일... 중천금이라 하였습니다. 후장군께서 설마 허언을 하시지는 아니하시겠지요?”
“중간에 뭘 빼먹은 거 아니냐? 나도 가물가물하긴 한데... 어쨌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나도 사내대장부로서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그럼 던져보시지요.”
이의민은 큰 돌 장식을 여포에게 그대로 던졌다. 거대한 돌 장식이 마치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그대로 여포의 몸을 짓뭉개 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더욱 놀랍게도 여포는 쏜살같이 날아오는 돌 장식을 그대로 받아냈다. 그의 두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입술은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나오고 있었지만, 끝내 그의 발은 땅에 깊게 뿌리를 내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둘 다 믿기지 않는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 여포.
“자! 받아냈습니다. 하하하!”
이의민도 애초에 여포가 그 돌 장식을 받아낼 거라 예상했던 것인지 가볍게 웃었다.
“그래. 그 정도는 가볍게 받아낼 줄 알았지. 아무렴 천하의 여포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그럼 약속대로 네놈의 무례에 대한 처벌은 없는 것으로 하지.”
그런데 이의민은 갑자기 뒤에 있던 대부를 꺼내들었다. 그 모습에 고순이 놀라며 이의민에게 항의했다.
“후장군! 분명 처벌은 없던 일로 하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내가 언제 처벌한다고 했느냐? 몸이 달아올랐는데 이대로 끝내기는 아쉽지 않느냐? 처벌과는 상관없이 무인끼리 어울려보자는 것이다.”
이의민의 말에 여포 역시 씩 웃으며 방천화극을 꺼냈다.
“바라던 바입니다.”
곧 둘 간의 일기토가 벌어지기 직전이다. 하지만 고순은 둘을 그대로 놔둘 생각이 없었다. 여포에 처벌을 겨우 무마시켰다. 그런데 또 여포가 후장군과 싸움을 벌인다면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었다. 물론 당사자인 여포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후장군! 여 장군! 뜻은 알겠지만 여기서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무슨 소리요? 벌써 몸이 달았는데 어찌 그만두란 말이오?”
좀처럼 멈출 생각이 없는 여포. 결국 고순은 여포를 통제할 유일한 한 명을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여 장군. 한번만 더 사고를 치시면, 이번에는 자사께서 절대 넘어가지 않으실 겁니다. 제발 좀 자중하십시오.”
양아버지인 정원까지 들먹이니 아무리 막 나가는 여포라도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크흠! 알겠습니다. 후장군. 아쉽지만 비무까지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흐흐! 쫄았느냐?”
“아! 쫄긴 누가 쫄았다고....!”
정원 때문에 물러서긴 했지만 이의민이 도발을 해오니 여포 입장에서는 결코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여포는 고민을 하다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후장군. 어차피 후장군이 여기 온 이유는 흑산적들을 잡으려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흑산적을 두고 나와 겨루는 것입니다.”
“어찌 말이냐?”
“흑산의 초입에서 흑산적 산채까지 가는 길은 크게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우리 둘이 각각 두 길로 나눠 가서 먼저 장연의 모가지를 따는 쪽이 이기는 걸로 하는 겁니다.”
“좋다!”
둘의 승부가 갑자기 흑산적 토벌로 바뀌었다. 당장 이곳에서 여포와 한바탕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이의민 입장에서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원래 할 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의민은 못내 아쉬운 감이 있는 모양이다.
“헌데 승부에는 자고로 뭔가가 걸려야겠지. 만약 네놈이 승리한다면 네놈에게 적당한 장군직을 내려달라고 폐하께 주청을 드리겠다.”
여포는 나쁘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흐! 그게 정말입니까? 좋습니다. 그럼 소장은 아버지께 받은 스무 마리의 말을 걸겠습니다.”
이의민이 내건 장수직에 비해 말 20마리는 모자란 감이 있다. 하지만 이의민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자신의 생각보다 쉽게 이의민이 수락을 하자 여포의 표정이 살짝 뒤틀렸다. 이의민의 태도가 너무나 자신만만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이미 승리한 것처럼 느끼는 것 같지 않은가.
‘감히 이 여포님을 상대로 저렇게 건방지게 굴다니... 놈의 콧대를 한 번 제대로 꺾어 놓고 싶은데 좋은 수가 없으려나.... 옳지!’
스스로 기발한 생각이라고 자화자찬하며 여포는 이의민에게 한 가지 내기를 더 걸었다.
“후장군. 그것만으로 끝내기는 살짝 아쉽지 않습니까?”
“아니 그래도 나도 조금 부족하다고 느끼던 참이었다.”
“이건 어떻습니까? 패자는 승자의 양 발을 핥고 크게 세 번 개 짓는 소리를 내는 거지요.”
모두가 황당하다는 듯 여포를 쳐다봤다. 후장군에 대한 무례는 둘째 치더라도 수준이 딱 어린애들이나 낼 법한 내기가 아닌가. 하지만 더 황당하게도 이의민은 여포의 내기를 흔쾌히 수락했다.
“그거 괜찮군. 재밌을 거 같군.”
“....?!”
모두 경악한 눈으로 이의민과 여포를 번갈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