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서황의 선택 (2)
조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서황과 곽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황은 토벌군 내에서 특급 죄수로 꼽혀져 철저한 감시와 통제 하에 있었다.
그랬던 서황이 지금은 아주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비롯한 다수의 백파적 역시 포로 신세에서 벗어나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는 이의민의 가장 가까운 심복이라 할 수 있는 곽봉이 친근하게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이 두 가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차린 조조.
그는 이번 원정에 나서면서 스스로 감정을 조절을 잘하는 편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믿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절대 서황 앞에서는 미소를 잃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던 것마저 잊고 성난 얼굴로 따졌다.
“공명!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분명 나와 다짐을 두지 않았던가?!”
백파곡에서 한창 전투를 벌일 때도 이렇게 성이 난 표정은 아니었다. 서황은 그런 조조가 무섭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편하지 않았다. 조조가 자신에게 들인 지극정성을 알면서도 생각할 시간을 준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말을 바꿔 탔으니 말이다.
서황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슬쩍 곽봉을 쳐다봤다. 그런데 곽봉은 어디 갔는지 어느덧 저 멀리 가서 모르는 척 천연덕스럽게 서 있었다.
“으음.... 오늘 군사들 훈련을 내가 했던가...? 아니 했던가....?”
네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는 듯한 모습이다. 그에 서황은 이대로 조조를 회피하거나 못 본체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이런 일은 확실히 못을 박아야 한다. 지금 와서 조조에게 미안하다고 결정을 번복할 것도 아니고....’
결국 굳은 표정으로 조조에게 답을 하는 서황.
“조공. 분명 조공은 저에게 과분할 정도의 친절을 보이셨습니다. 허나 분명한 건, 저는 조공의 제안에 대해 생각을 해보겠다고 했지 다짐을 했던 적은 없습니다. 어찌 됐건 조공에겐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크윽!!”
조조는 화가 나서 더 따지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서황이 하는 말 중 틀린 말은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속으로 삭일뿐이었다.
한동안 조조와 서황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서황은 당장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어느 정도 분을 삭인 조조는 서황에게 다시 물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소. 왜 내가 아닌 그를 선택한 것이오?”
조조가 구체적으로 누굴 지칭하여 얘기하지도 않았지만, 서황도 조조가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 안다.
“그저 도끼.... 아니. 무의 끝을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내가 됐든, 내가 따르는 사람이 됐든....”
“무의 끝이라.... 허! 공명. 그대는 그냥 무인일 뿐이었소? 내가 본 그대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세상을 바꾸는 건 치(治)지 무(武)가 아니오. 분명 오늘 선택을 후회하게 될 것이오.”
서황은 더 대답하지 않고 그저 허리를 숙였다. 조조와 더 얘기를 해봐야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조조에게 논쟁으로 이길 수도 없고 이길 생각도 없다. 그렇다고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니 서황으로서는 무언으로 대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조조도 그런 서황의 칼 같은 태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더 이상 설득할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래. 그대의 선택을 존중하도록 하겠소. 허나 명심할 것은 다음에 그대와 내가 만난다면, 그때는 그대에 대한 내 대우가 많이 달라질 거요. 혹여 적이라도 됐다면 지금과 같은 자비는 더더욱 없을 것이고....”
살짝 싸늘한 말을 늘어놓고 돌아서는 조조. 서황은 비수와 같은 말을 들었음에도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서황은 몸을 돌려 백파적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조조는 잊고 이의민의 밑에서 어떻게 하면 그의 충직한 수족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했다.
서황이 보고 있는 1만이 넘는 백파적들. 이들 중에서는 2채 출신으로 원래 서황의 수하였던 자도 있고 다른 채 출신들도 있었다.
2채 출신들은 서황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자들이지만, 다른 채 백파적들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서황은 이들을 모두 자신이 이끌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다 같은 백파적 출신들이 아닌가.
‘내가 이들을 모두 확실히 이끌어서 주군께 도움이 돼야 한다.’
백파적들 앞에서 입을 여는 서황.
“너희들 중에서 자의로 도적이 된 자들도 있을 것이고, 아닌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너희들에게 기회가 왔다. 새 신분으로, 떳떳한 신분으로 살 수 있는 기회가 왔단 말이다. 너희들은 이 귀한 기회를 허무하게 놓칠 셈이냐? 그럴 생각이 없다면 모두 후장군을 잘 따라야 한다. 너희들이 새 인생을 잘 살 수 있을지는 모두 후장군께 달려 있다.”
“명심하겠습니다!!”
서황의 말에 1만이 넘는 백파적 모두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이들 중 서황의 실질적인 수하였던 2채 백파적은 고작 천여 명 정도다. 나머지는 전부 다른 채 백파적들이다. 그런데도 모두 한치의 어긋남 없이 서황을 따르는 모습이다. 그만큼 백파적 내에서 서황이 큰 신망을 얻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 백파적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서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의민이 여태까지 보여준 것 때문이기도 했다. 이의민의 무시무시함을 직접 겪은 이들이 바로 백파적들 아닌가. 그러니 백파적들은 후장군을 따르라는 말을 감히 거역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1만여 백파적들은 이의민의 군사가 됐다. 게다가 포신, 교모, 왕랑 세 제후들이 이의민의 수하가 되길 자청하면서 그들의 세력까지 흡수했다.
순유가 말했던 세력 키우기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의민은 벌써 이름을 까먹었지만, 서황과 같이 오자양장에 묶이는 우금까지 합류했으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기 밑에 벌써 쟁쟁한 이들이 모인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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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의 황궁. 그곳에서는 오랜만에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다.
“그 말이 정말이오? 백파적들이 모조리 토벌 되었단 게?”
“그렇사옵니다. 폐하. 이 모든 것이 폐하의 은덕이옵니다.”
“하하하! 참으로 경사스런 일이로다.”
백파적 토벌 소식이 낙양까지 퍼졌다. 늘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던 소제 유변이 모처럼 크게 웃었다. 황제만 이 소식을 반기는 게 아니다.
낙양성 저잣거리의 백성들도 황군이 백파적 토벌에 성공했다면서 기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낙양의 평범한 백성들과 백파적이 무슨 상관이 있겠나 싶지만, 낙양에서 하북을 오가는 상인들 입장에서는 백파적의 존재가 크게 신경 쓰이는 존재들이었다. 상인들에게 피해가 가면 당연히 낙양 백성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
물론 일반 백성들이 기뻐하는 건 그걸 알아서라기보다는 그저 도적이 토벌됐다는 소식에 좋아하는 것이지만.
“백파적들이 전부 토벌이 되었다더군.”
“그게 정말인가? 그놈들, 보통 세력이 아니었다던데.... 토벌군이 출정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토벌이 됐나?”
“그러게. 여태껏 황실에서도 손도 못 대고 있던 놈들인데....”
“이번에 새로 발탁되신 후장군께서 맹활약하셨다지 뭔가. 혼자서 삼천의 도적들을 때려눕히고 날아오는 바위들을 산산조각 냈다고 하시네.”
“허어! 그 무슨 되지도 않을 소문을.... 자네. 진짜로 그런 소문을 믿나? 사람이 어찌 홀로 삼천의 적과 싸우고 바위를 박살낸다는 말인가? 딱 들어보니 전부 말도 아니 되는 헛소문일 뿐이군.”
“어쨌든 후장군께서 큰 역할을 하셨다는 건 사실이라네.”
그리고 백파적 토벌에 언급되는 인물 중 가장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인물이 바로 이의민이다. 그의 활약이 너무 말이 안 돼서 그럴까. 보통 소문이란 건 전해지면 전해질수록 과장되기 마련인데 그런 것도 없다.
그런 백성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흐뭇한 표정을 짓는 한 사내가 있었으니.
낙양의 객잔에서 두 사내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둘 중 한 명은 이의민에게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었던 황문시랑 순유다.
“공달. 좋으시겠네 그려. 모시는 분이 저런 극찬을 들으니 말일세.”
“후후. 원상형도 곧 따라야 할 사람입니다.”
순유가 원상이라고 부른 사내. 순유와 같은 고향 출신인 그는 바로 종요였다.
순유는 이의민에게 도움이 될 만한 자들을 추려 직접 포섭에 나서고 있었다. 종요가 그 첫 번째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끼! 이 사람. 나같이 벼슬도 없는 한량을 누가 알아준다고.... 그렇다고는 해도 아무나 따를 생각은 없네. 내가 제법 눈이 높거든.”
“후훗! 후장군 앞에서는 그런 말씀 마십시오. 듣던 것 이상으로 성격이 급하신 분이니까.”
종요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혀를 차며 물었다.
“싫은 소리도 못 들어. 말투도 천박해. 성격도 급하고 지랄 맞아. 이런 자를 대체 왜 그리 따르는 것인가? 나는 정말 이해가 아니 되네. 공달. 자네와 같은 인물이라면 그런 자보다 훨씬 더 큰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지 않겠나?”
“하하! 몇 가지 빼먹으셨군요. 작은 인연도 챙길 정도로 의리가 있고, 대범해서 행동에 거침이 없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들어보니 후장군도 대단하긴 한데.... 에휴! 아닐세!”
종요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다 못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치다가 술을 한입 털어 넣었다.
“후장군은 말로 아무리 떠들어봤자 진가를 알 수 없는 사람입니다. 백 마디 말보다 직접 그를 한번 겪는 것이 정확합니다.”
“알겠네. 뭐 자네가 그리 추천을 하니 내 어디 한번 만나나 보지.”
한창 둘이서 술을 마시고 있을 무렵 뒤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 다른 이도 아니고 공달선생이 그런 말을 하니까 원상선생이 저러는 거 아닙니까?”
뜻밖의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는 순유. 이제 소년 티를 겨우 벗은 인물이 하나 보였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유의 표정에는 큰 반가움이 깃들었다.
“곽봉효 아닌가? 자네 언제 왔는가?”
곽가였다.
곽가는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후 술을 한잔 마셨다. 아직 술을 잘 못할 것 같은데도 아무렇지 않게 마신다.
“공달선생이 주군을 정했다는 말에 대체 누구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 말이죠. 오는 길에 후장군에 대한 말이 워낙 많이 들려오기도 했고요.”
“하하! 그러고 보니 봉효 자네도 성격이 지랄 맞다는 말은 많이 듣지 않았던가? 둘이 의외로 잘 어울릴 수도 있겠어.”
순유가 은근슬쩍 자신도 영입하려 하자 곽가는 몸서리치며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는 그저 호기심에 구경 온 겁니다. 아무리 공달선생이 울고 불며 매달려도 소용없습니다.”
“쯧쯧! 울고 불며 매달린다니.... 말을 해도 어찌....”
순유는 곽가를 살짝 흘겨보면서도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종요와 곽가. 이 둘은 자신도 인정하는 기재 중의 기재였다. 이들이 이의민을 돕는다면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