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세 얼간이 (2)
땅이 흔들린다. 사방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거대한 바윗덩이들은 끊임없이 내려오고 있고, 군사들은 살려 달라 울부짖고 있었다.
군사들의 비명소리는 전장에서 흔하디흔한 소리다. 하지만 그 소리가 창칼이 부딪히는 소리, 군사들의 기합소리와 어우러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섬뜩하게도 다른 소리는 안 들리고 오직 군사들이 공포로 내지르는 비명소리만 들리고 있다.
그런 연유 때문일까? 포신은 이 모든 것들이 현실이 아닌 꿈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멍한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윗덩이가 바로 옆으로 지나가서 그의 군사들을 깔아뭉갰지만 놀라지도 않는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저기 굴러오는 저 바윗덩이들이 진짜가 맞는가...?’
포신은 낙석이 시작될 때부터 정신줄을 놨다. 군사들을 수습할 생각은커녕 본인 몸 하나 가눌 생각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군사들이 바윗덩이에 쓸려 내려가는 걸 보고만 있던 포신. 누군가 자신을 크게 부르는 소리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주군! 위험합니다! 주군! 주군!!”
“으으음....? 우금...? 우금인가?”
포신이 아끼는 수하 장수 우금의 부름이었다.
포신은 겨우 정신이 드는 것 같았지만, 바로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에게 굴러오는 거대한 바윗덩이 하나를 보고 눈이 커질 뿐이었다.
“허어억!!”
포신은 그 바위를 보며 주저앉아버렸다. 이대로라면 그대로 바윗덩이에 깔려 다져진 육편이 되는 상황. 다행이도 우금이 재빨리 몸을 날려 포신을 빼낸 덕분에 바윗덩이는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우르르릉!
우금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구한 포신이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우금... 고, 고맙네.... 덕분에 살았어.”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낙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쪽으로 가시면 퇴각할 수 있습니다. 소장이 방금 봤는데, 저쪽 황군들은 퇴각에 성공한 듯합니다.”
퇴각에 성공했다는 우금의 말에 포신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도무지 살아날 구멍이 없어 보이는 이곳에서 한줄기 희망을 찾은 셈이다.
“그런가? 어서 가지. 아! 군사들은....”
하지만 주변에 피떡이 된 자신의 군사들을 보며 포신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본인은 살았지만 그의 군사들은 수도 없이 죽었다. 그리고 남은 이들 역시 살려낼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도 우금의 말을 듣고 한줄기 희망을 본 포신은 남은 이들이라도 수습하여 퇴각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전군! 어서 저쪽으로 퇴각....”
하지만 그런 포신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거대한 바윗덩이가 연이어 굴러내려 왔다. 방금 전과 같이 하나만 굴러오는 게 아니었다. 세 개의 바윗덩이가 나란히 굴러오는 것이 도무지 피할 곳이 없어보였다.
“이런....!”
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 와중에 우금은 어떻게든 주군인 포신을 보호하기 위해 몸으로 바위를 막으려는 시늉을 했다. 피할 수 없으니 그렇게라도 막아보려 하는 우금이다.
하지만 그런 우금의 노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건 우금 본인도, 포신도 잘 알고 있었다. 내려오는 바위를 어찌 사람의 몸으로 막을 수 있겠나.
포신은 그런 우금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제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한 자신의 죽음 따윈 두렵지 않다. 다만, 우금을 비롯해 자신만 믿고 따르던 많은 부하들, 그들이 모두 자신 때문에 죽게 생겼으니 몹시 안타까울 뿐이다.
수하들에 대한 슬픔과 동시에 원소에게 완벽히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아아....! 내가 어리석었구나. 원본초 그놈은 나를 그저 후장군을 잡기 위한 미끼로 쓸 생각이었다. 내가 눈이 삐어도 단단히 삐었구나. 원본초. 그 자의 무얼 보고 그를 따른다 맹세했던가. 아니다. 모든 것이 내 욕심에서 비롯된 것인데 누굴 원망한단 말인가.’
상지곡 길로 오기 전, 원소가 포신과 왕광, 교모에게 했던 말은 이랬었다.
“기회를 봐서 이의민, 그 자를 죽이시오. 그 역할을 맡기기 위해 세 분을 후장군 쪽에 보낸 것이오.”
“후장군을 말입니까? 허나 그가 없으면 백파적들은....?”
“그건 걱정 마시오. 어차피 그쪽 길에는 백파적이 없을 것이오. 본인이 먼저 정찰을 해보았다고 했지 않소. 그리고 후장군을 죽인 후, 나중에 좌장군께는 후장군이 생각 없이 앞으로 나가다가 매복에 걸려 죽었다고 하면 되오.”
“허나 후장군도 황군 오천과 함께 있는데 어찌 쉽게 죽일 수 있겠습니까?”
“서로 적임을 알고 싸우면 어렵겠지. 허나 후장군과 황군은 그대들이 아군이라 믿고 있는데 뭐가 어렵단 말이오. 그대들이 이번 일을 성공 시킨다면 내 이름을 걸고 그대들을 일등공신이 되도록 만들어주겠소.”
처음에는 원소의 제안이 미심쩍은 왕광과 교모, 포신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원소가 내놓은 달콤한 보상에 눈이 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소의 도움 없이 일등공신이 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셋은 원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생각해보면 이상하긴 했지... 원소가 아니더라도 원술, 조조 등이 있는데 어찌 내가 일등공신이 된단 말인가. 게다가 정말 이의민을 직접 죽일 생각이었다면 원소가 직접 해도 되는 일 아닌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것을... 내가 욕심에 눈이 멀어도 제대로 멀었구나.’
포신의 생각대로 원소는 애시 당초 세 제후들을 일등공신으로 만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황보숭의 의심을 피할 미끼, 그리고 혹시 백파적의 낙석 함정이 발동되지 않을 경우를 가정한 보험일 뿐이었다. 지금 당장은 일등공신이 될 수 있다고 꼬드기고 나중에 가서 모르쇠하면 세력이 약한 그들이 뭘 어쩔 수 있을까.
이제 모든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후회의 눈물을 흩뿌리며 우금과 군사들에게 사죄를 하는 포신이다.
“크흐흑!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해....”
포신은 맹렬한 기세로 다가오는 바위를 보며 앞으로 나섰다. 부하들을 볼 면목이 없어 가장 먼저 죽으려는 것이었다.
“주, 주군! 무얼 하시는 겁니까? 아니 됩니다!”
“장군!”
놀라는 우금과 수하 군사들의 외침을 뒤로 하고 내려오는 바위를 향해 뛰어가는 포신. 그런 그의 귓가에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낙석소리와 군사들의 비명소리에 주변이 시끄러웠지만 이상하게도 그 외침만은 똑똑히 귀에 전달 됐다.
“비켜! 이 얼간이 새끼야!”
포신은 저도 모르게 그 말이 시키는 대로 비켰다. 그리고 기적을 목도할 수 있었다.
콰콰콰쾅!!
자신과 군사들을 짓뭉갤 거라 여겼던 거대한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과도 같은 모습, 아니.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야차와 같은 모습을 한 사내, 이의민이다.
하나의 바위를 파괴한 이의민은 곧장 나머지 두 바위를 향해서도 대부를 휘둘렀다. 그리고 나머지 두 바위도 첫 번째 바위처럼 산산조각이 난 건 아니지만, 적당히 부서지며 굴러가는 걸 멈췄다.
“젠장! 오지게도 굴리네. 뭔 놈의 바윗덩이들이.... 작정하고 만들었구먼.”
기적을 일으킨 이의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부에 묻어있는 흙먼지를 털어냈다.
“후, 후장군....?”
“얼간이 새끼가 빠져가지고 뭘 그리 멍 때리고 있느냐?! 네놈 군사들을 빨리 챙겨야 할 것 아니냐?”
이의민의 호통에도 포신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만큼 이의민이 보여준 광경은 현실을 까마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포신도 이의민의 능력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홀로 삼천의 도적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서 무쌍을 찍을 정도의 무력.
하지만 이의민의 진정한 능력은 그런 포신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 설마 사람이 굴러오는 바위를 도끼로 쪼갤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정말 듣도 보도 못한 경지였다. 얘기로 전해 들었다면 절대 믿지 못할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이것이 진정 현실인가....?”
이의민은 더 이상 포신에게 말을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역시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우금과 수하 군사들에게 말했다.
“어이! 너희들!”
“예? 아... 예... 후장군님.”
“새끼들이 대답 봐라! 백파적말고 내 손에 뒤지고 싶으냐?! 제군들!”
포신과는 달리 빨리 정신을 차리는 우금과 수하 군사들. 조금 전까지 낙석에 당한 걸 잊었다는 듯 일사분란 한 모습으로 발바닥을 구르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의민의 지시에 따라야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날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진다는 걸 말이다. 그들에게는 지금 이의민은 황제, 아니. 신이나 마찬가지다.
“예! 후장군님!”
“너희들은 지금 즉시 후퇴해서 황군과 합류한다! 몸이 성한 자들은 몸이 불편한 자들을 돌봐주고... 어이! 거기! 이름이 뭔가?”
이의민은 포신이 제 역할을 못하니 그나마 제일 장수다운 인물을 불렀다.
“속하 우금이라 하옵니다. 후장군.”
삼국지에서 위나라 오자양장으로 명성을 떨쳤던 우금. 하지만 역시 이의민은 그 이름을 모른다. 우금의 이름을 시큰둥하게 듣고는 그에게 명을 내렸다.
“그래. 우금. 네 주군이라는 자가 지금 저 모양 저 꼴이니, 네가 책임지고 네 얼간이 주군과 군사들을 후퇴시키도록.”
“충! 속하 우금. 후장군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어찌 보면 모욕적으로 들을 수도 있는 명인데도 우금은 포신을 대하듯 허리를 직각으로 구부리며 인사했다. 주군인 포신에게 인사할 때보다 더 공손한 태도다. 그만큼 우금은 이의민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이의민 덕분에 성공적으로 퇴각하고 있는 우금과 포신. 우금에게 들려서 나가던 포신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겪었던 모든 일이 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현실로 돌아온 포신은 다시 눈물이 나왔다. 이번에는 수하들에 대한 속죄의 눈물, 원소의 꼬임에 넘어간 것에 대한 후회의 눈물이 아니었다. 이의민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의 눈물이었다.
‘나를 포함한 제후연합이 얼마나 그를 무시했던가... 무시뿐 아니라 이번 작전에서 그를 제거할 생각까지 했었는데.... 그는 오히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포신은 이의민에 대한 고마움에 인사를 건네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그에게 했던 짓이 있으니 낯을 볼 면목도 없다.
우금과 수하 군사들과 함께 황군이 있는 곳까지 도착한 포신. 그런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포신과 마찬가지로 원소의 꼬임에 넘어갔던 나머지 두 얼간이, 왕광과 교모였다.
“오오! 포 장군. 그대도 후장군께 구원을 받았구려. 다행이오.”
“그대도 살았구려. 후장군 덕분에 우리가 다 살아날 수 있었소.”
포신은 그들과 재회한 후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한 남자의 등이 보였다. 아군을 퇴각시키기 위해 홀로 적 앞에 선 남자의 등이다.
그리고 말도 안 되지만, 포신은 그 등을 보는 순간 그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존재보다 듬직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