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세 얼간이 (1)
다음 날 토벌군은 원소의 의견대로 군을 둘로 나누었다. 황보숭이 이끄는 본대와 이의민이 이끄는 별동대로 말이다.
“그럼 상지곡 쪽은 후장군만 믿겠네.”
“염려 놓으십시오. 장군. 최대한 빨리 적 본채의 후방에 도착하여 적들을 교란하겠습니다.”
주양봉 쪽으로 가는 황보숭과 인사를 한 이의민은 지체 없이 행군을 재촉했다.
어제만 해도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팍팍 냈었던, 왕광과 교모, 포신도 별 말 없이 이의민을 따라왔다.
“저 새끼들 좀 수상한데...?”
그런 세 제후들을 보며 곽봉이 조금 이상하다는 듯 이의민에게 일렀다.
“뭐가 말이오?”
“저놈들 말이야. 어제까지는 우리랑 같이 가기 싫어 죽겠다는 듯 인상을 썼는데, 막상 오늘 보니 굉장히 편안해보인단 말이지. 어제 저놈들이 군사회의가 끝나고 원소의 막사로 들어가는 걸 내가 봤거든. 거기서 뭔가 작당 모의를 한 거 아닐까?”
“크크크. 작당모의를 하든 뭘 하든 상관없소. 우리는 토벌만 잘 하면 되는 것 아니오.”
곽봉의 걱정에도 무신경한 이의민이다.
상지곡 길로 계속해서 행군하는 이의민의 별동대.
험한 산길이라 모두 타고 갈 말이 없었다. 5채 백파적들을 격파한 위치까지 올라오기 전부터 토벌군은 이미 모든 말들을 버렸다.
전쟁에서 말이 가지는 이점은 어마어마하다. 보병에 비해 월등한 기동력과 높은 위치의 타점이 압도적인 장점이었다. 물론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손이 상대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니 화살과 같은 원거리 공격에 취약하고, 방향전환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단점은 있다. 하지만 장점의 파괴력이 워낙 압도적인 만큼 보병에 비해 상위 병종으로 취급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곳과 같은 산악 지형이라면 기병의 장점은 거의 사라지고 단점만 부각된다. 그러니 이런 산악지형에서는 말을 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일반 군사들은 대부분 말을 버려도 상위 장수들 몇몇은 이런 곳에서까지 말을 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번 토벌군에 속한 제후들은 대부분 자신이 끌고 온 말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토벌군의 총대장인 황보숭조차 진작 말을 버렸는데 뻔뻔하게 끝까지 말을 탈 장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군사들과 마찬가지로 직접 발로 행군하는 제후들. 그들은 말을 타고 이동하지 않은 적이 별로 없어서, 그리고 이런 험한 산길을 탄 경험이 적으니 당연히 지칠 수밖에 없다.
“헉! 헉! 젠장! 후장군! 아직 멀었습니까? 대체 얼마나 남았습니까?”
교모가 오만상을 쓰고 이의민에게 물어왔다. 거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다.
교모는 이의민이 제발 다 왔다고 대답해주길 바랐지만, 그 바람과는 정반대의 대답을 해주었다.
“쯧쯧! 아직 목적지까지 절반도 채 아니 왔소이다. 사내대장부가 이리 다리 힘을 못 쓰니 되겠소?”
“헉헉! 후장군은 대체 어찌 이런 험한 산길을 그리 잘 가는 것입니까? 힘들지 않습니까?”
“크크. 이 정도가지고 뭘 힘들다고 우는 소리를 내는지 원.... 그러게 평소에 말을 타지 말고 그냥 걸어 다니라니깐. 말은 한낱 도구일 뿐, 절대 발이 될 수 없소.”
“아무튼 여기서 좀 쉬어가면 아니 되겠습니까?”
“지금 출발한 지 얼마나 됐다고 쉬자는 말이오. 어서 빨리 가서 적 후방을 교란시키고 본대와 합류를 해야 할 것 아니오. 그대들도 조금이라도 공을 더 세우려면 어서 더 서두르시오.”
교모의 쉬자는 요청을 칼같이 자른 이의민. 세 제후들은 막막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별 수 없다는 식으로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세 제후들의 모습을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살피던 곽봉이 다시 이의민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단 말이지. 저놈들이 네 말을 이리 순순히 들을 놈들이 아닐 텐데....? 한바탕 뒤집어엎어도 진작 뒤집어엎을 놈들이잖아.”
곽봉이 계속 의심을 하는데도 이의민은 여전히 무신경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크흐흐. 말 잘 들으면 좋지 뭘 또 그러슈?”
“아니. 저놈들에게 진짜 검은 속셈이 있을 지도 모르잖아. 원소와 원술, 그 두 놈은 널 죽이지 못해 안달인 놈들이고, 저 세 놈들은 결국 원소의 따까리잖아. 저놈들이 지금 널 죽이기 위해 작당모의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저놈들이 무슨 작당을 하던 내가 당할 것 같소?”
“아무리 그래도 아무 방비 없이 있다가 뒤통수 맞으면.... 최악의 경우 백파적과 밀약을 맺고 널 제거하려 드는 것 아니야?”
“일단 냅둬보슈.”
여전히 이의민은 곽봉의 걱정을 별 감흥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의민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세 제후를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의민이 조금은(?) 무식할지 몰라도 누구보다 눈치는 빠른 사람이었다. 고려에서 한때 최고의 권력을 가졌던 만큼, 그의 온 몸에 살아있는 정치적 감각이 충분히 경고를 해주고 있었다.
충분히 의심을 하고 있는 이의민이지만, 이리 태평한 건 결국 스스로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저놈들이 내 뒤통수를 친다? 어림도 없지. 여기는 미타산이 아니다. 그때와는 달리 지금 내 옆에는 곽봉 형님도 있고 황군도 있다. 게다가 저놈들은 아까 5채 백파적들과 싸웠을 때의 모습이 내 무위의 전부라고 생각하겠지.’
이의민 본인이 가진 절대적인 무력에 대한 자신감. 물론 미타산 때도 그 자신감 때문에 죽었었다. 하지만 이의민의 생각처럼 그때와는 분명 달랐다. 일단 본인의 신체가 전성기인 20대로 되돌아왔음은 물론이고, 미타산 때와는 달리 이의민 혼자 따로 떨어져 고립된 상황이 아니라 그의 곁에는 분명 황군 5천이 있었다.
생각을 마친 이의민은 씩 웃었다. 사실 5채 백파적을 격파할 때의 모습이 자신이 가진 무력의 5할도 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 저들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궁금한 이의민이다.
각자 다른 생각을 품은 채 계속해서 행군하는 이의민과 군사들.
어느덧 목적지까지 절반 정도 남은 위치에 도달했다. 그런데 지나가는 길이 조금 이상했다. 산 중턱에서 높은 봉우리를 끼고 도는 지형이라 높낮이가 들쭉날쭉하여 험한 지형이었다.
이의민은 본능적으로 위화감을 느꼈다. 수많은 경험으로 인한 전투감각이 그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이의민이 행군을 멈추고 군사들에게 주변 수색을 명하려는 찰나, 갑자기 주변에서 큰 함성소리가 들렸다.
“우와아아아아!!”
분명 본진에 박혀 있을 거라던 백파적들이 상지곡 길목 주변으로 매복해 있었다.
모든 군사들이 갑자기 나타난 백파적들을 보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곽봉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씨발! 매복이 있을 거란 얘기는 없었는데....”
“원소, 그놈이 무슨 수작이라도 부린 것이겠지.”
하지만 이의민은 침착한 모습으로 군사들에게 외쳤다. 고려시절부터 온갖 산전수전을 겪었던 이의민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통 군사들을 재빨리 전진시켜 매복지를 벗어나거나 아니면 군사들을 퇴각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이다. 이의민의 결정은 후퇴였다.
“전군! 신속히 퇴각하라!”
이의민의 외침으로 1만여 군사들은 일제히 뒤로 돌았다. 그러나 퇴로에도 백파적들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완벽하게 포위당한 별동대.
이의민은 재빨리 주변을 확인했다. 모든 곳이 포위당했다면, 포위망 중 가장 약한 곳을 공략해 뚫어야 한다.
“곽봉형! 내가 저곳을 뚫을 테니, 군사들을 통솔하여 내 뒤를 따라오시오.”
“알겠네! 아니. 명 받들겠습니다! 후장군. 새끼들아! 쫄지 마라. 우리랑 같이 있는 이놈이... 아니. 이분이 누구시냐? 바로 야차 이의민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후장군과 내 뒤만 잘 따르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곽봉의 독려에 별동대 군사들도 정신을 차렸다. 모두 똘똘 뭉쳐 이의민과 곽봉을 따른다. 이의민이 일전에 보여주었던 무위를 잊지 않고 있었으니 모두 전의를 잃지 않을 수 있다.
‘그래! 후장군을 따르면 솟아날 구멍이 생길 거야.’
‘후장군께서는 분명 이 포위망을 뚫어주실 거다. 혼자서도 백파적 한 채를 박살내신 분인데, 이까짓 포위망 하나 못 뚫으실까.’
아무 희망 없이 그저 본능적으로 발버둥을 치는 것과 확실한 믿음으로 일사분란 한 움직임을 내는 것은 분명 큰 차이였다. 선두에서 무쌍을 펼치는 이의민의 활약과 그 뒤를 따르는 별동대 군사들의 지원 덕에 의외로 포위망이 쉽게 뚫을 것 같았다.
그때 협곡 위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협곡 위쪽으로 집채만 한 바윗덩어리들이 등장했다. 희망에 찼던 군사들의 표정이 다시 급격히 어두워졌다.
백파적들은 단순 매복 군사들만 숨겨 놓은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바윗덩어리를 굴려 보내는 낙석의 함정까지 파놓았던 것이다.
협곡 아래에 포위당한 상태에서 낙석에 당한다면 전멸을 피하지 못할 터였다.
이의민은 재빨리 선두의 지휘를 곽봉에게 맡겼다.
“일단 군사들의 지휘는 곽봉 형이 맡으시오.”
“뭐? 그럼 넌 어쩌고?”
“일단 저 바위를 어찌 해야지요.”
“무슨 소리를....? 네가 저 바위를 어떻게 한단 말이야? 설마 몸으로 저 바위를....? 그럴 순 없다. 어찌 네 목숨을 담보로 내가 살겠....”
“아!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라고! 천지가 개벽해도 형보다 늦게 죽을 거니까 그건 신경 쓰지 말고. 지체할 시간이 없소! 빨리 군사들 데리고 가시오!”
곽봉은 대체 이의민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의민이 직후 보인 모습에 입을 떡 벌렸다.
‘저! 저 미친....!’
이의민은 가장 먼저 내려오는 바위 앞으로 가서 대부를 휘둘렀다. 아무리 봐도 이의민의 모습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듯 보였다. 모두 이의민이 미친 거라고, 피떡이 될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의민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믿기지 않는 그 일을 해냈다.
콰콰쾅!!
이의민이 휘두른 대부에 바위가 박살이 났다. 산산조각 나서 흩어지는 돌덩이들. 덕분에 뒤에 있던 군사들은 무사했다. 하지만 내려오는 바위는 하나가 아니다.
이의민은 곧 다음 바위를 향해 뛰어갔고, 곧 그 바위 역시 박살을 내버렸다. 하지만 이의민 혼자서 모든 바위들을 다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곽봉형! 뭐하시오?!”
그제야 곽봉도 정신을 차리고 군사들을 이끌었다. 이의민은 계속해서 내려오는 바위들을 박살냈고, 모든 바위를 다 막을 수는 없었지만, 상당수의 군사들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의민의 활약 덕분에 어느덧 거의 대부분의 황군 군사들이 퇴각에 성공했다. 이의민은 슬슬 본인도 퇴각할 준비를 했다.
‘이제 거의 다 빼냈군. 남은 놈들은 어차피 황군도 아니고....’
퇴각하려는 이의민의 눈에 세 제후들이 모습이 보였다.
‘호오?! 이것 봐라?’
순간 이의민의 눈이 번뜩였다.
처음에는 이의민은 세 제후들이 원소의 지령을 받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백파적의 낙석에 당하고 있는 세 제후의 군사들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세 제후들은 크게 당황하며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만약 지금 이 백파적의 함정을 원소에게 미리 들었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결국 둘 중 하나로군. 저 세 얼간이들이 멍청해서 원소의 명을 제대로 이행 못하고 있다던가, 아니면 원소가 나를 죽이기 위해 저놈들까지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다던가....’
잠시 고민하던 이의민은 다시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