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백파적이 믿는 것 (2)
간신히 퇴각에 성공한 토벌군 본대. 그들은 모두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 원소의 심기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의민을 찾는 이들까지 속속 늘어났기 때문이다.
“후장군을 그리 보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장군만 있었다면 저 서황이란 놈에게 이 정도로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맞습니다. 그 서황이란 놈이 아까 전 전투에서 날고 기는 것처럼 보여도 확실히 후장군에 비할 바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원소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속으로 이의민을 찾는 자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이런 머저리 같은 놈들! 이의민 그놈은 이미 뒤졌다고!’
하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원소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이의민을 찾는 것인지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의민이 실제로 전투를 치르는 걸 제대로 본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이의민, 그 놈이 대체 뭐기에 이리 찬양을 한단 말인가? 십상시를 단 둘이서 도륙했다? 고작해야 환관 나부랭이 놈들을 도륙한 것이 뭐가 대단한가? 혼자서 삼천기의 백파적들을 격파했다? 헛소리다. 초반에 조금 활약한 걸로 사람들이 떠들다가 소문이 과장된 게 틀림없다.’
그래서 원소는 설사 상지곡 길에 백파적의 함정이 없더라도 세 얼간이가 충분히 이의민을 처리할 수 있다고 여겼다.
원소는 이의민을 찾는 여론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박했다.
“전부 착각하시고 계신 거요. 설사 이 자리에 후장군이 있었다고 해도 그 혼자 힘으로 어찌 이전 전투 같은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는 거요? 그런 일을 해내려면 적어도 내 상장인 안량이나 문추 정도는 돼야 가능할 것이오. 아쉽구나. 둘 중 하나만 있었어도 서황 따윈 아무 것도 아니었을 텐데....”
그런데 원소의 이 발언은 다른 제후들의 심기를 오히려 자극하는 발언이었다. 가장 아끼는 무장인 기령이 다쳐서 심기가 좋지 않은 원술이 화를 냈다.
“염병! 그 놈의 안량, 문추. 아니?! 그럴 거면 데리고 오던가? 둘이나 되면서 왜 한명도 안 데리고 온 거야? 아껴뒀다가 뭐하려고? 어차피 뒤지면 끝인데?”
원술의 일침에 다른 제후들도 동감한다는 듯 통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당황한 원소는 말을 더듬으며 호통을 쳤다.
“뭐, 뭣이? 공로. 형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형은 무슨! 종년의 자식 주제에....”
“이놈이 그래도!!”
사촌지간이라고는 하지만 안 그래도 서로 간에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던 원소와 원술이다. 심각한 감정싸움으로 번지려하니 보다 못한 황보숭이 나섰다. 이 자리에서 둘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둘 다 대체 뭐하는 건가?! 그만하게! 자네 둘은 현재 토벌군 내에서 기둥 같은 존재들이네. 그런 기둥 둘이서 본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이리 추태를 보여서야 되겠는가?”
황보숭이 말리자 그제야 똥 씹은 표정으로 다툼을 멈추는 원소와 원술. 둘을 억지로라도 뜯어말린 황보숭은 이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짚었다.
“아무튼 저 서황이라는 자가 문제로군. 서황이 계속 저 길목을 지키고 있는 한 전진하기가 어렵겠어. 후장군이 적 후방을 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이제는 황보숭의 입에서까지 이의민이 나왔고, 원소의 표정은 더 일그러졌다. 하지만 대놓고 티를 낼 수는 없으니 그저 속으로만 삭일뿐이다.
황보숭과 여러 제후들이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조조가 앞으로 나섰다.
“장군. 후장군이 백파적의 후방을 친다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원래 우리군의 계획은 적의 본채까지 도달한 후 후장군의 별동대가 그 본채의 후방을 치고 우리 본대가 정면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않습니까? 허나 지금 우리 본대는 백파적 본채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이곳에서 발이 묶였습니다. 본대의 지원 없이 후장군만 백파적 본채의 후방을 친다면 각개격파 당할 우려도 있습니다.”
“허어! 그럼 대체 어찌해야 되겠는가? 저 서황 때문에 우리는 단 한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지 않은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군께서도 보셨지 않습니까? 소장의 종제가 능히 서황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조조의 말에 황보숭은 물론 다른 제후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확실히 이전 전투를 복기해보니 조인이라면 충분히 서황을 감당할 수 있을 터였다. 비록 조조의 명 때문에 먼저 물러서긴 했지만, 그전까지는 서황과 대등히 싸웠으니 말이다.
“그렇군! 조인이 있었구먼.... 그럼 다들 다시 진격할 준비를 하게. 조인이 서황을 맡아주기만 한다면 어렵지 않게 전진할 수 있을 것이야.”
“옛! 좌장군!”
다른 제후들이 기뻐하고 있는데 원소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처음 나온 이의민에 대한 얘기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토벌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자신의 이름보다 조조의 이름이 더 많이 나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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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토벌군 본대는 다시 계곡 쪽으로 돌아왔다. 이전 전투에서는 기습적인 수공에 당했지만, 이제는 다들 어느 정도 지형을 파악했다. 그리고 이전 전투에서 토벌군 사이에서 무쌍을 펼쳤던 서황에 대한 대비도 되어 있다.
자신감 있게 전진하는 토벌군 본대.
역시 서황이 백파적에서 선두로 나왔다.
“역시 네놈이 날 상대하기 위해서 나왔군. 이번에는 쉽게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서황의 상대는 역시 조인이다.
“웃기지 마라. 주군의 퇴각 명령만 아니었다면 쓰러지는 건 네놈이었을 거다. 오늘이야말로 네놈의 제삿날이다.”
다시 서황과 조인의 일기토가 펼쳐졌다. 서황의 거대한 대부와 조인의 장창이 맞부딪힌다. 둘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서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팽팽한 대결을 이어갔다.
대략 칠팔 십여 합이 지났을까. 의외로 서황이 서서히 밀리고 있었다. 팽팽하던 기세는 단숨에 조인 쪽으로 넘어갔다.
서황은 방어하기에 급급한 모습이었고, 조인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역시 조인 장군이시다!”
그 모습에 사기가 크게 오른 토벌군 군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다른 제후들은 황보숭에게 본대를 진격시켜야 한다고 외쳤다.
“좌장군! 지금이 기회입니다! 어서 군사들을 진격시키시지요.”
“맞습니다. 좌장군.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습니다.”
거의 모든 제후들이 진격을 외치고 있을 때, 조조만은 뭔가 모를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상하다. 백파적들은 서황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 보통의 경우라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서황이 밀리는 걸 보면서 크게 당황해야 정상이다. 그런데 저 백파적들은 별로 당황한 표정들이 아니다.’
주변을 찬찬히 뜯어보니 이상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정말 저들이 준비한 병력이 저것뿐이란 말인가? 정말 저 병력으로 우리 본대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을 터인데....’
조조가 그렇게 고민을 하던 사이 황보숭의 명이 내려졌다.
“전군! 진격하라!”
이에 조조는 눈을 크게 뜨고 황보숭을 말렸다.
“좌장군! 진격 명령을 물리시지요. 뭔가 이상합니다. 서황이 갑자기 밀린다는 것이 이상하고, 주변 상황 역시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아무래도 적들이 함정을 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잠깐 멈춰라!”
조조의 조언에 황보숭이 당황하면서도 군사들의 진격을 멈추려 했다. 그때 뒤에서 원소의 호통 소리가 들렸다.
“맹덕! 무슨 소리인가! 기껏 잡은 승기를 물거품으로 만들 셈인가?!”
원소는 또 황보숭에게 강력하게 의견을 밝히는 조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토벌에서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원소 자신이어야 했다. 그런데 점점 조조가 많은 얘기를 하고 그의 이름이 황보숭과 다른 제후들의 머릿속에 각인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최고 공신으로 내가 아닌 맹덕이 꼽힐 수도 있다. 겨우 이의민 그놈을 제거해서 변수를 없앴다고 생각했는데, 맹덕 저놈이 내 자리를 차지하려 들다니....’
그래서 앞으로 최대한 조조의 의견을 묵살시키고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려는 원소다.
“맹덕! 말해보게! 이 곳은 함정을 팔만한 지형이 아닐세. 대체 무슨 함정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계곡 주변에 수풀이 조금 우거지긴 했지만 원소의 말대로 지형 자체가 함정을 파기에 적당한 지형이 아니었다. 공적에 혈안이 된 다른 제후들 역시 원소의 말에 하나둘 동조했다.
“흠! 사예교위의 말이 맞는 것 같소. 여기서 딱히 무슨 함정을....”
“이럴 시간이 없소. 이런 기회를 놓칠 셈이오?”
조조는 원소와 나머지 제후들을 설득하기 위해 차분히 설명하려 한다.
“지금 여기저기 우거진 수풀이 안 보이시오? 작정을 했다면 저 수풀 뒤로 얼마든지 병력을 숨길 수가....”
하지만 조조의 설득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원소가 다시 한번 조조에게 호통을 치며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그만! 맹덕! 내 자네를 그리 보지 않았거늘. 이제 보니 순 겁쟁이로구나. 뭣들 하는가?! 좌장군의 명이 떨어졌다! 돌격 하라!”
토벌군의 실질적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원소의 명이 떨어지자 너도나도 백파적들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조조의 말을 듣고 진격 명령을 물리려했던 황보숭은 한숨을 쉬며 물러섰다.
“후우...! 이제는 어쩔 수 없구먼....”
상황이 이리 됐으니 이제 물릴 수도 없게 됐다.
제후들과 그 군사들이 신나게 돌격해 나갔다. 특히 아우인 장초를 잃은 장막은 원수를 갚겠다며 가장 선두로 나섰다.
“크아악!”
선두의 장막이 낙마했다. 그의 어깨에 화살이 꼽혀 있었다. 그런데 화살이 날아와서 박힌 각도를 보니 정면에 있던 백파적들이 날린 게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조의 우려대로 수풀 속에서 백파적들이 튀어나왔다. 장막에게 박힌 화살은 바로 그들이 날린 것이었다.
곳곳에 우거진 수풀들 사이로 어마어마한 병력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그 수는 얼핏 보기에 절대 토벌군 본대에 비해 적어보이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조인에게 크게 밀리던 서황의 기세가 변했다. 수세에 빠진 줄 알았던 서황이 다시 무시무시한 기세로 조인을 밀어붙였다.
평소라면 침착하게 대응했을 조인도 주변의 상황 때문에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젠장! 조인! 본대로 복귀해라!”
결국 조인을 불러들인 조조. 그리고 전장에 남겨진 서황의 무쌍이 다시 시작됐다.
조인도 없으니 서황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가 대부를 휘두르는 족족 토벌군 군사들은 쓰러졌고, 기습을 가한 백파적들은 큰 함성을 지르며 서황의 기세에 힘을 보탰다.
이쯤 되면 퇴각 명령을 내려야 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원소는 그럴 수 없었다. 그리 되면 설사 차후 토벌에 성공하더라도 이 상황까지 예견한 조조가 최고 공신이 될 수밖에 없다.
“젠장! 어떻게든 전진하라! 공로! 어찌 해보아라! 기령을 내어 저 서황을 막아보란 말이다!”
“기령은 다리에 부상을 당한 상태인데 어찌 저놈과 또 싸우라 하시오? 그놈의 안량, 문추나 데려와서 싸우게 하던가!”
억지로 군사들을 전진시키려하는 원소.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어느새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백파적들은 토벌군 본대를 빙 둘러쌌다. 완벽히 포위를 했다는 뜻이다. 이제는 퇴각하고 싶어도 할 수없는 상황까지 왔다.
백파적이 거의 승기를 잡은 상황. 총채주 곽태 역시 적잖이 유리하다고 여겼는지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크하하! 네놈이 그 유명한 황보숭이냐? 이 몸이 바로 백파적의 총채주 곽태이니라. 감히 우리 백파적을 토벌하겠다고? 네놈들에게 산신님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겠다. 모든 형제들이여! 저 토벌군 나부랭이들을 다 쓸어버려라!”
“와아아아아!!”
꼼짝없이 전멸할 위기에 놓인 토벌군 본대.
조조는 원소를 원망스러운 듯 쳐다보며 책망했다.
“아아... 결국 머저리 하나가 일을 다 망치는구나. 명석하면 뭐하는가? 욕심에 눈이 멀면 모든 것이 허사인데....”
그때였다. 백파적들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뭐가 이리 시끄러워? 얼씨구! 좌장군. 어째 좀 위험해보입니다?”
난데없이 들려 온 목소리에 모든 이의 시선이 그리 향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많은 이들이 찾았던 목소리였다.
“후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