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무신이 삼국지를 다 때려부숨-21화 (21/175)

21. 토벌군이 믿는 것 (2)

“존명!!”

이의민은 황보숭의 명을 받자마자 포권을 하고는 바로 백파적들에게 뛰어갔다.

이의민의 첫 번째 목표는 단연 총채주인 곽태다. 역시 싸움이든 전쟁이든 적 우두머리를 잡는 것이 가장 빠르게 승기를 잡는 법이다.

하지만 이미 이 전투의 승패는 진작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곽태는 자신에게 달려오는 이의민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백파적들을 재촉했다.

“으아아악! 마, 막아라! 어떻게든 막아라!!”

하지만 모든 백파적이 서로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이의민의 앞을 막는 역할을 서로 미루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백파적들이 절대적으로 신뢰하던 서황이 단 3합 만에 쓰러졌으니 말이다. 이것만으로 백파적들의 사기는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자존심이 생존본능을 이긴 자가 없지는 않았으니. 3채주 한섬이 나섰다. 꼴에 백파적 수뇌부라는 마지막 자존심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킨 모양이다.

“네 이놈! 거기 멈춰라! 나 3채주 한섬이 너를 상대하겠다.”

“훗! 조무래기 자식. 너도 때 되면 죽여줄 테니 얌전히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어라. 물론 그리 먼저 뒤지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으마.”

“어찌 후장군이란 자가 그리도 경박하단 말인가?!”

“내가 경박해?! 난 그 말이 좋아. 사실이니까. 하지만 날 경박하다 부르는 놈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뭐, 뭔 소리야?!”

당황하는 한섬에게 대부를 휘두르는 이의민. 딱 한번의 휘두름이었다. 그것으로 한섬의 목이 날아갔다. 둘 사이의 경합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한섬!!”

한섬의 죽음에 눈이 시뻘개진 남흉노의 선우 어부라가 뛰쳐나갔다. 하지만 그 역시 한섬과 운명이 다르지 않았다. 단 일격에 목이 떨어지는 어부라였다.

곽태는 부릅뜬 눈으로 자신의 최측근 수하들의 목이 달아나는 걸 지켜봤다. 곽태는 그래도 분노보다는 자신의 목숨이 우선이었다.

“으아아! 막아라! 제발 누구라도 저 야차를 막아! 채주 놈들아! 뭔 짓이라도 해보라고!”

미친놈처럼 고래고래 외치며 백파적들을 재촉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듣는 이가 없다.

서황이 쓰러졌고, 한섬과 어부라 역시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했다. 백파적의 기둥인 그들이 모두 당했으니 어느 누가 이의민을 막으랴.

이의민만이 아니었다. 병사들을 거느린 제후들은 어떻게든 공을 세우기 위해, 혹은 지금까지 쌓인 울분을 풀어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눈앞의 백파적들을 베고 또 베었다. 성난 토벌군의 기세를 백파적들은 받아낼 수가 없었다. 한섬 같이 호기롭게 몇몇 채주들이 나서 보았지만 성난 기세의 토벌군 앞에서는 그야말로 중과부적이었다.

백파곡에 깔리는 백파적의 시체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늘어나자, 백파적들의 분위기도 바뀌기 시작했다. 당연히 결사항전 같은 비장한 것이 아니다.

백파적들은 총채주인 곽태의 명령과는 정반대로 서로 앞 다퉈 길을 열었다. 그리고는 마치 상전을 모시듯 이의민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심지어는 벌써부터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을 하는 백파적들도 있었다.

“후장군! 저희 6채는 후장군께 항복하겠습니다!”

“모든 것이 저 총채주 곽태 놈이 저지른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저놈의 꼬임에 속았을 뿐입니다!”

이제 전투는 의미가 없었다. 물론 이쪽이 아닌 다른 쪽 편에서는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해 계속 싸우고 있는 백파적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지금 이 모습을 본다면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이어가지 못하리라.

곽태는 여기저기서 항복하는 백파적들을 보며 끝까지 악을 썼다. 하지만 그건 배신하는 부하들의 모습에 분노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당장 이의민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몸부림일 뿐이다.

“이, 이놈들! 무슨 항복이냐?! 어서 무기를 들지 못할까? 어서 저놈을 막으라고...! 커어억!”

곽태의 몸부림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누군가 그의 등 뒤로 칼을 찔러왔기 때문이다. 백파적 총채주 곽태는 그렇게 등 뒤에 칼을 맞고 죽었다.

곽태의 등에 칼을 꽂은 장본인은 놀랍게도 2채주 양봉이었다. 곽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누구보다 충직한 수하였던 양봉이 곽태를 죽인 것이다.

양봉은 곽태의 시체를 이의민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는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선언했다.

“항복! 나 양봉은 항복하겠습니다. 곽태를 죽여 후장군께 바칩니다.”

양봉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단번에 곽태를 배신했다. 어찌 보면 현명한 처사였다.

보통 적이라도 우두머리의 머리를 들고 온 자라면 처단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어느 정도 대우를 해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양봉도 그걸 믿고 직접 곽태를 죽여 이의민에게 바쳤다. 하지만 이의민은 그런 일반적인 처사를 행할 인물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 양봉의 행동 때문에 전생에 최충헌에게 당했던 것이 생각났다. 최충헌의 경우 자신의 목숨을 위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득을 위해 동고동락했던 동지를 죽였다는 건 같은 경우 아닌가.

“이 박쥐같은 새끼가 어디서!”

양봉은 다가오는 이의민을 보며 얼굴이 굳어졌다.

“자, 잠깐...!”

양봉의 외침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대로 목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의민이 양봉까지 죽이자 백파적들은 더 이상 싸울 의지를 보이지 못했다. 모든 백파적들이 그 자리에서 병장기를 내던지며 무릎을 꿇었다. 이의민은 그들을 향해 외쳤다.

“이놈들아! 내가 미리 말하는데 한 채당 500명, 딱 500명만 살려준다.”

백파적들도 이의민이 말하는 500명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모두 500명 안에 들어가기 위해 앞 다투어 항복해왔다.

“저기 제가 먼저 항복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손은 먼저 들었습니다.”

“미친놈아! 손만 들면 항복하는 거냐? 무릎은 제가 가장 먼저 꿇었습니다!”

저마다 서로 항복하겠다고 난리였고, 자신이 먼저 항복을 했다고 난리였다. 보통 이런 전쟁에서 패한다고 해도 누가 먼저 항복을 하는지 서로 눈치를 보며 시간을 끌기 마련인데, 500명만 가려 받는다는 것 때문에 눈치보고 자존심을 세우는 이들은 한명도 없다.

결국 모든 백파적들이 항복을 했고, 자신이 과연 500명 안에 들었을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의민은 그 모습을 보더니 씩 웃으며 한마디 더 했다.

“아! 생각해보니 이걸로 백파적 토벌은 끝이잖아? 그럼 굳이 500명 제한을 둘 필요는 없겠군. 기분이다! 다 포로로 받아주마!”

“우와아아!!”

이의민의 말에 모든 백파적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500명 안에 드나 못 드나 가슴 졸이고 있었는데, 다 받아준다니 이보다 더 기쁠 수 없었다. 전쟁에서 패배해 포로가 된 이들이 모두 기쁨의 표정을 짓고 있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로서 백파적 토벌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전에 잡은 놈들까지 합하면 무려 1만에 가까운 백파적들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리고서.

총대장인 황보숭은 물론 참여했던 제후들 대부분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누구보다 공적 욕심이 많았던 그들이지만, 죽을 위기까지 몰렸다가 살아났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모든 제후들이 기뻐하는 건 아니었다. 원소는 죽이고 싶다는 표정으로 이의민을 바라보고 있다.

당연히 죽었을 거라고 여겼던 이의민이 살아있는 것도 모자라 백파적 토벌의 최고공신 자리를 가져갔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된 건 아니었지만, 여기 있는 그 누가 봐도 이의민의 공이 가장 컸다.

원소 입장에서 아직 포기할 단계는 아니었다. 실제 토벌군의 임무는 백파적뿐만 아니라 흑산적까지 토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원소는 공적을 뒤집을 가능성이 없다고 여겼다.

그만큼 이의민이 보여준 무위가 대단했다. 무엇보다 다른 제후들이 이의민에게 가지고 있던 반감이 없어진 것이 컸다. 특히 이의민 뒤에 나타난 세 얼간이들을 확인하고는 확실히 깨달았다.

‘엇! 저놈들이 어찌 살아있지? 설마 이의민에게 암습을 시도하지도 않은 것인가? 아예 이의민과 붙어먹은 것이야?’

원소는 상지곡에서 낙석이 발동되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당연히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의민이 서황을 이겼다지만, 그것과 이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렇다면 세 얼간이가 원소의 뜻대로 이의민을 암살했어야 했다. 그런데 만약 그랬다면 이의민과 세 얼간이가 저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있을 리 없다. 즉, 원소는 낙석도 발동되지 않았고 겁쟁이인 저들이 암살시도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원소는 분노하면서 세 얼간이 중 포신에게 다가갔다.

“포신!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우리 계획을 시도조차 하지 않은 거요? 아예 내 계획을 이의민에게 알린 건가?”

포신은 당황스런 표정으로 질문하는 원소를 한껏 비웃었다.

“훗! 그렇다. 네 그 더러운 계획을 모두 후장군... 아니. 주군께 말씀드렸지.”

“뭐? 주, 주군?”

원소는 포신이 이의민을 주군이라 칭하자 충격을 받았다. 자신도 세 얼간이에게 맹주로 추대는 되었을지언정 엄연히 동등한 제후의 입장이 아니었던가. 그랬던 세 얼간이가 이의민은 주인으로 받드니 정신이 어질어질해지는 원소다.

“저, 정말 우리 연맹을 이리 저버릴 셈인가? 이 배신자 놈아!”

“누가 누구보고 배신자라는 거냐?! 이 더러운 놈! 지금은 주군의 당부 때문에 조용히 있겠지만 차후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뭐....?”

한겨울 눈보라처럼 쌀쌀맞은 표정으로 원소를 지나쳐 가는 포신. 그 뒤를 이어 왕광, 교모 역시 원소에게 냉소를 날리고 지나갔다. 원소는 멍한 표정으로 세 얼간이의 뒷모습을 볼 뿐이었다.

원소는 지금 세 얼간이들이 왜 자신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

백파적 토벌을 성공한 토벌군은 잠시 하내로 되돌아갔다. 추포한 백파적들까지 데리고 흑산적을 토벌하러 갈 수는 없기 때문에 그들을 하내로 인계하기 위함이다.

대부분 밧줄에 포박이 되어 줄줄이 끌려갔지만, 백파적 채주나 간부 같은 요주의 인물들은 감옥처럼 만든 수레에 실려 갔다.

서황 역시 감옥수레에 실려 가고 있다. 그가 있는 감옥수레 주위로 수십여 명의 군사들이 교대로 돌아가며 엄중한 감시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이들과는 온 팔다리를 전부 꽁꽁 포박한 상태였다. 그만큼 토벌군에서는 그를 위험한 인물로 보고 있었다.

서황은 이 삼엄한 감시 속에서 탈옥하는 건 애초에 포기를 했다. 그저 하염없이 밤하늘을 보며 회상에 빠진 서황.

‘세상에 그런 괴물이 있었다니....’

마주섰을 때 받은 느낌도 놀라웠지만, 막상 붙어보니 더 놀라웠다. 단 3합 만에 완패했다. 그럴 수 있는 자가 있으리라곤 지금까지 상상도 못했다.

게다가 마지막엔 자신에게 조언까지 해줬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롱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서황은 이의민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붙으면 이길 수 있을까?’

서황은 생각을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피식거렸다. 그도 자존심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물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늘과 땅 차이다.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서황이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 감옥 수레 쪽으로 다가 왔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나?”

그 사내의 말에 경비를 서던 수십 명의 군사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비키는 걸 보니 꽤나 높은 위치에 있는 자 같았다.

‘대체 누가....?’

마침내 서황 앞에 선 사내. 백옥 같은 얼굴에 수염을 멋들어지게 자른 사내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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