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호적수 (1)
토벌군은 하내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백파적을 토벌하기 위해 오랜 행군과 몇 번의 전투를 겪어서 지쳤다. 제법 많은 힘을 소모했으니 한동안 휴식이 필요했다.
군사들이 모처럼 휴식을 취하는 가운데 지휘관급들은 분주했다. 백파적을 토벌한 것으로 이번 임무가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황보숭과 여러 장수들, 그리고 제후들은 다시 갑론을박을 펼치며 흑산적 토벌에 대한 의견을 펼치고 있었다.
“지금 백파적을 격파한 이 기세를 살리는 것이 좋지 아니 하겠습니까? 지금 바로 전군을 이끌고 가서 흑산적들까지 쓸어버리시지요.”
“어허! 그리 생각 없이 가다가 백파적들에게 곤란을 겪을 뻔 했던 걸 벌써 잊었단 말이오? 차근차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일단 흑산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합니다. 어느 정도 정보를 수집한 이후에 가도 늦지 않습니다.”
“일단 우리 군의 백파적 토벌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적들의 기를 팍 죽이고 시작하는 건 어떻습니까? 어차피 전쟁은 기세싸움이 5할 이상입니다. 기세부터 압도하면 패할 리 없습니다.”
각 제후들의 목소리가 백파적을 토벌하기 전보다 더 높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제후들은 백파적 토벌 때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었다. 백파적 토벌의 공은 거의 대부분 이의민의 공이나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제후들 입장에서는 반드시 흑산적 토벌 때 만회를 해야 했다. 그래야 최고 공신은 아니더라도 그 다음 순위 정도는 노릴 수 있을 테니까. 그리하여 반드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각 제후들이다.
워낙 여러 의견들이 난립을 해서인지 황보숭은 묵묵히 의견들을 듣고만 있고,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때 이 자리에서 가장 발언권이 높은 인물이 입을 열었다. 바로 원소였다. 의외로 군소 제후들이 열심히 떠들 때는 한 마디도 하지 않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러 제후분들의 의견을 종합해본 결과 굉장히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무슨 생각이오?”
“간단합니다. 후장군이 선봉에 서는 것입니다.”
원소의 말에 모든 제후들의 의문스런 표정을 지었다. 백파적 토벌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의민에게 가장 공을 크게 세울 기회를 또 주려는 것이다. 원소가 최고 공신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걸 잘 아는 제후들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다.
특히 포신, 교모, 왕광은 의아함을 넘어 분노의 눈길을 원소에게 보냈다. 원소가 또 무슨 헛짓거리를 하나 싶은 그들이다. 하지만 이의민의 말대로 지금 당장 공론화 시킬 수는 없기에 일단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잠자코 듣기로 했다.
“후장군이 선봉에 선다? 구체적으로 말해보게.”
침묵을 지키며 고민하던 황보숭도 관심을 나타냈다. 황보숭 입장에서는 원소의 의견이 충분히 일리가 있어 보였다. 백파적 토벌 때도 이의민의 별동대가 실제로 무슨 일을 당한지 모르는 황보숭은 그저 원소의 계획대로 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 때문에 원소의 무리한 행동에 본대가 위험에 빠졌어도 눈을 감아 준 것이다.
원소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렇습니다. 지금 가장 많은 군사들을 이끄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후장군입니다. 그가 원래 이끌었던 황군 오천에 백파적 1만까지 휘하로 들였습니다. 그만큼 많은 군사를 이끄는 이는 여기서 후장군 뿐입니다.”
원소의 말은 사실이다. 백파적 토벌 이전까지는 원소가 대략 12,000기로 가장 많은 군사를 이끄는 제후였다. 그런데 이의민이 백파적들을 흡수하면서 순식간에 역전됐다. 게다가 다른 이들은 아직 모르지만 포신, 교모, 왕광까지 휘하가 됐으니 이의민은 거의 17,000에 달하는 군사를 이끌고 있다.
물론 각 제후들의 본거지에 있는 군사들까지 합한다면 이의민의 순위는 다시 밀려날 테지만, 지금 당장 가진 병력의 수를 본다면 이의민이 가장 많다.
“뿐만 아닙니다. 후장군은 본신의 능력 또한 능히 만인지적이라 할 만하니, 선봉에 서기에 그 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그러니 후장군이 선봉으로 가서 적들의 기세를 꺾고, 적들에 대한 정보도 충분히 수집을 해온다면 토벌이 쉽게 되지 아니하겠습니까?”
한 마디로 네가 먼저 가서 이것저것 다 해 놔라는 뜻이었다. 어떻게 보면 일을 다 떠넘긴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이의민에게 좋은 일이다. 만약 이의민이 정말 원소 말대로 해버리면 공적의 차이는 도저히 어찌 할 수 없을 만큼 벌어지게 돼 버리니까. 그런데 그 의견이 최고 공신을 노리던 원소의 입에서 나오니 다들 의아할 수밖에 없다.
몇몇 제후들은 이런 생각까지 할 정도다.
‘최고 공신 자리를 탈환할 가능성이 아예 아니 보이니 그냥 후장군에게 다 떠맡기는 건가?’
여러 의견을 내던 제후들도 의외로 반발하는 이가 없었다. 그들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의민과는 격차가 너무 벌어져 애초부터 최고 공신자리를 포기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이의민을 더 밀어주고 자신들끼리 남은 공을 경쟁하는 것이 더 쉽다고 여기는 그들이다.
‘후장군이 다 차지하고 남은 작은 공을 두고 경쟁한다면, 우리도 바로 후장군 다음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모두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가운데 황보숭의 결정만 남았다.
황보숭 입장에서는 원소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황보숭이 보기에도 선발대를 보내는 계획이 나쁘지 않았고, 그 역할을 맡기기에는 이의민이 가장 제격이었다.
“후장군. 할 수 있겠나?”
“맡겨만 주십시오. 좌장군.”
이번에도 우직하게 아무 문제가 없다고 대답하는 이의민.
“그럼 자네가 고생해주게.”
황보숭이 결정을 내렸다.
포신과 교모, 왕광은 무섭게 원소를 노려보다가 나섰다. 그들은 원소가 이의민만 따로 선봉으로 보내는 건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여겼다. 그런 원소의 꿍꿍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나서는 그들이다. 그리고 원소와 함께 본대로 가는 것보다 이의민과 함께 가는 것이 그들 입장에서도 훨씬 더 좋기도 했다.
“좌장군. 아무리 선발대라도 후장군만 보내는 것은 아니 될 듯싶습니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일전 백파적 토벌에서 별동대로 후장군과 함께 해본 바, 호흡이 괜찮았으니 이번에도 저희가 후장군과 함께 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흠! 그러는 게 좋겠군. 그대들도 후장군과 함께 선봉으로 가게.”
이에 황보숭 역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제후들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도 사실 이의민과 가는 것이 더 좋아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선발대에 함께 간다는 선택지를 생각도 못했다.
이윽고 이의민은 자신이 이끄는 황군과 토벌에서 얻은 서황과 백파적, 그리고 세 얼간이를 데리고 병주 태원군으로 향했다.
이의민이 떠나는 모습을 보며 원소는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역시 원소가 이의민을 괜히 선발대로 보낸 게 아니다. 예상치 않게 세 얼간이가 끼어들었지만, 그건 방해가 되긴커녕 오히려 원소에게 도움이 되는 꼴이었다.
‘흐흐흐! 이의민. 세상이 다 네놈 것 같으냐? 그 오만한 생각도 이제 끝이다. 머저리 같은 놈들. 멍청하게 이의민을 따라가서 오히려 날 도와주다니....’
대체 무슨 계획을 세우는 걸까.
원소는 원술을 슬쩍 쳐다봤다. 그 시선에 원술은 딴청을 피웠다. 다른 건 몰라도 원술이 원소의 계획에 연관이 된 것 같았다.
‘흐흐! 공로, 저놈은 내 말대로 할 수밖에 없겠지. 이의민과는 불구대천의 원수이니....’
원소는 자신의 계획대로 될 것이라 확신하고 모처럼 편하게 휴식을 취하기 위해 막사로 들어갔다. 원술은 그런 원소를 불편한 눈으로 힐끔거리다가 그 역시 막사로 들어왔다.
그런데 원술이 막사로 들어오자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원술의 최측근 심복이자 모사인 양홍이다.
“주군. 원소의 제안대로 하시면 아니 됩니다.”
“뭐? 그럼 대체 어찌 이의민을 잡을 수 있다는 말이냐?”
막사 안에서 조용히 말하는 지라 밖에서는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양홍은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조심스럽게 원술에게 뭔가 귓속말을 했다.
그 귓속말을 들은 원술은 눈을 부릅떴다.
“뭐?! 양홍! 그러니까 날더러 그 놈에게 고개를 숙이란 말이더냐?”
“주군. 쉿! 과정이 많이 생략되긴 했으나 결론만 보자면 그렇습니다.”
대체 양홍이 무슨 말을 했기에 원술이 그를 이리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볼까?
“사세삼공 명문가의 자제인 내가 그 출신도 불분명한 천한 놈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
원술은 당장이라도 죽일듯한 눈빛으로 양홍을 쳐다봤지만, 정작 그 시선을 받은 양홍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런 양홍을 가만히 노려보던 원술. 놀랍게도 원술은 한숨만 내쉬고 더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가라앉힌 원소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휴우! 그래. 자네 말대로라면 이의민보다는 원소, 그 놈의 뒤통수를 치라 이 말인데....”
“그렇습니다. 우선순위가 뭔지 아셔야 합니다. 후장군은 현재 주군의 감정적인 적일뿐입니다. 반면 원소는 주군의 근본적인 적입니다. 원가가 천하 제일가라고는 하나, 그 힘이 두 갈래로 나눠져 있고, 이대로 간다면 그 힘은 원소에게 갈 것입니다. 허나 주군께서 여기서 원소를 제대로 무너뜨릴 수 있다면, 주군이 원가의 힘을 그대로 얻을 것입니다.”
진지하게 양홍의 말을 듣는 원술의 표정에는 더 이상 흥분된 기색이 없었다. 이것이 원술의 숨겨진 면모다. 이따금 그가 감정적이고, 단순 집안 배경만 내세우는 모습을 보이긴 했어도, 진짜 배경만 가지고 이 자리까지 오른 게 아니다. 개차반처럼 보여도 자기 사람은 확실히 챙기고, 충언을 들을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선발대에 대한 보급은 정상적으로 해야겠군.”
보급에 대해 언급하는 원술. 원소의 계획이 바로 보급을 이용한 장난질이다.
현재 토벌군의 보급은 원술이 책임지고 있다. 그런 원술을 이용해서 낙양에서 오는 보급을 중단한다. 그러면 가뜩이나 덩치가 커진 이의민의 군대는 큰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약탈을 통해서 보급을 확보하는 방법이 있긴 했다. 하지만 만약 이의민이 정말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우리가 토벌하려는 도적과 다를 게 무에 있냐고 공격할 거리가 된다. 그렇다고 보급이 중단된 채로 흑산적과 싸운다면 필패였다. 아무리 이의민이 날고 긴다고 해도 군사들은 싸울 힘이 없는데 어쩔 것인가.
‘보급에 대한 책임을 따져봤자 어차피 원술의 문제다. 그리고 이유야 어찌 됐든 이의민은 임무 실패에 대한 책임은 피할 수 없다.’
그렇게 이의민을 궁지로 몰게 하고, 나중에 본대가 싸울 때는 하북에서 모든 보급물자를 지원하여 가장 큰 공을 세우려는 것이 원소의 계획이었다.
완벽하게 계획을 세웠다고 여기는 원소. 하지만 첫 단추부터 어긋났다. 당연히 원소의 계획에 동참할 거라고 여겼던 원술이 양홍의 말을 듣고 고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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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지랄 났네! 지랄 났어! 어이구! 우리 착한 서 아우 눈에 멍든 것 좀 봐.”
“흐흐! 원래 훌륭한 무장은 맞으면서 크는 거요.”
“하여간 그 놈의 개똥철학하고는... 서 아우.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제가 원해서 시작한 일입니다. 제게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하내에서 병주 태원군까지 오는 동안 서황은 이의민에게 대련을 부탁했다. 심심하기도 했고 싸우는 거라면 환장하는 이의민이니 마다할 이유 없다. 혹시 서황이 이걸 계기로 더 강해진다면 더 좋은 일이기도 했다. 물론 이제 태원에 도착했으니 이 짓도 당분간 그만둬야겠지만 말이다.
태원까지 왔으니 이제 흑산적의 본거지인 흑산이 코앞이다. 하지만 쉬지 않고 가기에는 군사들의 피로가 컸고, 무엇보다 지금은 깜깜한 밤이었다.
세 얼간이들 중 교모가 이의민에게 다가와 조언했다.
“주군! 이제 흑산으로 가야하는데 오늘 밤은 태원성 근교에 군사들을 주둔시키고 저희들은 성내 객잔에서 하루 푹 쉬는 게 어떻습니까? 술도 한잔하고...”
술이라면 역시 마다할 리가 없는 이의민.
“거 좋지. 교모. 자네는 그래도 뭘 좀 아는 친구로군.”
소수의 호위 군사들만 동행한 채 토벌군 선봉대 지휘부는 태원성 안으로 들어와서 적당한 객잔을 찾았다.
객잔은 규모가 상당히 컸고, 장사가 잘 되는지 꽤 늦은 시간까지 운영을 하고 있었다. 이의민을 비롯한 선봉대 지휘부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거나하게 술판을 벌였다. 많은 수의 손님들은 눈치를 보며 슬슬 객잔 안을 빠져 나갔다.
낙양 외성의 객잔에서 원소의 패거리가 왔을 때 이의민을 제외한 손님들이 다 빠져 나갔던 것처럼 딱 봐도 고위 장군으로 보이는 이의민 패거리를 보고 평범한 손님들은 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전세를 낸 것처럼 자기들끼리 거나한 술판을 벌이는 이의민 패거리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한창 이의민과 아이들이 실컷 술을 마시고 있을 무렵 객잔의 문이 벌컥 열렸다.
선두에서 선 사내는 오만한 눈으로 객잔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 사내는 고위 장군으로 보이는 이의민을 보고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들어왔다. 그리고 이의민 쪽은 안중에도 없다는 밖을 보며 소리쳤다.
“다행이 자리가 넘쳐 나는 구나! 모두들 들어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