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토벌군이 믿는 것 (1)
많은 토벌군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의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정도는 덜했지만, 원수였던 원술조차 같은 눈이었다. 적일 때는 정말 미웠지만, 같은 편이니 그리 듬직할 수 없었다.
물론 모든 토벌군이 그런 분위기에 동참한 건 아니다. 원소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이의민을 쳐다보고 있다.
‘대체 저놈이 어찌 살아서....?’
한편 백파적들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의민을 쳐다봤다.
“저놈들은 어디서 나타난 놈들이야?”
“이 자리에 관군 복장으로 갑자기 나타난 놈들이라면 하나밖에 없지 않나? 상지곡 길로 갔던 놈들....”
“뭐? 헛소리! 그놈들은 틀림없이 상지곡 매복에 걸렸을 텐데, 지금쯤 전부 시체가 되었겠지.”
“그게 아니라면 대체 누구야? 증원군을 보냈다고 해도 벌써 여기까지 오는 건 더 말이 아니 되지.”
백파적 본대는 상지곡 길에 매복을 했었던 매복조의 결과도 아직 모르고 있다. 그들은 애초에 낙석 함정이 발동되는 것만 확인하고 그 결과를 들을 생각도 없었다. 적이 낙석 함정에 걸려들지 않고 우회하거나, 낙석 함정의 근원지를 선제 타격한다면 모를까, 한번 걸려든 이상 적들이 초토화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단순히 백파적들만의 생각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작게는 송아지 크게는 나룻배만한 바윗덩이를 좁은 협곡에 퍼붓는데 거기서 살아날 군대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이의민이 해낸 것뿐이다.
이의민의 등장으로 인해 전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백파적은 이의민을 보고는 귀신이라도 본 듯 굳어버렸다. 반면 토벌군 대부분은 살았다는 듯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후장군이 오셨다!”
“후장군! 오셨군요.”
사실 이의민 입장에서 원소와 원술, 둘을 제외한 제후들을 싫어할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그들이 이의민을 먼저 싫어하며 배척한 것 말이다. 세 얼간이들처럼 수하로 들어오는 게 아니더라도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면 잡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원소는 몰라도 원술은 이의민 입장에서 원수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어쨌거나 이의민이 원술에게 일방적으로 가해한 상황 아닌가? 그 이후 원술이 죽이겠다고 난리친 적은 있었지만, 일개 보사가 명문가 자제를 폭행한 셈이니 따지고 보면 과한 처사도 아니었다.
적어도 남자들끼리는 주먹다짐으로 친해진다고 믿는 이의민이었기에, 원술에게는 딱히 악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반대로 더러운 계책으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원소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적이었다.
그러니 이의민은 애타게 자신을 원하는 제후들을 굳이 무시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이의민은 손을 들어 그들의 환호에 화답을 해주었다.
“훗! 귀여운 놈들! 나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느냐?”
이의민이 포위망 한쪽을 향해 나아가자 그쪽의 백파적들은 싸울 생각도 않고 자신도 모르게 길을 터주었다. 자연스럽게 포위망을 뚫고 본대로 복귀하려는 이의민. 그래도 그 와중에 이의민의 앞을 막는 백파적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바로 백파적들의 희망이자 정신적 지주인 서황이다.
이의민은 서황을 보고는 본대를 이리 곤경에 빠뜨린 장본인이 그라는 걸 한눈에 알아챘다.
“네놈이냐? 우리 애들 괴롭힌 게?”
화려한 등장과는 달리 말투는 참으로 동네 양아치처럼 가볍다. 하지만 그 가벼운 말투 속에 담겨져 있는 중압감은 엄청났다.
서황은 절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서황을 그 정도로 긴장시켰던 이들은 단 한명도 없었다.
“정말 상지곡 매복을 뚫고 온 것이냐?”
“아! 그거? 별 거 없더군... 흐흐. 이 몸을 곤란하게 만들 작정이었으면 좀 더 화끈한 걸 준비했어야지.”
상지곡 매복을 아무렇지 않게 돌파했다는 말에 서황은 기가 막힌 심정이었다.
‘말이 되지 않는다. 그 매복이 어떤 매복인데.... 저놈은 허언을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의민이 단순히 허언을 한다고 생각해도, 실제로는 굉장히 어렵게 돌파했다고 하더라도 말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일단 그 함정을 돌파한 것 자체가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니까.
서황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의민에 대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반드시 이놈을 여기서 쓰러뜨려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 백파적의 필패다.’
대부를 쥔 손에 힘을 주는 서황. 이의민도 서황이 든 대부에 관심을 보였다. 아무래도 자신과 같은 무기를 쓰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호오! 도끼를 쓰다니... 사내다운 멋을 제법 아는 놈이구나. 기념으로 선공을 양보하마. 먼저 들어오너라.”
서황은 이의민의 양보가 없어도 먼저 공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고 있다.
상지곡 매복을 뚫었다는 얘기도 놀라웠지만, 막상 일기토를 하려고보니 온 몸에서 전율이 일어나는 서황. 그냥 앞에 선 것만으로도 이의민의 기세가 느껴진 탓이다. 거대하고도 강력한 기운이 서황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내, 내가 떨고 있는 것인가....?’
서황은 떨리는 팔을 진정시키는데 시간을 보내야했다. 기다리던 이의민은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한번 하고는 자신의 대부를 곧추세웠다.
“하암! 기껏 양보했더니.... 그래. 네놈이 먼저 오기 싫다면 내가 먼저 들어가 주마.”
이의민의 신형이 순식간에 하늘 높이 떠올랐다. 일전에 서황이 보였던 날다람쥐 같은 움직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한 표범과도 같은 움직임이다. 평범한 군사들은 그런 이의민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가지도 못했다.
이의민은 마치 허공답보라도 하듯 일정시간을 체공하고 있다가 서황을 향해 대부를 내리찍으며 떨어졌다. 선제공격치고 동작이 매우 컸다. 마치 막아볼 테면 막아보라는 듯했다.
서황은 자신을 향해 내리찍어오는 이의민의 대부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막아야 하나? 아니면 피해야 하나?’
서황은 피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대놓고 막아볼 테면 막아보라는 식의 공격에 자존심이 상하는 걸 느꼈다. 이미 마주 할 때부터 자존심이 뚝뚝 떨어졌었지만 남은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은 서황. 그 자리에서 막는 걸 선택했다.
‘오냐! 막아주마!’
콰쾅!
“크으윽!!”
자신의 체중을 실어 내려찍은 대부와 혼신의 힘을 다해 그것을 막으려는 대부. 두 자루의 대부가 서로 얽혀졌다. 서황의 대부가 이의민의 대부를 막은 셈이다.
하지만 막아도 막은 게 아니었다. 간신히 대부를 막긴 했지만 서황의 자세는 완전히 흐트러졌다. 게다가 왼팔 근육 쪽에 손상이 있는 것인지 대부를 쥔 손이 어색했다. 다음 동작이 아예 불가능한 상황. 서황은 남은 자존심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셈이다.
서황을 구석으로 몬 이의민은 오히려 살짝 놀랐다. 서황이 자신의 일격을 이렇게라도 막아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의민의 이 공격을 막아낸 자는 고려시대 때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크하하! 좋다. 역시 제법 한가닥 하는 구나.”
이의민은 만족한다는 듯 호탕하게 웃고는 다시 대부를 높이 들었다. 큰 원을 그리며 다시 서황에게 휘둘러지는 대부. 서황은 이번에는 도저히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 꼴사납게 땅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며 공격을 피했다.
서황은 그렇게 구르는 와중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저 공격을 피한다면 일발역전이 가능하다!’
대부는 크기가 큰 만큼 파괴력이 그 어떤 무기보다 높다. 반대로 말하면 무게 또한 무겁기 때문에 빠르게 휘두르기가 힘들다. 한번 큰 공격을 한 후 빈틈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다.
첫 공격은 억지로 막은 충격 때문에 반격은 엄두도 못 냈다. 하지만 지금 두 번째 공격은 막지 않고 아예 피해버렸으니 반격할 틈이 생긴 서황이다.
‘이제 내 차례다!’
대부를 크게 휘두르고 빈틈이 생긴 이의민을 향해 서황은 자신의 대부를 찔러 넣으려했다. 하지만 서황의 대부는 갈 길을 잃고 땅에 떨어졌다.
퍼어억!
“커어억!!”
이의민은 대부를 회수하는 대신 그냥 주먹으로 서황을 가격했다. 전쟁은 반드시 무기로만 싸운다는 이 시대 무장들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린 공격이다.
“크으윽! 어, 어찌 이런 공격을....?”
이의민의 주먹에 턱을 가격당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서황. 휘청휘청 하더니 결국 바닥에 대(大)자로 쓰러졌다.
쓰러지며 정신을 잃어가는 서황의 귓가에 나지막한 이의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쯧쯧. 제법 재주는 있으나 경험이 부족하구나. 도끼를 들었다고 해서 어찌 무기가 도끼만 있겠느냐?”
서황이 완전히 쓰러지고 전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백파적이 자랑하는 무적의 용사, 서황이 쓰러졌다. 그것도 단 3합 만에 말이다.
침묵을 지키는 건 토벌군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놀라움과 허탈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서황 하나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애를 먹었던가. 그런데 이의민은 너무나 쉽게 처리를 해버렸다.
이제 이의민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게 됐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황보숭 앞에 갈 수 있었다.
“무탈하시니 다행입니다. 좌장군. 소장이 좌장군의 명을 받들어 상지곡 길을 돌파하여 왔습니다.”
“아아... 자네 정말....”
황보숭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나름 수많은 전장을 돌면서 온갖 경험을 다 겪어봤다. 하지만 이의민 같은 장수는 처음이었다.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이 날 뻔....”
그때 그 둘 뒤로 악에 받친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파적 총채주 곽태였다. 그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현실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했다.
“네, 네놈은 대체 누구냐? 정말 사람이 맞느냐?!”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어디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함부로 끼어들고 지랄이냐? 뒤지고 싶으면 얌전히 순서를 기다려라. 네놈이 도적놈들 두목인 듯한데, 아니 그래도 네놈 목부터 딸 생각이었다.”
이의민의 대답을 들은 곽태는 정신이 없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했다.
사람이 아닌 신선이 아닌가 하고 있는데, 막상 말투를 들어보면 천박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나이도 한참 어려보이는 이의민이 어른들 운운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그래도 곽태는 더 이상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의민이 단번에 서황을 무력화 시킨 것도 그렇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절로 사람을 공손해지게 만들고 있다.
“아, 아니. 그러니까 누구신지...? 정말 사람이 맞으신 건지....?”
“이 분은 이의민 후장군이시다. 도적놈아.”
곽봉이 튀어나와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저, 정녕 토벌군이신 겁니까?”
“그렇다니까! 대체 몇 번을 말하게 만드는 거냐? 짜증나게 스리....”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곽태였다. 이의민의 말도 안 되는 등장과 신력에 혹시 그가 산신이 아닐까 기대도 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산신이 아니었다. 길거리 시정잡배만도 못한 언행을 하는 신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의민은 이제 슬슬 끝내야겠다고 여기고 황보숭에게 물었다.
“좌장군. 소장이 이 놈들을 다 쓸어버려도 괜찮겠습니까?”
방금 전 언행과는 달리 황보숭에게는 절도 있고 예의바른 태도로 물었다. 황보숭은 방금 전 상황이 떠올랐다. 자신의 명을 기다리지도 않고 멋대로 군사를 이끈 원소의 안하무인적인 태도와 너무나 비교가 됐다.
감격에 겨운 황보숭은 큰 목소리로 이의민에게 명을 내렸다.
“큰일을 마치고 온 자네에게 바로 전투를 시키는 것이 미안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네. 좌장군이자 토벌군 총지휘관으로서 후장군에게 명을 내리겠다! 이곳에 있는 백파적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