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백파적 (3)
본대가 도착한 것을 본 이의민은 귀찮은 뒤처리를 그들에게 맡겨 버렸다.
“거기 시체들 빨리 빨리 정리하고, 여기에 우리 막사를 세워야 할 것이다.”
“충! 알겠습니다. 장군!”
병사들이 초롱초롱한 눈초리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이의민 소속의 황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제후들이 이끌고 온 병력들조차 마찬가지였다. 직접 본 것과 들은 것은 차이가 있다. 눈앞에서 그런 인간 같지도 않은 무위를 본 병사들은 소속에 상관없이 경외의 눈길을 이의민에게 보내고 있었다.
이의민은 그런 눈초리가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곧바로 곽봉을 불렀다.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 포로 막사도 지어야겠소. 오백을 수용하기에 적당한 막사를 지어주시오. 내가 싸움은 몰라도 이런 건 젬병이라....”
“으휴! 알았다. 그런데 황문시랑의 조언대로 가는 거냐? 그런데 기왕 잡을 거면 더 잡지... 왜 하필 오백만 잡았냐?”
“그 정도가 딱 적당하오. 너무 많으면 다른 생각을 품을 수도 있지. 그럼 우리는 앞뒤로 적을 두게 되는 거요.”
“그럼 오백으로 끝을 내자고? 그건 너무 적은 거 아니냐?”
“당연히 아니지. 다른 산채에서도 오백 씩 받을 생각이오. 총 13산채라고 하니 전부.... 음. 대충 어느 정도 숫자는 되겠지. 그리고 막바지에 가면 산채 통째로 항복하겠다는 놈들도 있을 거요. 아! 물론 포로들끼리 연락은 차단시켜야 하오. 그놈들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그래야 하니.... 포로를 포섭하는 것들과 연락차단은 형님에게 맡기겠소.”
“헤헤! 맡겨만 주게.”
이의민의 명(?)을 받은 곽봉은 분주하게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이의민은 제일 먼저 완성된 막사로 가서 휴식을 취했다. 다른 이들은 진을 정비하고 포로를 관리하는데 여념이 없었지만, 이의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무도 그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장군부터 말단병사들까지 아무도 죽지 않고 이겼는데 누가 뭐라고 할까.
이의민이 그렇게 휴식을 만끽하고 있을 때, 좌장군의 호위병 하나가 급히 이의민을 찾았다.
“좌장군께서 부르십니다.”
“하암! 장군막사가 완성되었나 보군. 곧 간다고 전해드려라.”
이의민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한 번 편 후 장군막사로 향했다. 황보숭을 중심으로 제후들이 앉아있었는데, 매복조를 치러 간 원소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장군!”
“앉게. 먼저 오늘 후장군의 공을 치하하고 싶네. 내 대장군께 자네의 무위를 들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네만, 실제로 보니 오히려 그 이상이군.”
시작은 이의민의 공을 치하하는 것이었지만, 뭔가 불편한 그의 표정을 보니 단순히 좋은 말만 하려고 부르지는 않은 모양이다.
“허나 오늘 자네의 행동은 너무 무모했네. 그리고 너무 독단적이었어. 적군의 포로처리 같이 중대한 문제를 그리 자네 독단으로 하면 되겠는가? 엄연히 내가 총지휘관인데 내가 판단할 일이야.”
황보숭이 질책하는 건 충분히 명분이 있는 지적이었다. 공이야 어찌 됐건 군 전체를 통솔하는 것과 포로 처리는 어디까지나 총대장인 황보숭의 권한이니 말이다.
황보숭의 지적에 제후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의민이 세운 공이 워낙 컸기에 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저 바보 같은 후장군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실로 하늘이 돕는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의민은 그런 이들을 보며 속으로 비웃음을 지은 후 황보숭에게 해명했다.
“포로를 잡은 것은 소장의 독단이 아닙니다. 대장군이 이르신 말씀 때문에 그리 한 것입니다.”
“대장군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나?”
갑자기 하진의 이름이 나오자 혼란한 황보숭은 물론 제후들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좌장군만 구워삶는다면 이의민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진이 나온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특히 하진과 이의민의 관계가 특별해보였기에 골치가 아파지는 제후들이다.
‘무슨 말씀은.... 크크크.’
하지만 이의민은 하진에게 특별한 명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진은 이번 토벌, 특히 포로와 관련해서 이의민에게 따로 명을 내린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저 출정식에서 모든 군사들 앞에서 으레 하는 상투적인 연설을 했을 뿐이었다.
‘대장군께서는 분명 출정식에서 ‘황실의 위엄과 자비로움을 만천하에 알리고 와라.’라고 말했지? 항복하는 놈들을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으라는 말인지 알았다고 우기면 지들이 어쩔 건데? 일이 다 끝나면 어차피 쌀이 익어 밥이 됐을 건데.’
이의민이 생각이 억지라는 것은 본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눈앞에 필요한 게 보인다면 일단 저지르고 뒷일은 그때 가서 생각한다. 그것이 이의민의 지론이다.
이런 이의민의 생각은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 대장군 이름이 나오자 포로 문제는 더 이상 언급이 되지 않게 됐다.
그래도 원술은 미련이 남는지 끝까지 이의민의 잘못을 지적했다.
“대장군이 그리 말했다면 포로야 넘어간다 치더라도... 후장군의 행동은 문제가 있습니다. 결과가 좋았기에 망정이지....”
“뭔 말이 그리 많소. 결과가 좋았잖아?”
“아니! 그래도 만약 후장군이 죽었다면 사기가....”
“지랄!! 아까부터 후장군 후장군 거리는데 원술, 아니지. 네놈들 모두 날 후장군 취급이나 해주고 있느냐? 그리고 내가 죽으면 누구보다 기뻐할 놈들이 뭐가 어쩌고 어째?”
보통 기분 나쁜 일이 있더라도 이렇게 직설적으로 드러내진 않는다. 노골적인 이의민의 말에 모두가 당황할 수밖에 없다. 원술도 크게 당황하면서 이의민을 비난했다.
“이...! 이 천한 놈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사방장군이란 자가 어찌 이리 시정잡배만도....”
원술은 말을 잇지 못했다.
콰쾅!!
이의민이 대부로 탁자를 그대로 두 동강 냈기 때문이다.
“한번만 더 천하니 뭐니 하는 말이 나오면 그게 누구든 그 자리에서 죽는다.”
이의민의 기세에 원술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까 느꼈던 소름끼치는 느낌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원술뿐만 아니다. 다른 제후들 역시 서슬 퍼런 이의민의 기세에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아까 백파적들이 야차라고 했다. 그 기분을 조금이라도 알 것 같았다.
“그만!”
보다 못한 황보숭이 한숨을 쉬며 상황을 중재했다.
“일단 후장군에게 사과부터 하겠네. 큰 공적을 세운 자네를 죄인 취급했어. 하지만 다음부턴 내 명을 기다린 다음 행동하도록 하게. 오늘 같이 급박한 상황이라면 적어도 내게 말 한마디는 해주고 움직이게. 그리고 자네들도 명심하게. 자네들의 앙금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는 황명을 받들고 있는 신하들이란 것을....”
황보숭까지 나서자 순순히 물러서는 이의민.
“알겠습니다. 좌장군.”
다른 제후들도 마지못해 알겠다고 하고 물러섰다. 어쨌거나 황보숭은 공적을 기록하는 인물이다. 밉보여선 안 된다.
아무튼 이의민을 제대로 물 먹이려던 원술과 그 무리들은 자신들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열불이 차오르고 있다.
그때 막사 밖에서 다급한 호위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매복조를 치러 가셨던 원소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원소는 다른 이들에 비해 상당히 늦게 진영에 도착했다. 물론 황보숭이 그에게 매복조를 치러 가라는 명을 내리긴 했었다. 하지만 같이 매복조를 치러갔던 조조는 진작 본대로 합류했는데 원소는 늦어도 너무 늦었다.
“왜 이리 늦었는가? 사예교위.”
“죄송합니다. 좌장군. 소장이 적들의 매복조 몇을 포획하여 중요한 정보를 알아냈습니다. 그걸 확인하느라 늦었던 것입니다.”
“그래? 그게 무엇인가?”
왠지 모르게 크게 들떠 있는 원소. 단순히 중요한 정보를 알아내서 그런 것일까?
원소는 품에서 양피지 하나를 꺼내 황보숭에게 내밀었다. 그걸 본 황보숭의 눈이 커졌다.
“이, 이것은 지도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좌장군. 매복조 포로들로부터 입수한 것입니다.”
물론 아주 정밀한 수준의 지도는 아니었다. 그 정도의 지도라면 일개 도적이 가지고 있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노련한 황보숭은 이 허술한 지도만으로도 이곳 태행산의 지리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
“그렇다면 지도에서 이곳이 바로 우리가 있는 곳이겠군.”
“정확히 보셨습니다. 장군. 그리고 그 위쪽, 분지 같이 되어 있는 이 지점이 바로 현재 백파적들이 모두 모여 있는 본채입니다.”
“보자... 그럼 여기 주양봉이라고 표시된 길로 군사들을 모두 끌고 가면 되겠군.”
지도상에는 백파적 본채로 가는 큰 길 하나가 있었다. 모두 황보숭의 지적대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자기 원소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장군. 그리 하는 것도 좋지만 여기 상지곡이라고 표시된 지형을 보십시오.”
원소는 손가락으로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상지곡 쪽을 자세히 보시면 상지곡으로 연결된 길이 적 본채의 후방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오오. 그렇군. 그렇다면 병력을 나눠서 가야하겠는가?”
“소장이 이미 상지곡 길도 탐색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상지곡 길로는 1만 이상의 대군이 이동하기는 힘든 지형입니다. 그러니 병력을 나누되 오천 정도만 상지곡 길로 보내시고, 나머지 군사들은 주양봉 길로 가면 될 것입니다.”
“그럼 상지곡 쪽으로 갈 오천 군사들을 따로 뽑아야 되겠군.”
이때 기다렸다는 듯 원소가 눈을 빛냈다.
“그 오천에 대해서도 이미 소장이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상지곡 길로 가는 군사들은 적의 뒤를 기습적으로 치는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여태껏 산행에서 특출 난 모습을 보인 후장군이 이끄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원소의 말에 황보숭을 비롯한 모두가 눈을 빛냈다. 특히 황보숭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흐음.... 후장군을 상지곡 길로...?”
황보숭도 원소와 이의민의 파벌 싸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의민을 굳이 본대와 따로 보낸다는 원소의 의견에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방금 그대가 말한 대로라면 상지곡 길로 1만 정도가 갈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왜 굳이 오천만 그쪽으로 보내려 하는가?”
황보숭이 원소의 의도에 대해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원소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상지곡 길로 1만 군사를 보내기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좌장군. 나머지 오천 군사는 마침 여기 교모, 왕광, 포신의 군사들의 합이 대략 오천이니 이들 셋을 보내면 될 것 같습니다.”
원소의 막힘없는 대답에 황보숭의 표정이 다시 바뀌었다. 원소가 호명한 세 명은 완전한 원소의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특히 왕광과 교모는 원소를 맹주님이라고 까지 부르며 따르지 않았던가. 이의민을 따로 보내는 것에 검은 의도가 숨어있다고 봤는데, 바로 자기 사람을 함께 보내겠다고 의견을 순순히 정정하니 의심을 거두는 황보숭이다.
“뭐 나쁘지 않군요. 그렇게 하지요.”
이의민 역시 흔쾌히 원소의 의견대로 따르겠다고 대답했다. 이것으로 결정 되었다.
“그럼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출발하도록 하지.”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이의민과 제후들이 막사를 떠났다.
각자 자신에게 배정된 막사를 찾아 갔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원소에게 호명된 세 명의 제후들은 같은 생각이라도 한 것인지 원소의 막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시오. 다들 무슨 일로 이리 오신 거요?”
“맹주님. 저희에게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저희를 버리신 겁니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버리다니?”
“아까 이의민 그 자와 함께하라 하지 않았습니까?”
원소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쯧쯧 차며 말을 이었다.
“그게 버린 것이라니... 이 사람의 마음을 어찌 그리 몰라주시는 거요. 누구보다 세 사람을 믿기에 그리로 보낸 것이오.”
원소는 차분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이어진 설명이었지만 원소의 설명이 계속될수록 세 사람의 표정 역시 조금씩 밝아졌다.
“역시 맹주님. 전 처음부터 믿고 있었습니다.”
“하하! 이해해주니 기쁘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세 사람이 그 일을 성공만 시킨다면. 그대들의 이름은 이 원본초 보다 위에 있을 것이오.”
“저희가 어찌 맹주님보다 높은 곳에 있겠습니까. 제발 그 말씀은 거두어주시지요.”
들어올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원소의 막사를 나가는 세 사람. 환하게 웃던 원소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