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백파적이 믿는 것 (1)
백파적의 본채로 향하는 토벌군 본대. 그곳에서 명목상 총 지휘관은 좌장군인 황보숭이었지만 실질적인 총 지휘관은 원소였다.
주양봉 길로 군사들을 이끌어 나가는 원소의 표정이 묘했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애써 억지로 참는 듯한 모습이었다. 조조가 원소의 그런 기색을 눈치 채고 물었다.
“본초형.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보오?”
“음? 아! 이제 곧 병주 백성들을 구할 수 있다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구먼....”
지금 원소의 기분이 좋은 건 정말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단순히 건방진 놈에서 이제는 정적이 되어버린 이의민이 제거될 거 란걸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원소는 상지곡 길에 백파적의 매복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당연히 잡았던 백파적 포로들을 통한 정보다.
원소는 백파적들이 정확히 어떤 함정을 파 놓았는지 구체적으로 알았지만 그 사실을 일부러 알리지 않았었다.
‘흐흐흐. 그 정도 낙석 함정이라면 이의민 그놈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늘이 이 본초를 돕는구나.’
물론 백파적 포로들이 거짓말을 했거나, 계획을 바꿨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험도 들어 놨다. 황보숭이 의심을 해준 덕에 이의민의 뒤통수를 칠 세 얼간이들까지 같이 딸려 보낼 수 있었다.
만약 백파적이 파놓은 함정이 진짜라면 세 얼간이들 역시 다 죽겠지만, 원소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죽어주는 게 원소에게 더 이득이다. 괜히 나중에 살아서 공을 나눠달라느니 하면 골치가 아파지기 때문이다.
설사 이의민이 어찌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이끄는 황군 없이 혼자 살아남아봐야 남은 토벌전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게 원소의 생각이다.
‘물론 내가 매복을 알려주지 않은 것 때문에 따지고 들면 살짝 골치 아픈 일이지만, 나도 몰랐다고 발뺌을 하면 제까짓 게 뭘 어쩔 텐가?’
모든 계획이 완벽하다고 여기며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는 원소. 이제 남은 백파적들을 쓸어버리고 최고공신에 오르는 일만 남았다. 그 최고공신 자리 역시 자신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원소.
‘흐흐. 일단 청주 병력을 동원하여 한복부터 정리를 해야겠군.’
원소가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조조가 굳은 얼굴로 외쳤다.
“전군 정지!”
원소는 자신의 즐거운 상상이 방해받은 것 같아 살짝 기분 나쁜 표정으로 조조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맹덕.”
조조는 땅을 발로 차며 대답했다.
“본초형. 뭔가 이상하지 않소? 이쪽 길만 땅이 이리 젖어 있소. 아무래도 물이 흘렀던 것 같은데....?”
조조의 대답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원소.
“겨우 그런 거 가지고 뭐가 이상하다고... 비라도 왔겠....?”
원소도 생각해보니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적어도 그들이 태행산에 온 이후 비가 내린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황보숭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전군! 물러나라. 땅이 젖지 않은 지역까지 서둘러 퇴각....!”
하지만 이미 늦은 조치였다.
콰아아아!
산 위에서부터 우렁찬 소리가 들리며 세찬 물줄기 하나가 토벌군 군사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장강과 같은 거대한 물줄기와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토벌군 군사들을 당황시키기에는 충분히 거대한 물줄기였다.
“으아아! 도망쳐!”
“물에 쓸려간다!”
대열을 갖춘 채 퇴각하는 게 아니다. 저마다 서로 먼저 가겠다고 난리다. 서로를 넘어뜨리고 쓰러진 군사들은 다른 군사들에게 밟혔다.
“이런 침착하라! 대열을 갖춰라!”
황보숭은 군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소리를 쳤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와아아아!”
“황실의 개들을 쓸어버리자!”
수풀 곳곳에서 백파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이 수공은 백파적들의 작품이다. 그들이 있던 곳은 계곡물이 흐르던 길이었다. 백파적은 그 길에 보를 쌓아 물을 막고 토벌군이 오자 보를 터트린 것이었다. 이 태행산의 지리와 지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만이 만들 수 있는 함정이다.
원소는 상지곡 길 쪽 함정은 알아냈지만 이 주양봉 길 함정은 알아내지 못했고, 결국 함정에 완벽히 당한 셈이다.
쓸려 내려가고 있는 계곡물 위로 화살이 빗발쳤다. 거의 대부분 백파적이 쏜 화살이었다. 세찬 계곡물 위에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토벌군 군사들은 고스란히 활 공격에 적중될 수밖에 없었다.
“크아악!!”
수백의 군사들이 쓰러지고 흘러 내려가는 계곡물은 군사들의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래도 토벌군도 넋 놓고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조조는 종제 조인에게 외쳤다. 그나마 조인이라면 이 어려운 상황을 해쳐나갈 수 있을 거라 믿고.
“조인! 활을 막아라! 군사들에게 방패를 들게 하라!”
“옛! 형님! 군사들은 들어라! 한 팔로는 방패를 들고, 다른 한 팔로는 동료들을 잡는다! 서로 의지하며 넘어지지 않게 하면서 이동하라!”
조인은 조조의 명을 충실히 이행해내며 군사들을 착실히 계곡 바깥으로 빼냈다.
원술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쓰러진 채 우왕좌왕하는 병사 하나를 발로 차며 소리쳤다.
“살고 싶다면 일어나서 방패를 들어라. 기령! 뭐하느냐?”
난폭해보이지만 원술은 자기만의 방식대로 군사들을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원술의 명을 받은 기령은 조인 옆에서 백파적들의 화살 공격을 쳐내기 시작했다.
조인과 기령의 활약 속에 토벌군의 피해는 더 이상 늘지 않았고, 모두 빠르게 계곡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백파적들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것치고는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할 상황. 그때 누군가 몸을 크게 띄워 토벌군이 있는 쪽으로 붕 날아 왔다.
마치 이의민을 연상시키듯, 대부 하나를 손에 들고 있는데도 날래기가 다람쥐 같았다. 그가 토벌군 사이에 들어오자마자 멈췄던 토벌군 군사들의 피해가 다시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가 대부를 크게 휘두를 때마다 토벌군 군사 서넛이 쓰러졌다. 아니. 날아갔다. 크게 휘두르는 그의 대부를 막아내는 자는 아무도 없다.
곧이어 백파적들도 토벌군에게 돌격해 들어가면서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크하하하! 봤냐?! 이 새끼들아! 이게 바로 우리 서 장사의 힘이다!”
“황실의 졸개들아 너희들은 이제 다 뒤진 거야.”
대부를 들고 토벌군 사이에 들어온 자는 역시 서황이다.
서황의 활약에 토벌군의 피해가 계속 누적되었고, 신이 난 백파적들은 더 기세등등해졌다. 이대로 맞붙는다면 정규군과 도적의 수적 차이는 의미가 없을 터였다. 결국 전쟁에서 더 중요한 것은 기세니까.
보다 못한 기령이 나섰다. 대부를 들고 무쌍 난무를 펼치는 서황의 앞을 막았다.
기령이 앞을 막았지만 코웃음을 치는 서황.
“호오! 아까 보니 제법 한 가닥 하는 솜씨는 있더구나. 허나 내 상대는 되지 못한다.”
서황과 기령의 일기토가 이어졌다. 처음에는 대등해보였지만 금세 수세에 몰리는 기령. 서황의 날카로운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기령이 실력이 모자란 장수는 아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차후 위나라 오자양장의 위치까지 올라갔던 서황에 비해서는 살짝 모자란 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거기다 익숙한 산위에서 싸우는 서황과는 달리 기령은 이 곳의 지형이 아무래도 생소했다.
여러모로 서황에 비해 불리한 기령이었다.
서황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기령을 보며 원술은 자신도 모르게 울분이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씨발!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전부 왜 도끼질이야? 요새 도끼가 유행이냐?”
원술이 마음속의 누군가를 떠올리며 몇 마디 더하려 하는데 그럴 수가 없게 됐다. 기령이 쓰러졌기 때문이다.
“크억!”
대부가 큰 호선을 그리더니 기령의 다리를 베었다. 다행히 기령도 급히 다리를 빼면서 잘리지는 않았지만 피가 솟구치는 것이 당장 서 있기는 무리였다.
원술은 급히 옆에 있던 장훈에게 외쳤다.
“아, 아니 된다! 장훈! 어서 기령을 구하라!”
“옛! 주군!”
쓰러진 기령 위로 서황의 대부가 떨어지려는 찰나 아슬아슬하게 장훈이 도착했다.
“이놈! 이제 내가 상대해주마!”
다시 이어지는 서황과 장훈의 대결. 서황은 기령과의 일기토로 체력을 많이 소모했을 법도 하지만 전혀 지친 구석이 없었다. 오히려 기령을 상대했을 때보다 더 빨리 장훈을 궁지에 몰았다.
그래도 다들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장막의 동생 장초가 장훈을 돕기 위해 나섰다.
이에 서황은 귀찮다는 듯 장초에게 대부를 한번 휘둘렀다.
“이놈들! 참으로 사람 귀찮게 만드는군! 차라리 한꺼번에 덤벼라!”
단 한번 휘둘렀을 뿐인데 장초가 쓰러졌다. 서황이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신력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순식간에 동생을 잃은 장막은 울분을 토하며 서황에게 달려나가려했다.
“이...! 이노옴! 감히 내 아우를....! 내 너를 반드시 죽여....!”
“참으시오! 장막형!”
조조는 장막을 뜯어말렸다. 지금 장막이 가봤자 장초처럼 단 일합에 쓰러질 건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다.
“흥분해서 좋을 것 없소. 좌장군! 일단 군을 물려야 합니다. 지금 지형은 너무 불리합니다.”
황보숭도 조조의 의견에 동의하며 군사들을 물리려했지만, 서황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여기가 네놈들 마음대로 들어왔다 나갈 수 있는 곳인지 아느냐?”
서황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퇴각하려는 토벌군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하지만 서황은 옆구리 쪽에서 강렬한 기세가 자신을 노리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 전투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서황조차 온 힘을 다해 막아야 할 정도의 엄청난 기세였다.
콰쾅!
간신히 공격을 막은 서황 앞에 기습공격의 주인공이 드러났다.
“이놈! 나는 조인이라고 한다. 이제 나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조인이라면 서황이라도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상대다. 서황도 조인이 지금껏 상대했던 그 어떤 적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진지하게 자세를 잡았다.
“그래. 네놈. 확실히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지. 기령이란 놈 말고, 네놈부터 쳤어야 했군.”
“흥! 착각하지마라! 쓰러지는 건 네놈이다.”
서황과 조인이 어우러진다. 둘은 순식간에 수십 합을 주고받았다. 둘 중 어느 하나 우세를 점치기 힘들었다.
뒤이어 서황의 뒤를 따라온 백파적들과 토벌군의 전투도 벌어졌다. 팽팽한 서황과 조인의 일기토와는 달리 백파적과 토벌군의 전투는 명백히 백파적의 우세였다.
아무래도 토벌군 대부분이 이 질척거리는 산 위에서 싸우는 게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조조도 더 이상 전투를 이어나가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여기고 조인에게 외쳤다.
“그만! 조인! 이제 퇴각을 해야 한다.”
막상막하의 승부를 이어가던 조인은 장창을 크게 휘둘러 서황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퇴각했다. 조인도 서황과의 승부를 마무리 짓고 싶었지만, 일단 군사들을 수습하는 게 우선이었다.
“이겼다고 착각하지 마라! 다음에 제대로 붙어보자!”
서황도 끝까지 쫒아갈 생각을 해보았지만, 연이어 여러 장수들과 싸운 터라 체력도 제법 떨어져 있었다. 이 전투에서는 백파적이 승기를 잡았지만, 만약 자신이 무너지는 순간 나머지 백파적들도 순식간에 밀릴 수 있다는 걸 잘 아는 서황이었다. 결국 그렇게 백파적 본대와 토벌군 본대의 전투가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